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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박하며화려한 Mar 15. 2020

어쩌다 나는 간호사가 됐을까

간호 생활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의 나는 다들 그렇듯이 점수에 맞추어 학과를 지원하기에 바빴다.

 생각해온 진로가 딱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취업과 연계되는 학과로 인생설계를 할 만큼 현실적인 성격이 못되지만 하고 싶은 일은 있었다. 언젠가 백일장을 통해서 들렀던 대학교에서 인솔해주던 문예창작과 학생이 진로가 딱히 없다고 졸업한 선배들도 이것저것 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었지만 나는 글을 쓰는 그 학과가 그렇게도 가고 싶었다. 졸업 후 취직은 열아홉 살의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다음다음의 일이었다.

 진로를 정하는 것은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엄마는 졸업 후 내가 빠르게 취직할 수 있는 직업을 들이밀기에 바빴는데 그것은 바로 '간호사'였다. 결혼을 하고도 계속 다닐 수 있고 아이를 낳은 후에 복직하기도 좋다는 게 엄마가 최고의 직업으로 꼽는 이유였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임신을 하고 입덧을 하면서 새벽마다 맡는 항생제 냄새에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고 밥을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병동을 뛰어다녀야 했다. 한 번은 밤 근무 중에 화가 머리 끝까지 뻗친 보호자가 소리를 지르며 나를 밀치려고 손을 들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출산 전에 다니던 병원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아이를 낳은 후 다른 곳에 취직을 하게 될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기를 낳는 것은 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뒤바뀌는 일이었다. 갓난아기는 엄마의 품이 필요했고 일하는 친정엄마, 연세가 많으신 시어머니 그 어느 곳에도 아이를 맡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우고 싶었다. 두 해에 걸쳐서 연년생의 아이를 낳고 6년의 터울을 두고 막내를 낳고 키우다 보니 십 년이 넘는 세월은 훌쩍 흘러갔다. 다둥이 엄마로서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보니 나에게 남은 건 경력이 단절된 유휴간호사라는 딱지였다. 아이들을 두고 병원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3교대라는 병동 생활은 오버타임의 연속이고 근무 중에 연락도 되지 않을 것이며 집에 오면 지친 몸으로 아이들을 돌볼 힘이 없을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하고서도 유지할 수 있는 직장이라는 친정엄마의 조언은 틀렸다.

 그랬던 내가 올해 별안간 취업을 선언했다. 유휴간호사 복귀 프로그램을 수강한 것도 아니고 단기 알바라도 해본 것도 아닌데. 겁도 없이 나는 원서를 여기저기 보내기에 바빴고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보건소 알바부터 건강검진센터, 요양병원 등등 여러 가지 면접을 보다가 결국 나는 다시 병동 3교대를 택했다. 간호사 생활은 유지하기는 힘들었지만 관두기도 쉬운만큼 다시 돌아가기도 쉬웠다.

 처음 병원을 취직했던 신규 시절에는 사실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3년간 공부를 하고 이곳저곳에서 실습을 하고 국가고시를 패스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내가 있어야 할 병원에 들어서자 간호사로서 익숙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타고 타고 또 태워지다가 재가 되는 신규였다. 그리고 근무시간마다 사건이 하나씩 발생하거나 환자가 많아지는 일명 '환타'(환자를 탄다고 해서)였다. 하지만 그때는 두려움이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나에게는 두려움이란 것이 생겼다.

 일주일간의 교육을 받으면서 머리가 어지럽도록 밀려오는 불안감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환자들이 내 손을 거칠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잊어버린 것들은 다시 기억해내려 애썼고 모르는 것들은 새로 외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막상 병원 업무를 시작하면서 잘할 수 있을지, 예전처럼 자신 있게 다가갈 수 있을지 여러 가지의 걱정들이 밀려왔다. 유휴간호사라는 자격지심은 모르는 의학용어가 등장하거나 의학 약어들을 못 알아들을 때마다 쿵쿵 마음을 짓눌렀다.

 어쩌다 나는 간호사가 되었을까. 차라리 다른 것을 배웠더라면. 다른 일을 했더라면. 위험하지도 않고 체력적으로 힘들지도 않으며 새벽같이 출근하거나 밤을 새워야 하는 일도 없는 일을 했더라면. 경험해보지 못하고 나에게 조언을 한 엄마가 원망스러웠고 취업 하나만 보고 생각 없이 선택한 자신을 책망했다. 왜 다시 병원에 지원한 거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마음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짧은 1년간의 생활이었지만 간호사 생활은 힘든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나에게 감동을 주는 순간들이 있었고 내가 환자에게 미안했던 기억들이 있었다. 안 되는 영어로 손짓 발짓해가며 외국인 부부에게 치료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던 일. 그리고 고맙다고 받았던 눅진눅진한 가나초콜릿 한 상자. 암 말기로 접어드는 할아버지가 화가 많아졌을 때 그걸 받아주지 못하고 같이 화를 냈던 일. 병동을 거쳐서 중환자실로 간 환자들이 임종을 맞이한 후에 꿈에 나와 인사하던 마지막 표정들. 어쩌면 돈을 버는 목적 외에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먹게 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묵혀두었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고 나서 내가 왜 하필이면 간호사가 되었을까에서 나는 왜 간호사가 되었나로 질문을 바꿔하기로 마음먹었다. 현실은 이상을 잡아먹을 만큼 몸과 마음을 힘들게 만들지라도 걸어가는 삶의 방향에는 분명 모르고 있는 중요한 과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인생은 가보면서 깨닫는 것이고 흘러가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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