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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쓴 글'에도 TPO가 있다

TPO에 따라 '명문'이 '똥글'로도 변하는 마법

by 문현웅

'칼의 노래' 저자인 소설가 김훈 선생님, 한국인 치고 이 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드물 테죠. 그분이 기자 출신인 것도 대부분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만. 그분이 기자 시절엔 정말 평가가 나빴다는 것, 그것도 그렇게 된 주요한 원인은 글솜씨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대부분 모르실 겁니다. 물론 국민들로부터의 평가가 아니라 언론계 내부에서의 평가였는데요.


평가가 나빴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기사를 기사같이 안 썼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김훈 선생님께서 현역 시절 실제 작성했던 기사를 보면서 풀어 보도록 하죠.


“구할 수 없는 목숨에 그는 목숨을 걸었다.”


지난 5월 25일 새벽 2시께 전남 여수시 교동 400번지 중앙시장 화재현장에서 2층 점포 내부의 인명을 수색하던 여수소방서 연등파출소 소속 인명구조대원 서형진 소방사가 화염과 유독가스 속에서 퇴로를 찾지 못한 채 쓰러져 숨졌다. 숨진 서형진 소방사는 선착대로 현장에 도착해서 곧바로 3층으로 투입되었다. 서 소방사는 3층 유리창의 방범용 쇠창살을 도끼로 찍어내고 창틀에 매달려 아우성치던 16명을 굴절사다리 바스켓에 묶어서 지상으로 대피시켰다. 서 소방사는 이어 3층 내부(2139㎥, 점포 30여 개 및 볼링장, 당구장, 극장, 기계실)의 인명수색을 마치고 다시 2층 내부로 진입했다. 이때 3층은 연쇄인화 직전의 매연으로 가득 차 있었고, 2층은 극성기의 화염이 살수공격으로 수그러들면서, 열기와 유독가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보증금 1천8백만원 짜리 전세아파트에 26세의 젊은 아내 박미애씨와 지난 2월에 태어난 젖먹이 아들, 그리고 노부모를 남겼다.


지난 5월 20일, 그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월급을 받았다. 그가 숨진 5월 25일, 그의 아내는 남편이 벌어온 월급 중에서 6만원을 손에 쥐고 있었다. 소복을 한 젊은 아내는 돈에 관하여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늘 잠이 모자라서 꾸벅거리던 남편의 고달픔과 그리고 현장 2층의 암흑 속에서 숨이 끊어지기까지 남편이 혼자서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 뜨거움을 되뇌이면서 쓰러져 울었다. 그 여자는 “아, 그 뜨거운 곳에서…” 라며 울었다. 아무도 그 여자의 울음에 개입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 여자를 달랠 수 없었다.


이날 화재는 24일 밤 11시 21분께 여수소방서 상황실에 전화로 신고되었다. `중앙시장'이라는 신고에, 상황실은 발칵 뒤집혔다. 본서 상황실 당직관 유호일 소방경은 현장과 최근거리(1.5㎞)에 있는 연등파출소에 초동출동을 명령했다. 이날 밤 여수시 동북부 지역(구 여수권) 당직 상황실장은 낙포파출소장 이규준 소방위였다.


이규준 소방위는 연등파출소의 차량 6대(지휘차, 구조대, 펌프차, 앰뷸런스, 사다리차, 화학차)와 대원 20여 명을 인솔하고 11시 24분께 현장에 도착했다. 이 병력이 이날 진압 전투의 선착대였다. 선착대가 도착했을 때, 2층 유리창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화염과 연기가 3층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2층 유리창들은 모두 다 방범용 쇠창살에 가로막혀 있었다. 3층 유리창도 대부분이 마찬가지였고, 몇 군데 유리창에는 쇠창살이 없었다.


쇠창살에 갇힌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쇠창살이 없는 창문에서는 매연에 쫓긴 사람들이 곧 뛰어내릴 기세였다. “뛰어내리지 마라, 바람 쪽으로 머리를 낮추고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이규준 소방위는 핸드마이크로 3층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뛰어내릴지 말지는 소방관이 판단할 일이 아니라, 화염 속에 갇힌 사람들이 판단할 일이었다. 선착대는 쇠창살 없는 유리창 밑 인도 위에 매트리스를 깔았다. 4명이 뛰어내렸다. 부상자는 없었다.


이규준 소방위는 구조대원에게 3층 옥내진입을 명령했다. 홍갑석 소방교, 김종수 소방사 그리고 숨진 서형진 소방사가 굴절사다리를 타고 3층 창문으로 접근했다. 바스켓을 창틀에 밀착시키고 도끼로 방범 쇠창살을 부수었다. 굴절사다리는 세 번을 오르내리면서 16명을 지상에 내려놓았다. 부상자는 없었다. 구조대원들은 다시 사다리를 타고 3층 유리창을 통해 3층 옥내로 들어가서 30여 개 점포와 볼링장과 극장을 수색했다. 인명이 없음을 확인한 구조대원들은 3층 옥외계단으로 철수했다.


그때 거리에 모여서 발을 구르던 주민들이 “2층에서 바느질하는 할머니가 못 나온 것 같다”고 고함쳤다. 서형진 소방사는 옥외계단을 따라서 2층으로 내려와 2층의 방화용 철문을 도끼로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형진 소방사는 거기서부터 27m를 전진한 자리에서 죽었고, 2층에 그가 구하려던 할머니는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부재가 확인되지 않는 한, 그는 2층 불길 속에서 할머니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옥외에서 쏘아대는 물줄기가 화점에 닿지 못하자 정오채 서장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중앙통로 돌파를 명령했다. 중앙통로는 방범 쇠창살과 철제 셔터로 막혀져 있었다. 전동장치로 개폐되는 문이었는데, 이미 옥내 전원은 끊어져 있었다. 철제 셔터는 열기를 받아서 뜨거웠다. 대원들은 물을 뿌려 철문을 식혀가면서 도끼와 유압절단기로 철제 셔터 아래쪽에 구멍을 뚫어냈다. 이 작업에 약 12분이 걸렸다.


이 구멍을 통해서 수관 4개가 2층 옥내로 들어왔다. 수관 1개마다 4명씩의 관창수가 붙어있었다. 관창수들은 2층 화점을 공격하면서 1층과 3층으로의 연쇄인화를 차단했다. 새벽 1시 30분께 화재는 진압되었고 서형진 소방사는 동료들의 들것에 실려 지휘관 앞으로 운구됐다. “장비를 벗겨 주어라”라고 정 서장은 말했다. 대원들이 서형진 소방사의 무장을 해제했다. 공기호흡기, 도끼, 망치, 손전등, 안전모, 개인로프를 떼어주고 방열복을 벗겨 주었다. 그는 그렇게 한평생의 멍에를 벗었다.


28일의 영결식에서 그는 소방교로 추서되어 국립묘지로 갔다. 그가 세상에 남긴 젖먹이 아들의 이름은 서정환이다. 그의 장례식 다음날이 정환이의 백일이었다. 화재피해를 입지 않은 1층과 3층은 다음날부터 정상영업을 계속했다.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자동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는 온통 장관부인들의 고급 옷에 관한 것뿐이었다.


우선 언론인이라면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보도할 일인가' 하는 생각부터 들 것입니다. 생명 보호를 위해 헌신하다 사고를 당한 소방관의 순직은 분명 기릴 만한 희생입니다. 다만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마다 지면을 이 정도로 많이 할애할 수도 없는 노릇이며, 그렇다고 이번 건이 다른 소방관 분들의 희생에 비해 이렇게까지 파고들 만한 특이점이 있었느냐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거든요. 현업에선 '길어야 원고지 4~5매로 끝날 기사를 본인 글솜씨 과시를 위해 늘려 써서, 다른 정보가 실릴 수 있던 지면까지 잡아먹었다'는 불평이 나올 만도 했죠.


분량은 그렇다 치더라도, 본론인 글솜씨 문제로 들어가면요. 얼핏 보기엔 소설가 겸 기자의 탁월한 필력이 잘 녹아들어 간 명문 같이 느껴집니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근본적으로는 '소설'이 아닌 '기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평가의 잣대 역시 '소설'이 아닌 '기사' 쪽에 두고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의 아내는 늘 잠이 모자라서 꾸벅거리던 남편의 고달픔과 그리고 현장 2층의 암흑 속에서 숨이 끊어지기까지 남편이 혼자서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 뜨거움을 되뇌이면서 쓰러져 울었다.


이 문장은 상당히 황당한 내용입니다. '취재'가 아닌 '소설적 상상'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우셨나요?"라고 묻는 것도 이상했을 테고, 설령 그렇게 물었다 해도 저런 답을 했다는 것 또한 실제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팩트 취재'에 기반해 기사를 써야 할 기자가 갑자기 소설을 전개한 꼴이니 언론계에선 평을 좋게 내리기가 곤란하죠.


아무도 그 여자의 울음에 개입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 여자를 달랠 수 없었다.


바로 다음에 나오는 이 부분도, 기사 장르를 '르포르타주'(르포)라 치더라도 과할 정도로 개인의 감상이 불쑥 나오는 어색한 대목입니다. '개입하지 않았'고 '달래지 않았'다면 벌어진 현상이지만, '없었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전지적으로 읽은 것이나 다름없는 소설적 묘사일 따름이죠.


이날 밤 여수시 동북부 지역(구 여수권) 당직 상황실장은 낙포파출소장 이규준 소방위였다.


이것 또한 기사로서는 불필요한 대목입니다. 순직하신 분의 행적을 짚는 데에 '당시 상황실장' 관련한 상세 정보는 더미 데이터일 뿐입니다. 언론사에서는 보통 이런 더미를 줄이고 또 줄여서 기사를 하나 더 실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라고 지시할 것입니다.


그 밖에도 세세하게 파고들자면 더 나올 것들도 있겠으나, 대략 굵직한 부분만 보더라도 이렇게나 걸리는 부분이 많습니다. 소설로서는 어떠할지 몰라도 기사로서는 약점이 많은, 김훈 선생님의 기사를 언론계에서 높이 치지 않았던 것도 아주 무리는 아니지 싶습니다. 실제로 김훈 선생님께서 거쳐 갔던 여러 언론사 내에서 좀 강경한 축에 드는 분들은 아예 '그 사람은 기자가 아니다'고까지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더군요.


하지만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언론계에서 김훈 선생님이 ‘글을 못 쓴다’고 간주하는 것일까요? 그건 또 아닙니다. 단적인 사례로, 2012년에 진행된 조선일보 입사 시험에선 칼의 노래 첫 장이 국어 영역 지문으로 나왔었습니다. 글을 못 쓰는 사람의 작품을 다른 시험도 아니고 언론고시에, 그것도 김훈 선생님과는 아예 접점이 없었던 조선일보가 제출할 이유가 달리 있었을까요?


즉, 언론계가 김훈 선배의 '필력'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사를 써야 하는 때에 기사를 기사같이 쓰지 않기 때문에 안티가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분 역시 '글'을 못 써서 언론고시에 떨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기사'를 못 쓴 탓에 고배를 마셨을 확률 또한 무시할 수 없겠습니다. 언론 작법을 써야 할 곳에 문학적 기교를 내밀어 버린, 이른바 '글의 TPO(Time, Place, Occasion)'를 깨 먹은 탓에 번번이 낙마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것이죠. 언론고시에서는 '글'을 쓰기에 앞서 '기사'를 써야 한다. 언론고시뿐 아니라 '논술과 작문'이 필요한 시험에서는 섣불리 '소설'을 쓰려 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암만 탁월한 소설가라 해도 예외는 없습니다. 반드시 유념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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