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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남 Oct 22. 2023

<바비>로 보는 페미니즘 변천사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여성의 역할

[스포일러: 보통]



 <바비>는 그 자체로 2010년대 사라 바넷와이저가 주장한 ‘대중적인 페미니즘’이다. <레이디 버드> <작은 아씨들>로 젠더 이슈를 남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그레타 거윅 감독은 <바비>라는 코미디 장르의 영화를 통해 페미니즘을 유머러스하면서도 풍자적인 방식으로 담아내었다. <바비>는 대중문화 매체에 맞게 가시성을 높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언급하게 만드는 데 의의가 있다.



 ‘바비 월드’는 그 자체로 1990년대의 ‘포스트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성의 선택과 허락을 받아야 비로소 행동할 수 있는 남성의 모습은 마치 여성 상위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남성은 여성을 보조하는 역할로 강조되며, 여성은 직업적으로 성공한 ‘Stereotypical Barbie’로 정의된다. 여성 대통령, 여성 노벨상 수상자, 여성 판사와 변호사, 여성 의사 등 매 순간 강조되는 직업여성의 모습은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을 강조하던 20세기 초중반 모습과 흡사하다. 휠체어를 타거나 표준 체형 이상일지라도 이들은 모두 ‘Stereotypical Barbie’에 해당되는데, 이렇듯 인종과 외형에 상관없이 모두가 당당하게 존재할 수 있는 모습은 진정한 여성 시대가 이미 도래한 것처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포스트 페미니즘적이다.


 ‘바비 월드’는 그러나 ‘포스트 페미니즘’이 그렇듯 진정한 여성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지 못하고, 오히려 2010년대 초 등장한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여성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임신한 바비는 그 자체로 ‘이상하다(Weird)’는 이유로 생산 중지 되었으며, 애초에 다른 회사들이 만든 여아용 아기 인형들을 대체하는 존재가 ‘바비’였기에, ‘바비 월드’ 속에서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의 모습은 완벽하게 거세되기에 이른다. 오로지 직업여성으로서의 성공만 바라봄으로써 여성 우월이라는 착각을 지속하게 만든다. 돌봄 노동에 대한 언급이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동안 꾸밈노동은 강조되는 모습도 보이는데, 내려간 뒤꿈치나 셀룰라이트는 곧바로 ‘Weird Barbie’를 정의하는 요소가 된다.



 바비와 켄의 ‘리얼 월드’로의 이동은 ‘포스트 페미니즘’의 환상을 걷어내고 ‘바비 월드’가 보여주지 못하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를 부각한다. ‘리얼 월드’에서는 일하는 여성의 모습과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의 모습이 모두 강조된다. 현실 속 여성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사샤가 환상에 불과한 ‘바비’와 바비의 세계관 ‘바비 월드’를 통째로 거부하는 이유다. 현실 속 여성의 역할에 피로를 느껴 환상으로 도피하는 쪽은 사샤의 엄마인 글로리아다. 글로리아는 딸한테 미움받는 따분한 직장인 여성에 불과하지만, ‘엄마’로 불리는 존재가 ‘바비 월드’를 다시 살리는 구세주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직업여성으로서의 역할과 엄마로서의 역할, 두 가지 모두를 중요시하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이 겨냥하는 바가, 현대의 페미니즘을 이끌어가는 최선의 이념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편으로 ‘리얼 월드’로의 이동은 젠더 수행성의 변화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켄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습득하고 여성을 보조하는 역할에서 벗어나게 된다. 나아가 가부장제와 남성 우월주의에 대해 찬양하고 이를 ‘바비 월드’에 전파하기에 이른다. ‘바비 월드’는 매우 쉽게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잠식(Brain-washing)되는데, 애초에 ‘바비 월드’를 만들어 낸 환상이 남성성에 기반하여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속 여성의 역할을 단순히 외면만 했을 뿐, ‘바비 월드’ 속에는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여성의 역할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단지 직업적으로 성공한 모습만 조명하여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바비의 발명가 루스 핸들러는 ‘바비’라는 이름을 딸의 이름 ‘바버라’에서 따왔다고 말한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마치 구원자처럼 묘사되는 존재로, 글로리아와 마찬가지로 한 아이의 엄마이다. 우선, 모성애가 모든 것을 구제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페미니즘’ 또한 절대로 완벽한 젠더 담론이 아니다. <바비>는 다만 현시점에서 직업여성으로서의 성공만을 다루는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포스트 페미니즘 이후에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도래하듯 ‘페미니즘은 계속해서 진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 일반을 향해 ‘슈퍼 우먼’이 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다. 왜 여성에게 둘 다 가질 권리를 주지 않느냐 묻는 것이다. 인생이 계속 변하듯 페미니즘이라는 젠더 담론 또한 이렇듯 계속해서 변화해야 한다. 과거의 페미니즘은 현재에 정답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사샤의 말대로, 완벽하지 않아도 세상은 변화할 수 있다.



 젠더 담론은 항상 열띤 토론과 좌절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격앙되어 이야기를 하다가도, 결국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허무함이 든다. 2023년 페미니즘은 실존적 위기를 겪을 것인가, 다음 스텝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데에서 페미니즘은 다시 이어질 거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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