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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우주보다 존귀하다

하늘과 땅의 결실, 태일太一

by 오후의 책방

우울한 사회

10여 년 전 한 신문에서는 현대를 ‘우울한 사회’라 표현했다. 분명히 COVID-19가 가져온 코로나 블루는 예상치 못했을 텐데, 한 시대의 성격을 정의하는 표현으로 '우울'이란 수식을 붙이다니! 적확한 표현이다. 소셜네트워크 앱이 코로나19로 단절된 사회를 연결시켜 줄까? 아니다. 오히려 더욱 깊어지는 고립과 외로움을 생각하게 한다. 중국 ‘폭스콘’ 공장의 자살 도미노 사건은 이제 당신의 기억에서 잊혔을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총기 사건으로 수십 명의 아이들과 교사가 사망했다는 소식도, 테러, 방화, 민주화 시위에 대한 폭력적 탄압의 충격도 금세 잊힌다. 지금은 당장 아파트가 무너진 뉴스가 우리에겐 더 크게 와닿는다.

미디어에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끔찍한 패륜적 범죄들이 사회면을 뒤덮고 있다. 처음에는 인권침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이제 교육시설에는 거반 CCTV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보도되는 청소년 집단 폭력, 성범죄 기사에 불안을 지울 수 없다. 나 또한 먼 이야기라 생각했다. 옆 동의 한 소녀가 학교 옥상에서 투신하기 전까지.

TV와 영화를 10대들이 모방하는지, 이들의 실상을 영화가 그려내는지 이제는 모르겠다. 범죄의 잔혹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언론과 교육계는 앞다투어 ‘10대들의 인성이 파괴되었다’고 말했다. 왜 어른의 책임이라고 솔직히 말하지 못하는가? 경제위기로 자신의 아이를 죽인 부모, 불안한 노후와 고립감을 이기지 못한 60대 고령자들의 자살 증가, 그리고 연예인의 연이은 자살…. 냉혹한 경쟁사회에서 인간 본연의 가치가 물질과 이윤추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넥플릭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은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가 그러했듯 극한 상황에 쳐했을 때 '과연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 답을 이제 순진하지도 않고, 아직 물들지도 않은 '아이와 어른의 중간인 학생'에게서 찾고 있으니 말이다.


"같이 안 있어도 우린 친구잖아.
어디 있어도 우린 친구잖아."


‘인간의 가치’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우리 사회에 인성론이 부족한 것일까? 문․사․철, 인간을 탐구해왔던 인문의 성과들은 넘쳐나고 있다. 너무나 넘쳐나기 때문에 오히려 질려한다. 가르쳐주려는 시도는 꼰대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람시나 벤야빈이 대중 속에 내려오기나 영화적으로 말하기를 시도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문사철 보다 영화나 드라마가 훨씬 파급력이 크다. 문제는 그람시나 벤야빈에겐 펜 한 자루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오징어 게임>이나 <지옥>이나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 던지는 화두는 인간의 본성은 악한가 선한가, 극한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를 묻는 데서 그친다. 유치한 질문이라고 하면 좀 심한 평가일까. 또 그 전달 방법도 폭력과 살인, 섹스 자극적인 소재를 애용하는 상업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면 '볼 사람 없는 예술작품을 만들란 말인가'라고 비판할 수 있다. 나도 할 말이 없다. '저도 재밌게 봤습니다. 정말. 하지만 꼭 그래야만 했나요? ' 정도.


인간 그 자체로서의 목적

내가 통계청 자료에서 자살률을 처음 조사한 것이 2008년었다. 한국인의 자살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였다. 여성의 경우 3대 사망 원인 중에 하나로 교통사고 사망률보다 더 높았다. 하루 평균 35.1명꼴로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결과는 자살이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임을 보여주었다. 13년이 지났다. 달라졌을까? 2021년 통계청 조사에서도 여전히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기록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의 『Justice-정의란 무엇인가』는 7천 명 안팎의 하버드 학부생들 중에 매년 천여 명이나 모여 <정의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한 강의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다원화 시대, 자유시장 경제 속에서 정의와 부정, 개인의 권리와 공리에 관한 여러 딜레마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 ‘자살’이라는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저자는 다음과 같이 칸트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은 이런저런 의지에 따라 임의로 사용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존재한다. …중략…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 임마누엘 칸트


만약 자살이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면, 사람을 물건 취급하면서 그 자체를 목적으로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타살과 차이가 없다. 칸트는 인간에게 사물과는 구별되는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가치가 있음을 말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도구가 되어버린 인간의 자화상을 목격한다.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경제적 도구로써 하루하루를 기계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자괴감이 몰려올 때도 있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내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의문에 고민하기도 한다.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감으로 뚜렷한 이유 없이 직장일에 불만을 갖는 것을 말하는 ‘직장인 사춘기증후군’이란 신조어가 생긴 지 오래다. 웃픈 현실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현대인들이 다시 어린아이로 퇴행을 겪고 있는 슬픈 일면이다.

‘나는 누구이며,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가슴 한 편의 불안과 외로움은 늘 우리를 방황하도록 만들 것이다. 인간 삶의 의미, ‘인간에 대해 새로운 가치 발견’이 절실히 필요하다. 과연 이 해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당신과 나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물론 이 '가치'는 또 다른 물질로 교환 가능한 상업적 가치를 말하는 것은 아님은 아시겠지? 결코 가볍지 않은 이 질문에 대해 우리의 선조들은 어떤 답을 제시했을까? 직접 들을 수 없다면, 그들이 남긴 문화유산에서 찾아보자. 자, 시작해보자.


하늘의 존귀한 신, 태일太一

지금부터 태일이란 단어가 수십 번은 등장한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미리 말씀드리면 대한민국의 '대한'과 '태일'은 동의어이다. 태일이란 어휘 때문에 막힐 때는 대한이라고 바꿔 읽으셔도 무방하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 설명하기로 하고, 자 진짜 시작.

서울 종로구 삼청동, 이곳의 명칭은 도교道敎의 태청太淸·상청上淸·옥청玉淸 3위位를 모신 삼청전三淸殿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삼청전의 제사는 소격서昭格署에서 맡았는데, 소격서는 잘 알려진 대로 중종 때 조광조에 의해 폐지된다. 조광조는 좌도가 정도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소격서의 폐쇄를 지속적으로 간한다. 결국 1518년(중종 13)에 폐지되고, 이때 제복祭服·제기祭器·신위神位까지 땅에 파묻혔다. 비빈(왕비나 후궁)들의 낭비를 근절하는 개혁의 일환으로써 보기도 하지만, 실상 그 목적은 유학의 체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소격서에 대한 논란은 조광조 이전부터 있어왔던 일이었다. 가령 태종 4년(1404년), 태종이 초제(별에 올리는 제사) 지낼 날짜를 상정하도록 명하자, 유학자들이 도교 숭배에 대해 반대하며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예조 지사 김첨이 다시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여기 특이한 문구가 보인다.


태일太一은 하늘의 존귀한 신貴神이기 때문에, 한漢나라 이래로 역대에서 받들어 섬기어 여러 번 아름다운 상서祥瑞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전조前朝에서 복원궁福源宮·소격전昭格殿·정사색淨事色을 두고 따로 대청관大淸觀을 세웠으며, …중략… 만일 군사를 행行하려면, 장수가 대청관에 나가서 재숙齋宿하고 초례를 베푼 연후에 행하였으니, 대개 태일太一은 어진 별[仁星]이 있는 곳이어서 병역兵疫이 일어나지 않고, 방국邦國이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대청관은 태청관을 말함)


소격서에서는 삼청전(옥청,상청,태청)과 내외전 외에 태일전太一殿을 따로 두었다. 태일太一은 천신天神의 이름으로 하늘에서 가장 존귀한 신으로 모셔졌다(태일전은 태일이 있는 곳에 따라 옮겨 설치하는데, 처음에는 경상도 의성義城에 두었다가 성종 때에 충청도 태안泰安으로 옮겼다고 한다). 실록에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을 비롯한 여러 왕들이 태일성이 움직이는 방위에 따라 해당하는 지방에 태일전을 짓고 태일신에게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세종 대에도 마찬가지다. 세종대왕은 선대왕처럼 천자국의 상징인 제천의례를 소격소에서 올리는 제례로 변용하여 사대에 치우친 유림들의 반대를 피하고자 했다. 왕은 백성의 소리뿐만 아니라 하늘의 소리, 즉 천명을 들어야 하는 자리다. 한글은 백성의 소리를 듣기 위함이었고, 천제는 상제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또 한숨이 나오지만, 세종대왕의 뜻대로 되진 않았다.

[창덕궁 태일문 : 사진제공 STB상생방송]

도교는 황제와 노자의 학설로 이론체계를 세우고 교단을 확립하여 황제와 노자를 시조로 받들었다. 그런데 도교의 주요 경전인 『포박자抱朴子』나 개설서인 『운급칠첨』을 보면, 황제가 신농씨의 후예인 광성자나 치우천황의 국사인 자부 선생에게서 깨달음을 전수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노자는 동이계 국가인 초나라 출신으로 자신의 성 한韓 씨를 이李(木+子)씨로 바꿈으로써 본래 자신이 동방 사람임을 암시하였다. 즉 황제와 노자는 혈통적으로나 학맥적으로 모두 동이족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도교는 본래 한국인의 원형 문화인 신교神敎의 신선사상에서 분파되어 형성되었으며 그 신앙 형태 역시 신교를 계승하고 있다.

이 점을 도올 김용옥 선생도 논증한 바 있다. 그의 저서 <노자가 옳았다>에서 기존의 노자 연구의 비노자적인 지점을 비판하고 최치원이 말한 국유현묘지도 즉 신교와 노자의 본래적 가르침이 상통하고 있음을 말했다.

신교神敎는 북극성, 삼태성, 북두칠성 하늘의 세 신성한 별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도교에서도 태일, 삼청, 칠성 사상이 있다. 하늘의 모든 별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운행하는데, 그 중심별을 태일太一 또는 태을太乙이라고 한다. 이처럼 상제님과 더불어 하늘의 천신이신 태일신을 함께 모셨던 도교는 신교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태일太一을 보다 명확히 설명하는 신교 문화의 사서史書가 있다.


만유 생명의 근원, 삼신三神

조선 중종 시기에 한민족 신교 문화의 신학과 철학의 기틀을 세운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1455~1528)이다. 그의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고려말 문하시중을 지내며 『단군세기』를 쓴 행촌 이암의 현손(5대손)이다. 외세의 침입으로 천자국의 위상이 쇠퇴해가던 고려 말, 47명의 단군께서 다스린 단군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행촌 이암과 중종반정 이후 사림의 득세와 명분론에 치우친 정치체제 속에서 신교의 맥을 다시 이은 이맥을 생각하노라면, 과연 역사적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된다.

일십당 이맥은 『태백일사』「소도본전 경훈」에서, ‘삼신은 천일 지일 태일이라(三神은 乃天一地一太一之神也)’하여, 만유 생명의 근원인 삼신三神이 현실 속에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으로 자신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그런데 첫째로 삼신三神이란 말에서부터 혼동이 온다. 혹시 신이 세 분이란 말인가? 대부분의 다신 종교나 서구 기독교는 우주의 신 또는 창조주를 말할 때 한 분의 하느님, 유일신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삼신’이란 말에서 마치 세 분의 하나님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세 분의 신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은 본래 일신一神이지만 세 가지 덕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삼신과 ‘하나’되어 우주 자연의 질서와 인간 역사를 총체적으로 다스리는 인간 형상을 하고 계신 주신主神을 ‘삼신상제님’ 또는 ‘상제님’이라 불러왔다.


태시太始에 하늘과 땅이 ‘문득’ 열리니라. 홀연히 열린 우주의 대광명 가운데 삼신이 계시니, 삼신三神은 곧 일신一神이요 우주의 조화성신造化聖神이니라. 삼신께서 천지만물을 낳으시니라.

이 삼신과 하나 되어 천상의 호천금궐昊天金闕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동방의 땅에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은 아득한 예로부터 삼신상제三神上帝, 삼신하느님, 상제님이라 불러 왔나니 상제는 온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 하느님이니라. - 증산도道典 1편 1장 1~3절


‘일즉삼一卽三 삼즉일三卽一’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가 구체적으로 현실에 작용하려면 셋으로 열려야 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변화 논리로 볼 때 본중말本中末이라 한다. 하나가 셋으로 작용할 때 그 첫 시작이 있고, 작용하는 중간 과정이 있고, 그다음에 끝마무리를 짓는 과정이 있다는 뜻이다.

흔히 한국인은 숫자 3을 참 좋아한다고 하는데, 씨름을 해도 세 판, 내기를 해도 세 번, 무엇을 해도 세 번을 한다고 우스갯말을 하곤 한다.

한국인은 하나1가 3수의 원리로 펼쳐지는 대자연의 원리를 생활문화 속에 그대로 적용해온 오랜 문화 전통을 갖고 있다. 봄에 만물을 내고, 여름에 길러 가을에 결실을 거두는 생장성生長成의 법칙은 3수의 원리로 만유를 주재하시는 삼신상제님의 창조섭리가 지구 1년의 초목 농사 속에 자연의 법칙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천부경에서는 하늘과 땅 인간을 정명할 때 ‘천일', '지일', '태일’이라고 한다. ‘일一’은 우주를 낳은 조물주 곧 삼신을 말한다. 앞에서 설명한 데로 일신이지만 현상 세계에 작용할 때에는 3수의 법칙으로 드러내시기 때문에 삼신이라고 한다. 서구 기독교 문화의 유일신이나 삼위일체와는 전혀 다른 신관이니 혼동하지 말자. 간혹 일신一神을 기독교의 유일신唯一神으로 오독하는 사람들이 있어 집고 넘어가는 부분이다. 이 삼신의 신성과 지혜와 광명이 하늘에도 100% 그대로, 땅에도 100% 그대로 그리고 인간 속에 100% 온전히 그대로 깃들어 있기 때문에 하늘을 천일天一, 땅을 지일地一, 인간을 태일太一이라 부른다.

그런데 왜 인간을 인일人一이라고 하지 않고 태일太一이라고 하는 것일까?


하늘땅보다 더 존귀한 존재, 태일太一

태太는 대大와 씨앗을 의미하는 ‘⼂’가 합해진 글자로, 단순히 ‘크다’라는 대大자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태는 씨앗을 품고 있으니 모든 것의 근원이며 또한 결실이 된다. 동방의 한민족은 예로부터 천지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받들었다. 이 천지 부모의 이상과 꿈을 이루는 우주의 주인공, 그 인간의 위격이 바로 태일太一인 것이다.


"천지가 합덕해서 낳은 인간 속에 삼신 하느님의 신성과 그 거룩한 대조화가 그대로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으며, 천지 질서를 다스려 삼신 하느님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천지보다 더 존귀하게 여겨 인일人一이라 하지 않고 태일太一이라고 정의하는 이유입니다." - 안경전 종도사 / 환단고기 역주자,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이사장


일전에 이형구 문화재위원을 뵈었을 때 그분은 손으로 물을 떠먹고 있는 호미닌의 사진을 가리키며 소감을 말한 적이 있다. "저는 이 그림을 참 좋아합니다. 뭐하는 모습 같아요? 인류가 얼마나 많은 긴 시간을…, 수백 만 년인지도 모르죠. 수백 만 년을 저렇게 손으로 물을 떠먹었어요. 이 컵이 나올 때까지 그릇이 나올 때까지 수백만 년이 걸린 거예요…."

그는 오랜 역사과정에서 마침내 인류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 것을 감격해했다. 한평생을 고고학 연구에 바쳐온 노학자의 감회는 결코 가벼이 지나칠 수 없는 긴 여운을 남겼다. 그것은 우주의 역사과정에서 인류가 마침내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존재와 근원에 대해 각성하게 된 과정과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다큐 코스모스에서 만약 우주의 역사를 1년으로 압축한다면, 현생인류의 탄생 시기는 12월 31일 마지막 날에 아침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손으로 물을 떠먹던 호미닌이 도구를 사용하고 불을 다루며, 마침내 현생인류가 되어 천단을 쌓아 제사를 올리고, 신교의 가르침을 받아내리는 영성 지능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문화를 창조하고 문명을 쌓아온 인류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참으로 신비롭고 경이로운 여정이 아닌가. 130억 년 일지, 140억 년 일지 모르는 이 긴 우주의 역사 시간대에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것이다.


스승님께서는 종종 “이 대우주 천체권은 사람 농사를 짓기 위해서 생겨져 있는 것이다”라 하셨다. 내겐 이 광활한 우주 속에 인간의 의미, 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깨우쳐주신 가르침이었다. 기나긴 우주 역사과정의 결실로써 나 자신이 다시 인식될 때, 나의 자아상을 다시 세울 수 있지 않을까? 20세기 프랑스 철학이 실존주의에서 구조주의로 다시 후기구조주의로 넘어오며 외친 진정한 자유란 인간에 대한 자아상을 다시 세우면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비록 그 작용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전자와 호르몬에 의해 결정된다느니 인간 본성의 악하냐 선하냐는 이분법적 유치한 사고 틀에서 인간을 가둬놓고서 인간의 자유를 말할 수 있을까? 인간 지성과 이성의 밝은 빛을 드러내기 위해 시작된 계몽주의는 이제 낡고 허망한 외침이 되었다. 아무리 다시 계몽을 외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신에 대한 관념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신을 갈망하고 찾고 사랑하는 영성은 인간의 본성이기에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나는 영성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시각으로, 영성의 실현이야말로 인간성을 완성하는 길이라고 본다. - 길희성 『영적 휴머니즘』

인간 영성회복은 인간을 낳고 기르는 천지에 대한 경외심과 진리를 향한 구도심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맹목적 믿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가치다. 삼신상제님이 주재하시는 천지 시간 중에 나는 어느 때에 살아가고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역사적 존재로서 나'는 이끗의 도구가 아닌 '우주의 목적 그 자체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상제 문화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인간의 가치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상제 문화를 찾아가는 길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생의 목적을 찾는 여정과 결국 한 길에서 서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形於天地하여 生人하나니

萬物之中에 唯人이 最貴也니라

하늘과 땅을 형상하여 사람이 생겨났나니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존귀하니라.

天地生人하여 用人하나니

不參於天地用人之時면 何可曰人生乎아

천지가 사람을 낳아 사람을 쓰나니

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때에 참예하지 못하면

어찌 그것을 인생이라 할 수 있겠느냐!

증산도道典2편 23장 1~4절


‘천존天尊과 지존地尊보다 인존人尊이 크다. 이제는 인존시대人尊時代다'

인간에 의해 마침내 우주의 역사가 성취됨을 의미하는 이 놀라운 선언은 인간이 우주 속에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정의한다. 그런데 태일과 상통하는 또 하나의 단어가 떠오른다. 구한말 꺼져가는 국운의 불씨를 다시 밝히려 했던 고종, 그가 천자국을 선포하며 내세웠던 국호 대한제국大韓帝國, 그 대한大韓의 의미가 바로 태일과 동의어이다.


태일, 대한大韓의 의미

‘대한大韓사람 대한大韓으로 길이 보전하세.’ 애국가의 마지막 소절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대한大韓의 한韓은 하나, 크다, 중앙, 하늘 등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한韓의 정신을 대표하는 것은 바로 ‘광명’ 사상이다.


한’의 뿌리는 바로 신교 삼신[조화신,교화신,치화신]의 광명 정신입니다. 광명은 우주 만물의 실상이요 본성으로서 우리 조상들은 하늘의 광명을 ‘환桓’이라 하고 땅의 광명을 ‘단檀’, 천지의 광명을 실현하는 역사의 주체를 ‘한韓’이라 했습니다. - 안경전 종도사


인간은 천지의 자녀이며 천지는 인간을 통해 하늘의 뜻을 이룬다. 바로 한韓은 그 주인공인 태일太一의 광명을 의미한다. 이 ‘한韓사상’을 계승한 사람들이 한국인이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이 광명의 세상을 열어나갈 만한 역사적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냉정히 자문해보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서字書로, 고대의 백과사전 격인 『이아爾雅』에는 동방 한민족을 대평지인大平之人이라 말하고 있다. 최치원 선생은 대大는 곧 태太라고 주석하였는데, 이 태평지인이란 말에서 평화의 바다 태평양이란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민족이 태평지인太平之人의 나라, 불사지국不死之國, 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仁方) 등으로 불리며 동방문화를 전수해준 주체였다는 것을 우리 자신은 알고 있나? 도리어 과연 우리에게 그만한 문화 창조의 역량이 있었겠냐는 의구심을 품는 이들이 많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은 동방 문화의 연원을 왜곡시켜 놓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자아상마저 뒤틀어 버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교神敎와 상제 문화’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자신의 역사를 지켜내지 못한 사람들이 누구가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또한 현재가 과거 뿌리와 단절되어 제 정체성을 상실하였는데 어떻게 밝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겠는가.

나 같은 일개 칼럼니스트는 환빠라는 말을 들을 때면 웃음이 나기도 하고, 오히려 '그래 나 환빠다. 그러면 넌 식빠(식민사관빠)냐?'라고 묻겠지만, 학계에서 환단고기를 연구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조롱과 무시당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이건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환단고기 한 구절조차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소위 전문 역사가들이 환단고기를 위서다, 환빠다, 부정을 위한 부정 논리를 펼 때는 정말 지성인인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잃어버린 인류의 시원 문화이자 우리 민족의 뿌리 문화인 신교 문화를 회복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히 신교와 상제 문화를 계승하며 역사적 존재로서 살아갔던 이들의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다음 글에서는 상제 문화의 수호자 낭가郎家와 낭가의 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것이다.


<참고자료>

『도전』(도전편찬위원회), 『개벽 실제상황』(안경전), 〈역사특강〉시리즈,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인간등정의 발자취』(제이콥 브로노우스키), 그 외 여러 보도자료,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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