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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smet Feb 05. 2021

인연(因緣)

"그게 중요한가요?"


관계에 있어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뿐이라던 그녀.

그런 그녀를 난 사랑 했다.


그녀는 서로가 알지 못하는 지난날들도, 그 속에 다른 삶도, 타인의 시선도, 그 어떤 것도 우리 관계 앞에 중요하지 않다 말했다. 나직한 그녀의 음성은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명확한 뜻이 담겨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말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린 여의도에서 처음 만나 서로에게 다가갔다.


그리 긴 만남은 아니었다. 고작 몇 주간의 만남, 밀물처럼 밀려오던 마음들과, 썰물처럼 놓아버릴 수밖에 없던 마음들이 폭풍처럼 지나갔고, 우리는 끝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 삶 깊은 곳에 선 하나를 긋고 인연이 되었다.


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인연(因緣)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관계를 맺다'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인 할인(因)에 인연 연(緣)을 사용해 '우리가 어떻게 서로에게 닿게 되었는지', '우리의 연이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때때로 우연이기도, 필연이기도 한 인연은 관계의 시작이 아닌 깊이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관계의 깊이를 결정하는 건 서로의 믿음이다. 관계를 맺어온 시간이 아무리 길다 하여도, 또 관계를 통해 얻게 되는 물질적 이윤이 크다 하여도 신뢰가 없는 관계는 한계가 있고, 지속되기 어렵다. 반면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는 그 기간이 짧아도, 관계를 통해 얻는 물질적 이윤이 없어도 무너지지 않고 단단히 유지된다. 그녀와 내가 짧은 기간에도 인연이 될 수 있었던 건 어떠한 편견도 없이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믿음 어린 눈빛 덕분이었으며, 나의 오랜 친구들의 관계가 이토록 소중하게 이어질 수 있는 건, 분명 서로가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꿋꿋이 버틸 수 있게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리라. 비록 그녀와 나의 만남은 끝이 났어도, 여전히 우리의 인연은 끝이 아니며 생이 다하는 날까지 내 친구들과 나의 인연도 계속되리라. 삶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지만 그들은 모두 '나'라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이다.


'인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나는 중학교 2학년 시절 어느 도덕 수업 시간으로 돌아간다. 한 여름날 오후 수업으로 지쳐가던 우리에게, 선생님께서는 60년, 70년이 지나 만약 우리가 죽는 순간에 있다면 과연 그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많은 인연들이 나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물으셨었다. 여러 대답이 오갔고, 이어 선생님께서는 우리의 마지막 순간에 진심으로 울어주는 친구가 딱 '세명'만이라도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삶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도덕 선생님께서는 삶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인연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그 후로 10여 년 하고도 몇 해가 더 지나온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작은 삶에도 수많은 인연들이 존재하고 또 스쳐 지나갔다. 내 삶의 성공 여부를 아직까지 알 수 없으나, 아낌없는 사랑으로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 어린 시절부터 함께 성장하며 고된 시절을 함께해준 나의 친구들, 목숨 다해 사랑해 마지않았던 여인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까지, 그렇게 우리는 모두 인연이니 내 삶의 성공 여부는 현재 진행형이 아닐까?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그날, 내 나이 14살 어느 여름 도덕 수업 시간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오길 간절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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