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착한 며느리가 아니다.
여느 며느리들처럼 '시'자 앞에서 멈칫하는 보통의 며느리이고, 성격도 나긋나긋, 수더분, 털털 과는 거리가 멀다. 어찌 보면 소심하고 여려서 예민한 부분이 많은 사람이고 작은 것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라 다루기 쉬운 며느리는 아니다. 다만 반항심이 있다거나 어른 앞에서 떳떳이 내 의견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는 타입이라 나름 순종적이고 착한 며느리로 비추어졌을 수도 있겠다.
글을 쓰는 지금은 3일간의 장례를 치르고 하루가 지난 시점이다. 아직 '죽음'이라는 단어를 어머니와 연결시켰을 때 아무렇지 않을 만큼 눈물샘이 마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찌르면 불쑥 나올 정도의 슬픔은 아닌 것 같아 가장 기억이 따끈따끈 남아있을 때 기록을 해두려고 한다.
또래보다 일찍 시집온 며느리에게 어머니는 할머니 같은 존재였다. 남편과의 나이차이로 인한 세월의 간극이 커서 어머니는 나를, 나는 어머니를 얼마큼 이해하며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서로를 알아가려 노력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캠핑의 유행이 시작하던 시절 주무시고 가실 것도 아니면서 캠핑을 따라오신다던가 한 번씩 시간 날 때마다 점심이라도 밖에서 같이 먹으려 매주 주말마다 보는 며느리를 한 번씩 불러내시기도 했다. 나 또한 어머님의 행동들이 이해가 안 될 때마다 옹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굳이 함께하려고 했던 순간들을 시간 많은 노인의 심심함을 달래려는 수단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건 함께하며 시간을 채워가려는 애정이었다. 귀찮았던 순간들이 없었다면 어머님이 세상을 떠난 후 지금의 허전함 같은 것은 없었을 수도 있겠다.
신혼시절 어머님댁 옆집에 살았다. 아기띠를 메고 아기를 키우던 시절에 어머님 호출에 시댁에 불려 가기도 많이 갔고 구역예배를 드리실 때면 나는 그 교회 사람도 아니지만 같이 하기도 하였다. 어머님 친척이라도 방문하면 출동해야 하는 것은 당연했고 외출하시고 귀가하시는 길에 집에 한 번씩 들르시는 건 예사였다. 주말마다 아들손주 보고 싶어 하시는 아버님 때문에 식사도 같이하고 얼굴도 보지만 가끔 평일에 어머님과 외식하며 데이트를 하는 적도 있었고 영화를 함께 보기도 했다. 우리가 먼 곳으로 이사를 온 후에도 주말마다 보는 횟수는 줄지 않았고 철마다 한 번씩 옷을 사주시기 위해 함께 쇼핑을 하기도 했다.
어머님은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친정집 식구들은 취미도 없고 인간관계의 즐거움도 모르는 편이라면 시댁은 그렇지 않았다. 은퇴한 아버님을 밖으로 불러내 자전거 모임의 회장을 만들어 준 건 어머님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전국 명소를 누볐고 어찌 보면 젊은 시어머니인가 싶지만 손주를 대할 때는 영 아니었다. 첫째가 아기였던 시절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서 기저귀도 없이 외출하시기도 했고 분유를 먹는 아기를 데리고 어떤 준비물품도 없이 친구들을 만나시기도 했었으니까. 아들을 둘씩이나 키우셨는데 대체 왜 그러시는지 화가 나기도 했지만 첫째가 고등학생이 된 지금은 피식 웃음 나는 기억이다.
8년 전, 어지러워서 살 수가 없다고 제사를 지내다 짜증을 내던 어머니에게 병이 찾아왔다. 대학병원부터 동네병원까지 다 가보았지만 검사 상 밝혀지는 병명은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 방문한 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파킨슨 증후군'. 파킨슨과는 다른 병으로 떨림은 없지만 서서히 마비가 진행되는 병이었다. 병명을 알게 된 후 어머님은 살아서 무엇하나 싶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고 아버님은 어떻게든 고칠 수 있는 방도가 있지 않겠냐며 대학병원부터 한방병원까지 방법을 찾기 위해 애쓰셨다. 질병은 점점 번져가다 결국 누워만 있다가 끝나는 병이란 것을 알게 되신 후 우울함은 어머님을 집어삼켰고 아버님은 반주를 하시다 울다 지쳐 주무시는 하루하루가 계속되었다. 어떤 위로도 현실을 바꾸기 전까지는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신나게 내려가던 어머님은 이제는 길을 걸어갈 때도 한쪽으로 치우치는 걸음을 걷게 되었다. 앞을 보고 가도 옆사람을 치고 가서 지나가던 행인들 중 이유를 모른 채 흘겨보는 아줌마도 있었다. 걸음이 가능할 때 생을 스스로 마감하기 위해 난간을 붙잡고 땀을 흘리며 아파트 옥상까지 올라갔다 발견된 적도 있었고 출판하지 못한 나의 짧은 소설에 그 이야기를 기록하기도 했다. 혼자 보행이 가능하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부축이 필요해지기 시작했고 그것도 얼마가지 않아 양쪽에서 같이 부축을 해야 하였고 그도 오래가지 않아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노인인 아버님이 환자를 돌보는 것은 쉽지 않은 생활이어서 어머님은 요양병원에 입원했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와 지내다가 다시 요양원으로 가게 되는 과정을 겪었다. 집에서 아버님과 둘이 지내던 시절을 잊지 못해 요양원에 간 후로 한동안은 원망 속에 지내셨다. 발음은 점점 어눌해지다 목소리를 내는 것도 후에는 힘들어져 알아듣기 힘든 말로 아버님한테 복수하겠다는 의지를 다지시기도 했고 둘째 아들에게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전의를 다지다가도 남편을 보면 나를 다시 데려가라며 애처롭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아버님이 수술을 받느라 우리 집에 잠시 와계시던 때에는 자꾸 기어서 현관까지 나가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시기도 해서 눈을 떼기가 어렵게 만들기도 헀었다. 집에 보내주지 않는 우리에게 "너네도 이 병에 걸려봐!"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버럭 화를 냈던 기억은 어머님을 떠나보낸 후에도 후회로 남아 마음을 콕콕 찔러댔다.
한 달 전 꿈을 꾸었다. 어머님의 병이 덜 진전되었던 시절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들어오셨다. 손님들에게 대접할 밥을 준비하고 있던 나에게 니 밥은 내가 떠주마 하며 고봉밥으로 떠서 주셨다. 걱정이 되어 주말에 어머님을 뵈러 요양원을 갔던 게 마지막 면회였다. 아들 농담에 웃음을 보이던 어머니는 두 주 후 거짓말같이 상태가 더 안 좋아졌고 숨을 몰아쉬는 상황이 되었다. 마지막을 준비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은 다음날 오전. 어머니는 힘들었던 8년간의 시간을 정리하고 아프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셨다.
시댁의 상을 당한 사람들을 보며 진심 어린 위로를 해준 적이 없었다. 시부모님의 상을 당하는 것은 애통하겠지만 부모보다는 덜하겠지 싶은 생각도 있었고 결혼을 통해 이어진 관계인데 그렇게까지 슬플까 싶은 추측 때문이었다. 말은 조의를 표하지만 마음은 공감하지 못했던 상황이 나에게 닥치자 그것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던지. 시어머니의 죽음은 슬픔을 동반한 미묘한 감정이 되어 며칠간 내 마음을 맴돌았다. 장례를 지내던 3일 내내 눈물을 보이던 나에게 사람들은 '정이 많은 착한 며느리'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슬픔은 단지 착함을 통해 빚어내는 감정은 아니었다. 시어머니의 죽음이 슬픈 이유는 딸 같은 며느리여서도, 가까운 사이여서도 아닌 곁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엿본 시간들이 쌓여 만든 공감이었다. 나는 진정으로 병마에 묶여 누워 지내던 어머니가 안타까웠고 코로나로 인해 두어 번 밖에 허락되지 않았던 외출이 두고두고 생각났다. 휠체어를 타고 나왔던 어머니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하늘을 두고두고 눈에 담아두었다. 코로나가 종식되어 가는 올해 봄, 꽃이 피면 다시 외출이 가능하겠다던 계획은 이룰 수 없었다.
남들의 이야기에 내편을 들어주던 어머니. 가지고 있는 금붙이란 금붙이는 다 긁어서 정신이 온전할 때 둘째 며느리에게 주고 싶어 했던 어머니. 가족 간의 문제로 마음이 상해있을 때 그런 마음을 알아주던 어머니. 앙상하게 마른 몸을 어루만지는 것도 마지막이었지만 살면서 남편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또는 내가 기쁜 일이 있을 때, 아이들에게 축하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기억 속 어머님을 자주 꺼내볼 것 같다. 그리고 기억이 흐릿해질 때면 지금의 이 글을 가끔 꺼내볼 것이다. 나도 나이를 먹어가고 점점 늙어갈 때쯤 어머님의 인생과 교차점에 설 때가 오겠지. 그때 또 한 번 추억하며 글을 쓰는 시간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