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아 좋은 <우리의 20세기>
*이 리뷰는 영화의 원제 <20th Century Women>가 아닌 <우리의 20세기>에 초점을 맞추고 쓰였습니다. 따라서 페미니즘에 대한 감독의 시각이 베재되어있습니다.
끝까지 보고 나면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기 어려운 영화가 있다. 무언가 확고하게 말하는 듯하면서도 알쏭달쏭하고, 연이은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중심 사건이 없어 감정선이 모호한 영화다. 이런 영화는 뚜렷한 주인공이 없거나 오히려 주인공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좋은 영화임에 분명함에도, 이런 영화를 만나면 좋다는 말을 하기가 좀처럼 어려워진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미 각본상 부문에 오른 적이 있는 마이크 밀스의 <우리의 20세기>가 바로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각본은 전개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인물 간의 갈등과 사건에 대하여 정의 내리지 않거나 정의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어쩌면 <우리의 20세기>는 바로 그 정의할 수 없음이 묘미이자 목적인지도 모른다. 좋은 인상을 받고 상영관을 나온 관객은 대단히 안타까운 심정이다. 이것 참. 좋은데 누구한테 말할 방법이 없다.
<우리의 20세기>는 1999년 7월 지구 종말론에 기인한 인간의 기록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중 인물로 놓고 보자면 이 기록물의 주인은 도로시(아네트 베닝)다. (참고로 이 영화에서 미래는 도로시의 1999년을 제외하고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제이미와 줄리, 에비와 윌리엄은 구체적인 연도 대신 추상적인 표현으로 미래를 언급할 뿐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가장 먼 미래는 1999년이다.) 물론 그녀는 가슴과 두뇌로 전이된 폐암 말기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지구는 종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역경을 이겨낸 줄리(엘르 페닝)와 에비(그레타 거윅)의 성장드라마 혹은, 미래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윌리엄(빌리 크루덥)의 고해성사 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들에게 할머니에 대하여 묘사하는 데 실패한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먼)의 기억일 수도 있겠다. 어느 것이든 일리가 있지만 그 무엇도 <우리의 20세기>를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렇듯 영화는 간결한 문장으로 정의 내려지기를 거부한다. 정의 내려진들 그 문장에 의한 영화는 시시할 뿐이다.
<우리의 20세기>에서 혈육은 제이미와 도로시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영화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삐걱댄다. 쇼핑센터 주차장에서 폭발한 자동차에 대하여 도로시는 아름다웠다고 말하지만, 제이미는 가스냄새도 나고 발열도 심한 오래된 차였다고 이야기하며 그녀와 대립한다.
이후 영화는 계속해서 엇나가는 제이미와 도로시의 관계에 주목한다. 마흔에 제이미를 낳고 이제는 변화가 두려운 나이가 된 도로시는 어른이 되어가는 제이미의 모습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머니 세대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제이미는 바로 그 생각 때문에 도로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들의 행복을 빌며 에비와 줄리의 도움을 청한 것을 제이미는 엄마가 자기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떠나려 하는 걸로 오해한다. 폐암에 걸릴 걸 알면서 주야장천 담배를 피워대는 것 역시 제이미는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인다. 관대해지려는 도로시의 노력은 제이미에게 줄곧 무관심으로만 받아들여진다. 서로를 너무나 사랑함에도 제이미와 도로시는 서툰 표현들 앞에 서로를 자꾸만 오해한다.
이렇듯 서툴고 미숙한 것은 제이미와 도로시의 관계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20세기>의 인물들은 일대일의 방식으로 서로를 결코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사랑의 행위를 잘못 배운 줄리는 성에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한 제이미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좋아하는 마음과 달리 상처받은 몸은 사랑하기를 거부한다. 도로시는 자유로운 마인드가 제이미에게 도움이 될 거란 처음의 생각과는 반대로 에비의 펑크 뮤직과 페미니즘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거기에 흥미를 느끼는 제이미의 모습이 도로시로서는 더더욱 낯설 뿐이다. 윌리엄은 에비와의 육체적인 관계도 도로시와의 정신적인 관계도 만족하지 못한다. 그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에비도 도로시도 마찬가지다.
인물들은 줄곧 완벽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숨기는 것을 잘한다고 생각하던 줄리는 사실 모든 것을 들키고 있었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산타바바라에서 에비는 적응하지 못하고 홀로 도망쳤다. 제이미는 어렸고 윌리엄은 미숙했으며 끝까지 너그럽고 세련된 중년 여성으로 남을 줄 알았던 도로시는 펑크 뮤직에 맞춰 춤을 추지 못했다. 서로를 충족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독립된 개체로서도 불완전한 인물들. 이쯤 되면 <우리의 20세기>는 인간에 대한 세기말적 비관론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서라도 이들은 완벽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도로시는 자신의 완벽한 생일파티를 위하여 케익을 직접 준비하고 자리로 돌아가 제이미가 들고 오는 케익을 놀랍고 감동받은 표정으로 반긴다. 에비는 둘 중 어느 하나가 죽으면 일주일 안에 나머지 하나도 죽음을 맞는다는 완벽한 일부일처의 새를 방 한편에 가두어둔다. 마치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도 완벽한 상대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양.
이렇듯 완벽하지도 서로를 충족하지도 못하는 이들이 한 집에 모여 살아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이 모여 살아가는 공간, 즉 도로시의 저택이다. 이 저택은 1905년부터 쌓아 올린 하나의 축적이자 가문과 전쟁, 화재와 보헤미안의 기록이다. 저택은 지어진 이래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보수되고 유지되어왔다. 1979년 영화의 현재 시점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도로시와 윌리엄이다. 이들은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쌓아 올린 축적과 기록에 동참한다. 거기에 20세기 중기에 태어나 후기를 맞이할 제이미, 에비, 그리고 줄리가 그 속을 채운다. 서로 다른 세대의 다섯 명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로시의 저택. 이 저택은 그 자체로 20세기의 축소판이다.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관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우리의 20세기>의 하우스쉐어링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삶을 공유하는 행위다. 이토록 미숙하고 서툴고 불완전한 인간을 계속해서 조명함에도 <우리의 20세기>가 든든하고 낭만적이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맥스와 카를로타와 달리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이들은 홀로 남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새로운 시작을 하기도 하면서 서로를 점차 잊어간다. 에비는 의사의 경고와 달리 두 아이를 낳아 산타바바라에서 행복한 가정을 일군다. 줄리는 상담 치료를 종료한다. 하지만 윌리엄은 그간 살아온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을 지속한다. 가까운 미래에 어떤 이들은 목표하던 완벽에 가까운 삶을 영위하지만, 어떤 이는 뜻대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끼며 삶을 지속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전부라고 할 만큼 소중한 경험도 보잘것없는 경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생에 찾아온 위기는 때로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되기도 하므로. 완벽해 보이는 미래에도 결핍은 분명하게 존재하므로. <우리의 20세기>가 정의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생'이다.
You Only Live Once. 이제는 진부한 말이 되었지만 의미를 생각해보노라면 언제까지고 두근거리는 말이다. 한 번 사는 인생, 고민 없이 즐기고 망설임 없이 도전하라는 이 말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N포세대’에게 건넬 단 하나의 위로였고, 그렇게 ‘욜로(YOLO)’는 2017년을 대변하는 10대 키워드 중 하나가 되었다(김난도, 트렌드 코리아 2017, 미래의창, 2016).
하지만 ‘인생은 한 번뿐이다’라는 문장은 한 편으로 우리 모두가 인생을 처음 겪는 사람들임을 시사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연습하지 못한 채 우리는 세상에 던져지며, 그 순간부터는 모든 것이 실전이다. 누군가의 자식이 되는 일과 누군가의 부모가 되는 일마저 우리는 모두 처음인 것이다. 시험에는 모의고사가 있고 내기에는 연습게임이 있는데, 어째서 가장 중요한 ‘인생’이라는 항목을 우리는 처음으로 임해야 하는 것일까. 도로시는 엄마가 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한다. 제이미는 태어남과 동시에 누군가의 아들로 살아가게 되었다. 사실 이들은 서로에게 서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 서툶이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과도 같았다.
<우리의 20세기>는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서툰지를 계속해서 조명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서툶을 비관한다기보다 오히려 찬양하는 쪽이다. 마음 가는 대로 가지 않는 인생, 마음먹은 대로 행해지지 않는 인생, 겁나고 복잡하고 두려운 인생, … 인생을 수식할 수 있는 표현은 너무나도 많지만 마이크 밀스는 영화를 통해 구태여 인생을 수식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울울창창한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한없이 작고 나약한 줄리의 모습을 프레임에 담으며, 우리의 인생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에비가 염색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이미는 염색약을 산다. 도로시와 같은 머리색이 된 제이미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새로운 시작'을 느낀다. 한없이 서툰 인생 속에서 희망을 보여주는 <우리의 20세기>는 인생에 대한 가장 완벽한 예찬론이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