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잊은 중국, 누가 빌미를 제공했는가?
경균도름傾囷倒廩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모두 드러내어 말하는 것을 뜻한다. 창고에 숨긴 쌀을 전부 내놓는다는 의미에서 변용된 말인데, 그 정도가 지나치면 부끄러움을 숨길 염치가 없어지고, 감히 나를 대적할 자가 누가 있겠냐는 자신감이 될 수 있다.
중국은 산동성 동이족의 중심지 중에 하나인 '임기시'에 ‘동이문화박물관’을 세워놓고, 태호 복희씨, 소호금천씨, 치우, 순임금을 동이東夷의 4대 영웅이라고 부르며 전시하고 있다. 동이족을 오랑캐라 폄하하거나, 혹은 애써 역대 왕조의 통치자들이 동이족이었음을 은폐하려던 이전과 전혀 다른 태도다. 혹시 이제 스스로 동이의 후예들이라 인정하는 것일까? 대체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중국정부는 2002년 경부터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포함하는 동북 3성의 고대사, 즉 우리 선조들의 역사무대였고, 현재는 조선족이 있는 만리장성 밖 동북방지역의 고대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진행해 왔다. 중국은 55개의 소수민족과 하화족으로 불리는 중국 한漢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과 티베트 독립운동에서 보듯 이들 소수민족 지역을 통합하는 데는 강압과 무력을 동원했다. 그다음 진행한 작업이 티베트지역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서남공정'이었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 동북공정은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서북공정', 몽골의 '북방공정', 남중국해 인근의 '남방공정'을 포함한 <중화문명탐원공정>의 일환이다.
홍산문화를 포함하는 요하문명, 그리고 조보구문화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홍산문화의 하가점 상층(BCE 1,500~ )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유물로 고조선식 비파형 동검이 있다. 즉 이곳은 단군조선과 그 이전의 신시배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적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작한 데에는 소수민족의 독립을 통제하고자 하는 이유, 북한정권이 붕괴는 상황이 일어날 경우 북한의 역사적 영유권을 주장하고 하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동아시아의 문명의 발상지라 믿었던 황하문명보다 3천 년 이상이 앞선 문명이 만리장성 밖, 동이족의 강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동방 문화의 원류 동이東夷
사마천은 『사기』에서 삼황을 지우고 오제본기로 시작한다. 삼황三皇, 즉 태호복희씨, 염제 신농씨, 황제 헌원은 모두 동이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제본기에서 황제 헌원을 하화족으로 바꾸고 동이족의 치우천황과 헌원의 대결구도로 중국사의 시작을 기술했다. 치우와 헌원의 전쟁은 동이족 내부의 갈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것을 동이와 하화족의 대결인 것처럼 바꾼 것이다. 동이는 소위 오랑캐라 불릴 만큼 미개하고 야만적인 이들이었을까?
흔히 '동양철학'이라 하면 공자, 노자를 비롯한 제자백가를 들고, 논어나 도덕경을 이야기하는데, 동양 지성사에 무지하거나, 역사가 빈곤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도서관圖書館이란 말의 어원은 고대 왕실에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보관하던 곳이란 뜻이다. 하도와 팔괘를 그려 동양문화사상사의 첫 문을 여신 분이 바로 인문지조人文之祖 태호복희씨다. 신락시 태호복희 사당에는 해마다 20만 명에 가까운 이들이 모여 제를 올리고 있다. 정작 태호복희씨의 후손인 한국에서는 그에 대한 인식조차 미비하다. 시획팔괘始劃八卦, 태극기의 건곤감리를 처음 그린 분이 태호복희라는 것을 잘 모른다.
『후한서』 「동이열전」 등에는 ‘東夷’란 부여, 고구려, 예, 읍루 등 우리 한韓을 부르는 표현으로, 『설문해자』에는 동이를 ‘동방사람, 어진 사람, 큰 사람’이라 했다. 동이를 구이九夷라고도 하는데, 9개 이夷족 혹은 여러 동이족을 통칭하는 표현이었다. 후한시대 채옹蔡邕은 『獨斷』에서 "天子, 夷狄之所稱, 父天母地故, 稱天子. : 천자는 동이족 임금의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섬기기 때문에 하늘의 아들이라 한다."라 했다. '황제'란 말을 진시황이 처음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 본래 천자, 황제문화는 천지를 부모로 모시는 동이의 문화이며, 동이로부터 전해졌다는 것이다. 동이를 오랑캐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훗날 중화중심사관에서 비롯되었다. 정작 중화中華라는 말을 처음 부여한 주나라에 대해 맹자는 <이루하>에서 서이西夷 즉, 夷족이라 하였다. 그럼 대체 하화족이란 실체가 본래 있기는 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동이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개념일까?
일제 식민사관과 소중화주의 사대사관의 콜라보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산하에 중추원을 세우고,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만들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우리 역사무대에서 대륙과 해양을 삭제하고 '한반도'로 안으로 욱여넣는 의도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낙랑군 평양설이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4군을 세웠다는 것인데, 그 지역을 평양으로 비정한 것이다. 사학계는 이를 식민사관이 아니라, 이미 200여 년 전 조선시대부터 논증되었던 것이라 한다. 대표적인 예로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안정복의 <동사강목>을 든다.
정약용은 그 주장의 사료적 근거로 사마천의 『사기』를 들고, 『삼국사기』와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은 비판했다. 사마천이 어떤 관점에서 『사기』썼는지, 앞에서 간략히 짚었었다. 정약용에겐 『사기』가 더 큰 신뢰를 주는 역사서였던가 보다. 정약용이라는 위대한 정치사상가를 어찌 폄하하겠는가. 그러나 그가 고조선이 기자의 후예라 믿고, 고조선이 절대로 압록강 이북의 '오랑캐 지역'에 있을 수 없다고 믿었던 유학자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정약용은 역사연구의 기초가 되는 현지답사를 단 한번 가보지 않았다. 이야기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것 같아 줄이지만, <아방강역고>의 비평은 북한의 사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를 참고하면 좋겠다. 역사학은 해석과 그 해석의 관점이 너무나 중요하다. 같은 시대 실학자이며, 청을 오가며 그 역사의 터를 직접 밟았던 연암 박지원은 이렇게 말했다.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사군을 죄다 압록강 안쪽으로 몰아넣어 억지로 역사적 사실로 만들다 보니, 패수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 박지원, <열하일기> 1권 도강록
즉 유교가 지배사상이었던 당시에도 다른 주장들이 논박을 주고받았다. 그중에서 한사군 평양설, 기자동래설 등은 소중화주의 유학자들의 역사관과 맥락이 이어져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 고조선의 강역과 한사군의 위치, 패수가 어디냐에 대해 논의되어 왔다고 하나, 우리 사학계는 하필 소중화주의 사관과 식민사관과 동일한 '한사군 평양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중국의 경균도름에 동조하거나, 침묵하거나 오히려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노릇이다. 시진핑이 이런 자신감 넘치는 망언을 한 데에 우리 사학계가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역사특강>, <한문화 특강> 등 여러 사학자, 문화사 연구자들과 함께 이를 바로 잡고자 십 수년이 흘렀다. 그동안 격려도 많이 받았지만, 내게 돌아오는 9할은 중국도 일본도 아닌, 우리 한국인의 무관심, 그중에도 일베와 일베와 진배없는 젊은이들의 비아냥이었다. 독립운동가이며 역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여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이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 단재 신채호의 『낭객(浪客)의 신년만필(新年漫筆)』 중
아직 식민사학이 독버섯처럼 심어지기 이전이었으니, 그 비판의 대상은 정신을 잃어버린 '부유腐儒'(허래허식에 빠진 지식인과 지도자)였을 것이다.
사학史學은 문화 공동체의 정체성을 찾는 학문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학문이다. 사학史學이 병들면 지성사, 민속, 언어, 미술, 의복, 정치 등 문화사 전반에 악영향을 미친다. 사학이 병들면 문화를 보는 눈도 멀게 된다. 유적과 유물을 보아도 해석할 문화 코드를 잃게 된다.
<용봉문화의 원류>를 쓴 왕대유는 중국 용봉문화의 원류를 태호복희씨와 염제신농씨에서 찾았다. 그는 이들이 동이족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용봉 문화가 발견되는 지역이 현재 중국 영토이고, 중국사에 기록되었으니 중국문명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연구대로라면, 오히려 동이문화에서 자양분을 받아 중국문화가 태동되었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는가? 주객이 전도된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학계 풍토에서 그들만의 '정설'에 논박하고, 힘들게 버텨나가는 연구자들은 얼마나 힘겨운 싸움일까? 타인의 뻔뻔함, 우리의 자학과 비아냥 속에서 이 일은 '사명감'을 갖지 않고서는 지속하기 힘든 일이다. 나는 그저 한 명의 나팔수에 불가한데도 이처럼 힘겹게 느껴지는데 말이다.
참으로 기나긴 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