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를 처리하도록 하지
"키라 요시카게, 33세에 독신. 일은 성실하게 빈틈없이 잘하는데, 열정도 영 없고... 어딘가 엘리트 같고 기품이 있어 여사원들에게는 인기가 있지만, 회사에서는 배달이나 심부름만 시키지. 나쁜 녀석은 아닌데... 이렇다 할 특징은 없는, 존재감이 희미한 친구야."
흔히 ‘죠죠의 기묘한 모험 4부’로 알려진 만화, ‘다이아몬드는 부서지지 않는다’에서 등장인물 중 하나인 키라 요시카게(吉良 吉影)를 그의 직장 동료가 설명한 대목입니다. 실제로 해당 작품에서 키라는 재능이 탁월하고 지능 또한 매우 높지만, 그저 남의 눈에 띄지 않고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이유로 능력을 적당한 수준만 쓰며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기묘한 인물입니다.
키라 본인의 대사를 빌리더라도 그의 삶은 “나는 항상 '마음의 평온'을 바라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설명해주는 거야. '승패'에 집착하거나 머리를 싸매야 하는 '트러블', 밤에 잠도 이루지 못할 '적'을 만들지 않으려는... 그런 것들이, 나의 사회에 대한 자세이자, 그것이 자신의 행복임을 잘 알지...” 정도로 방향성이 대략 정리되는데요. 작품이 한창 연재 중이던 20세기 말엽엔 이처럼 갖춘 기량에 비해 야망은 시시한 인간상 자체가 굉장한 파격으로 통했죠.
사실 작중에서 키라가 세간의 시선을 애써 피했던 것엔 스포일러 급으로 중대한 이유가 숨어 있긴 합니다만. 적어도 1990년대 중반엔 무척이나 기묘한 삶의 태도로 간주됐던, 키라가 표면적으로 내세웠던 인생관인, “격렬한 '기쁨'은 필요 없는... 그 대신 깊은 '절망'도 없는... '식물의 마음'과 같은 인생... 그런 '평온한 생활'”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젊은이는 이젠 현시대 대한민국에도 그리 드물지 않죠. 즉, 승진도 영달도 마다하고선 사생활의 기쁨과 안식을 훨씬 우선하는 구성원이 어느 조직에나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중소기업중앙회는 지난 10월 1980년대 초~2000년대 초에 태어난 구직자의 관심도를 조사한 자료를 발표했는데요. 2019년부터 올해 5월까지 3년 5개월에 걸쳐 소셜·온라인 미디어에 나타난 해당 연령대의 중소기업 취업 관련 데이터 26만8329건을 수집해 분석한 결과, 가장 관심이 높았던 이슈는 25.8%에 달한 ‘근무시간’이었다 합니다. 2019년에 시행했던 동일한 조사에선 '자기성장가능성'이 40.5%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죠.
‘트렌드코리아 시리즈’로 유명한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 역시 10월 초에 개최됐던 '트렌드코리아 2023'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옛 시대 직장 문화와 결별하는 '오피스 빅뱅' 현상이 속도를 낼 것으로 내다보며 "직장에서 뼈를 묻고 퇴직 후에는 연금을 받는 직장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고 언급했고요.
이러한 분위기에선 ‘어릴 적 고생을 벌충하는 훗날의 보상’이랄 것이 대단한 매력을 지닐 여지가 없음은 자명합니다. 실제로 사람인이 지난해 1월 직장인 1129명을 대상으로 '인사 평가와 승진에 대한 생각'을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46.8%)가 '승진에 관심 없다'는 답을 했습니다. 직급 상승을 미끼 삼아 구성원이 정열을 불태우도록 유도하는 보상 전략은 과거에 비해 그 위력이 대폭 줄었다는 것이죠. 관심이 없는 가장 큰 이유론 '평생직장 개념이 희미해서'(51.5%·복수 응답)라는 답이 꼽혔듯, 부모 세대와는 달리 몸담은 일터가 바친 충성에 상응할 정도로 삶의 안정을 약속해 주진 못하게 된 것이 그러한 변화의 주요한 원인으로 추정됩니다.
사람인 관계자는 "승진은 한때 (성공의) 절대적인 기준이었으나, 밀레니얼 세대는 충분한 여가와 취미, 일의 성취감, 커리어 성장 등 다양한 가치를 성공 기준으로 둔다”며 “기업들도 인재 확보를 위해 새로운 세대를 어떤 방식과 기준으로 평가할지와 어떤 보상을 제공할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 설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