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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lip Feb 12. 2021

열정도 냉정도 아닌 감정 사이

B에 대한 소고 (1) 

 지금 이 글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일어난 일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다.


 오늘 내 앞에 있는 이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이였다. 호감과 반감이 뒤섞인 감정에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점점 드세지고 말이 빨라지며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화법으로 사람들을 뒤흔들었다. 청자로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나름의 논리로 앞뒤가 연약히 연결된 이야기들을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행간에서 특별한 맥락을 찾을 필요도 없다. 시작부터 이미 염세적 결론을 짐작케 하는, 어조까지도 철저히 죽음을 연상케 하는 독백으로 그녀 주위의 공기는 하염없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예쁜 얼굴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다그쳤을 텐데, 그럴 수 없었다. 본인이 반복하는 염세주의의 의미를 명확히 아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염세주의의 발원이 어떠하였는지, 쇼펜하우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가늠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이 관계는 매우 Passive (수동적)하다. 그녀가 염세주의 다음으로 많이 반복한 그 단어처럼.


 그녀가 보는 앞에서 귀마개로 귀를 막아버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상상을 잠시 하였다. 그러나 옅은 미소를 짓고는 이내 감정을 감추기로 마음먹었다. 둘만의 채널로 소통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난 지금 그리 동기부여가 되어있지 않다. 정확히는 오늘따라 기다렸다는 듯 끊임없이 씁쓸한 웅변을 이어나가는 저 사람을 그냥 가만히 두어보고 싶었다. 그녀가 적이 나마 긍정을 되찾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모순을 찾아낸다. 지적한다. 다른 형용을 허락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모순을 지적한다. 서로 말꼬리를 잡다 보면 이내 대화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수준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냥 지금 옅은 미소를 머금고 패배자의 언어로 Yes를 반복하는 편이 서로를 위한 최선 이리라, 얼마 전 느꼈던 감정의 말로를 되새김질해본다. 그리고 다시금 느낀다. 아니, 이건 분명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 이리라.


 애정이라곤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언어들로 인하여 나는 오늘도 자아의 소실을 경험한다. 꼭 자판기 마냥 대답을 뱉어내다 내가 당신이 스스로 칭하는 그 이상으로 염세적인 심장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할 뻔하였다. 위기다.  잠시, 상상한다. 이내 딱딱했던 뇌하수체가 부들부들 해지며 순식간에 의미 없는 말들을 여럿 쏟아 낸다. 그러다 그렇게 결론 없는 대화의 막을 내린다. 다행인 걸까. 오늘도 힘겹게 이 죽일 놈의 관계에 내 한쪽 발끝을 걸친 체 대화를 매조지었구나.


 지금 이 글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일어난 일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다. 나는 언제까지고 이 글을 고쳐 쓰고 있을지 모른다.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어 점을 하나 찍어 보았다. 내가 바로 저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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