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엄마를 만났다
런던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는 부쩍 고단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런던은 도시가 큰 탓에 어딜 가던 버스를 타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미술관도 참 많이 다녔기 때문. 그래서인지 엄마는 호텔에서 쉬고 싶다는 말을 종종 흘린다.
"엄마 런던 근교에 라벤더 농장이 있대"
온통 보랏빛으로 물든 사진과 함께 라벤더 농장에 대해 이야기하며 엄마의 흥미를 끌어봤다.
"와, 정말 런던에 이런 곳이 있대?"
역시나 엄마는 런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우리가 지내온 런던과 판이한 사진 속의 그 보랏빛 라벤더 농장은 엄마에게 다시금 런던 여행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다음날 아침, 라벤더 농장에 간다 하니 엄마는 캐리어에 꾸욱 눌러 담아 챙겨 온 분홍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어느 하나 다른 색이 들어가지 않은 분홍 원피스. 20대 초반의 딸도 쉬이 입지 못해 가지고도 있지 않은 그런 색의 원피스를 입는 우리 엄마.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 기차와 버스를 타면 메이필드 라벤더 팜에 도착할 수 있다. 자동차가 있었으면 참 편했을 텐데, 자동차 없이 라벤더 농장으로 가는 길은 꽤 고단했다. 엄마는 기차에서, 버스에서 멀리 창 밖을 보는가 하면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부쩍 조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실 이동 중에 꾸벅꾸벅 조는 엄마를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전자의 경우에는 이동 중 엄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엄마가 정말 나이 들어버린 것 같아서였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생각하면 꾸벅꾸벅 졸던 모습이 생각난다. 누워서 주무시라고, 왜 앉아서 꾸벅꾸벅 조냐고 여쭈면 '늙어서 그래'라고 웃으며 말씀하시던 할머니.
늙으면 꾸벅꾸벅 조는구나. 그 생각에 엄마가 조는 모습을 볼 때면 자꾸 속이 상한다. 우리 엄마, 정말 늙은 건가 싶어서.
그런데 또 분홍 원피스를 입고 라벤더 사이에서 이리 돌고, 저리 돌며 보랏빛 사이를 누비는 엄마를 보니 새삼 엄마도 여자이구나 싶다. 아니 이 날의 모습만큼은 정말 소녀 같더라.
분홍색 원피스가 딸보다도 잘 어울리는 우리 엄마가 이렇게나 소녀 같으니, 딸은 엄마의 지나버린 세월을 제대로 인지 할리 만무하다. 라벤더 농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꾸벅꾸벅 조는 모습에 '우리 엄마 많이 늙었나' 싶다가도 저렇게 해맑은 소녀 같으니.
6월에서 9월 사이에 런던을 여행한다면 두 시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 보랏빛 런던을 만끽해보는 것도 좋다. 친구와 간다면 소풍 가는 마음으로, 엄마와 간다면 엄마의 어린 시절을 엿보는 마음으로.
나 역시 온통 보랏빛인 라벤더 속에서 소녀로 돌아간 엄마를 만났다. 그리고 언제 또 볼 지 모르는 엄마의 소녀 같은 모습을 담았다.
30년 전의 엄마를 만나 함께 꽃놀이를 했던 날. 나의 이 해맑은 모습이 엄마를 쏙 빼닮았구나 싶어서 행복했던 날.
또 보고 싶다, 소녀같이 해맑던 우리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