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이상현상이란
(*) 본 리뷰에는 영화 '8번 출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유튜브로 공포 게임 영상을 자주 보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쉽게 접할 수 있는 게임이 바로 '이상현상 게임'이다.
게임의 규칙은 아주 간단하다. 플레이어는 목적지를 향해 가기만 하면 되는데, 이상현상이 보이면 뒤로 가거나 (게임에 따라 방식은 변경된다) 이상현상이 없으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무사히 통과했으면 다음 스테이지로 갈 수 있고, 또 똑같은 방식으로 통과하다 보면 어느새 엔딩이 나온다. 단순하게 이상현상 여부만 판단하면 되는 게임도 있고, 스토리를 따라가야 하는 게임도 있다. 한정된 공간을 무대로 만들기 때문에 쉽게 만들 수 있어서인지 무수히 많은 '이상현상 게임'이 등장했다.
이런 게임의 원조격인 게임이 바로 '8번 출구'다. 원조답게 아주 심플한 구조인 게임이다. 이상현상이 보이면 뒤로 가고, 이상현상이 없으면 앞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0번 출구에서 시작해서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8번 출구에 다다르게 되고 엔딩도 볼 수 있다. 군더더기 없고 적당히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이상현상, 꽤 알아차리기 힘든 현상으로 인해 클리어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 적당한 난이도까지. 게임으로서의 완성도는 아주 뛰어나다.
그런데 이 '8번 출구'가 영화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의아했다.
영화로 옮기기에는 단순 반복적인 구조인 게임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게임 원작의 영화가 성공하는 것은 보기 드문 편이다. 게임마다 다르지만 게임의 방대한 스토리를 2시간 남짓한 영화로 옮기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원작 팬의 니즈를 충족시키기도 어렵고, 게임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쉽게 세계관에 몰입하게 하는 것도 어렵다. 단순히 팬서비스 차원의 영화로 안이하게 만들어 처참히 망하는 영화도 봤고, 너무 영화적인 요소에 집착하다 보니 원작을 파괴해서 비판을 받은 작품도 한 두 개가 아니다.
물론 성공한 게임 영화도 있다. 드물 뿐이지.
게임 '8번 출구'의 설정은 영상으로 옮기기에는 너무나도 한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개봉한 영화의 평점을 보니 꽤나 괜찮았다. 무엇보다 칸영화제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대체 이런 소재를 어떻게 만들었기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거지?
실사화 소식이 들었을 때는 볼 생각이 없던 이 영화를 본 이유는 평가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시작은 1인칭에서 출발한다. 좋은 선택이었다. 원작 역시 1인칭을 진행된다. 오프닝에서의 장면, 지하철 역사를 걸어가는 장면, 여주인공의 연락을 받는 장면, 그리고 마침내 8번 출구에 이르기까지. 오프닝 시퀀스는 1인칭으로 계속되며 관객들의 몰입을 돕는다. 마치 직접 8번 출구를 헤매는 느낌이 들게 한다.
하지만 1인칭 시점은 계속되지 않는다. 이제 시점은 3인칭으로 바뀌어 8번 출구를 헤매는 주인공의 표정과 심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일반적인 영화의 시점으로 바뀌는 것인데 장면 전환도 매끄럽고 좋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1인칭 시점이 계속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3인칭으로 바뀐 덕분에 주인공이 놓친 단서를 관객들이 발견할 수 있지만 게임의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로 관객이 위치하기 때문에 영화의 집중도 측면에서는 아쉬운 선택이었다. 물론 이건 개인의 취향일 수도 있다.
원작에는 마스코트(?) 같은 존재가 있다. 매번 같은 루트로 천천히 걸어오는 아저씨다. 단조로울 수 있는 원작에 생기를 넣어주는 역할인데 무표정하면서도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의 아저씨는 게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또한 아저씨 자체가 이상현상의 대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아저씨의 묘한 움직임과 표정을 유의 깊게 관찰해야 했다.
영화에서는 원작과 싱크로율이 100% 일치하는 배우를 캐스팅했다. 코우치 야마토라는 배우가 연기한 아저씨는 단순히 영화의 오브젝트로만 머물지는 않는다. 영화의 특정 시점에서는 이 아저씨가 사실 주인공과 똑같이 8번 출구를 헤매는 남자였다는 설정이 공개된다. 영화에만 있는 설정이다. 비교적 침착하게 8번 출구를 찾아가는 주인공과는 다르게 남자는 호들갑을 떨며 8번 출구를 찾는다. 영화 내에서 거의 치트키에 가까운 소년이 정답을 뻔히 알려줘도 남자는 자신의 판단만을 믿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남자의 시점은 아주 짧은 시간만 보여주지만 배우의 연기 덕분에 극의 새로운 재미를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주인공에게는 사연이 생겼다. 헤어지기로 한 연인에게서 임신 소식을 듣고 혼란스러워하는 남자. 자신의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주인공은 8번 출구라는 미로에 갇히고 만다.
이상현상들에게도 스토리가 생겼다. 이곳에서 보게 되는 상당수의 이상현상의 주인공의 상황과 맞닿아있다. 아기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연인의 전화를 받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주하게 되는 한 소년은 주인공의 서사에 새로운 전환점이 된다.
영화 '8번 출구'는 공포 영화라고 하기엔 공포감은 거의 없는 편이다. 징그러운 이상현상과 점프스케어가 살짝 있지만 대단한 수준은 아니다. 애초에 원작 자체가 엄청난 호러물은 아니었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이상현상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관객들은 적당한 서스펜스를 즐기게 된다. 주인공과 같이 사물에 집중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관객이 발견한 현상을 주인공이 발견하지 못하면 답답함도 느낄 수 있다.
영화의 한계 때문에 이상현상은 예측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너무 디테일하게 바꿔버리면 영상 내에 잡히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오브젝트에 비해서 이상현상이 많이 나오는 편은 아니다. 이를테면 라커룸 옆에 있는 담요 같은 것들은 영화 내내 긴장감만 주고 실제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맥거핀이다.
만약 러닝 타임이 길었으면 그만큼 이상현상을 더 넣었겠지만 영화의 러닝 타임은 95분으로 굉장히 짧은 편이다. 아마 너무 많은 이상현상을 넣었으면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 이 정도가 적당했다고 본다.
이 영화에서 맨 처음 나오는 오프닝은 중요한 역하을 한다. 오프닝에서의 장면은 만원 지하철에서 우는 아기와 아기 엄마에게 화를 내는 진상 아저씨의 모습을 외면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주인공 역시 그 모습을 봤지만 에어팟을 끼고 아저씨를 말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8번 출구 중 발견한 이상 현상으로 아기 엄마에게 소리치는 아저씨를 외면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목격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고 이제 엔딩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던 타이밍에 주인공은 오프닝에서의 장면을 다시 마주한다. 마치 무한히 반복되는 8번 출구와 같이.
단순하게 생각하면 주인공이 아직 진짜 출구를 못 찾아서 영화의 전체 시퀀스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인공은 엔딩에서 오프닝과 다른 선택을 한다. 주인공이 아저씨에게 다가가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장면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은 이렇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이상현상 (아저씨의 진상짓처럼)을 목격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것을 외면하고 우리는 다시 길을 걸어간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도와주겠지", "괜히 끼어들면 쓸데없는 일이 생길지 몰라", "나는 관심 없어" 등등.
하지만 진정한 답은 이상현상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그 현상을 바로 잡으려 하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또다시 같은 현상이 반복된 이유는 오프닝에서 아저씨의 진상짓을 막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상현상 게임'에서는 이상현상이 나타나면 이상현상임을 인지하고 뒤로 돌아가 이상현상을 없애야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현실도 이상현상을 인지하고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이상현상’이란 결국 현대 사회의 병리,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을 상징하고, 주인공이 이를 바로잡으려는 시도야말로 인간성 회복의 출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확대해석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 자체만 보면 OTT로 봐도 문제가 없지만 극이 주는 서스펜스를 즐기려면 큰 화면,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이만하면 영화를 영상화하는데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최고는 아니지만, 만족한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