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들이 아직 잠들어있는 오전 시간에 눈을 떴다. 전업주부이지만 주말은 나에게도 점심때나 되어서야 일어나는 게으름을 부리는 날이지만 요즘의 나는 다르다. 주말에도 즐거운 일을 벌이기 위함이었다.
줄곧 병원에 몸담아온 대학 동기가 나에게 조언을 했다. 어젯밤 길고도 즐거웠던 대화의 끝은 곧 2월부터 입사할 예정인 나의 앞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입사 전의 시간을 충분히 즐기라는 것. 어떻게 보내는 것이 후회가 없을까 생각하다 내린 결정은 독립서점 방문 프로젝트를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의 책 '매일의 메일'은 서울 몇 군데와 지방 두 군데, 제주도 두 군데에 입점해있다. 입점되어있는 서점들을 모두 돌아보자고 시작한 일이 어떻게 완성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제일 처음 입점되었던 곳을 가보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처음 해방촌에 다녀왔다.
남산타워가 보이고 오르막에 오르막길로 되어있는 곳. 복잡한 전선이 노후된 건물 밖으로 몇 겹을 이루어 늘어져있는 사이로 빛이 스며들면 길가를 헤매는 흔적이 고스란히 털에 배어 꼬질꼬질한 길고양이들이 몇 줌의 볕을 쬐이는 곳. 언덕을 따라 빼곡한 계단들 사이로 오르막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골목을 따라 유유히 걷다 보면 너무나도 쉽게 막다른 곳을 만나게 되는 조용한 마을. 시장을 품고 있지만 적막과는 다른 잔잔함을 지니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가장 먼저 입고를 받아준 서점 '스토리지 북 앤 필름'이 있다. 사실 우리의 책은 초판 서점에 있었는데 주말에는 닫는다 하여 방문하지는 못했다. 어느 독립서점이든 비슷한 오래된 철제문을 열고 들어서니 조용한 내부에 인도의 향기가 맴돈다. 입구에 여러 가지 향을 전시해놓아서일까. 서점 사장님이 계시는 자리에도 비밀스러운 주황색 장막이 드리워져있다. 나는 마치 인도에 있는 작은 서점으로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독립출판물 작가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방문한 서점의 사장님들이 반겨주시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출판 초심자로서 '작가님'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었는지는 몰라도 수원에서 서울까지 먼 길을 감행할 때에는 그래도 몇 마디 나누고 오고픈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서점 사장님들의 상황은 그렇지가 않은가 보다. 많은 사람들을 매일 상대해야 하는 그분들은 불규칙적인 타인들의 캐릭터를 감내해야 하고 그런 부분들이 각자 자신들만의 규칙을 만들어내게 했다. 이를테면 오늘 이곳에 와서 눈에 들어온 주황색 장막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인도에 온 기분으로 연꽃무늬의 반지와 원석이 박힌 반지를 골랐다. 부를 가져다줄 것 같은 코끼리가 장식된 향을 꽂을 수 있는 접시도. 계산을 하고 명함을 드리며 잠시 장막 밑으로 사장님의 얼굴을 뵀을 때는 기분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사장님의 귀가 석가모니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가게를 나와 여러 군데의 서점을 더 돌아본 후 다시 스토리지를 방문했을 때는 사람들이 제법 북적이고 있었다. 텅텅 빈 서점들을 보며 매출을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해방촌 곳곳을 도는 동안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책이 있어 아무래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스토리지로 돌아왔다. 두 번째 계산을 했을 때는 장막 안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아 사장님은 내가 누군지 모른 채 쿠폰을 드릴까나 질문을 하셨다. 나는 전혀 처음 들린 타인처럼 두 번째 계산을 하고 서점을 나섰다.
가방 속에 한 움큼 넣어간 생강 젤리를 거의 다 까먹으며 걷다 보니 숙대 앞 역까지 와있었다. 주말의 기차는 붐벼서 입석밖에 없지만 서서 다녀와야 할 것을 알면서도 나오게 되는 이유는 '주말'이라는 단어가 주는 홀가분함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서점 방문기를 집에 가서 어떤 방식으로 정리해야 할까 생각은 깊어지지만 어떤 의미에서든 자유를 누리다 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휴식이 많은 막내의 생활계획표처럼.
·스토리지 북 앤 필름에서 구매한 것
-인도풍 반지와 향꽂이.
-작가가 11년 동안이나 채집했다는 데에서 내용의 신뢰가 물씬 느껴지는 괴물 백과사전. 이 책이 해방촌을 돌고도는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결국 구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