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nidad 별장 feat. 구릿빛 피부
트리니다드에서의 일이다. 전 편에 언급한 Idania 까사(쿠바 민박) 주인아주머니랑 같이 아들 별장에 가기로 했다. 아들은 다이버인데 저렴한 비용으로 함께 스노클링이나 스쿠버 다이빙 혹은 낚시를 할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가끔 여행객들을 그곳에 보낸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와 함께 가시기로 했다.
나 같은 학생이 부담하기에는 택시 왕복 비용이 꽤 들기 때문에 본인과 함께 현지인들이 타는 합승 택시 정류장에 가서 부탁해보자고 하셨다. 네가 외국인이라 태워줄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가서 도전해보자, 주먹을 불끈 쥐시고는 장난스러운 눈빛을 빛내시며 하신 말씀이다.
아아... 예상은 했지만 아주머니는 협상의 달인이셨다. 동네 시장을 통과하여 15분 정도 걸으니 택시 터미널 같은 곳이 나왔는데, 아저씨들의 완고함을 뚫고 결국 1쿡(=1달러)에 나를 태워주는 것으로 결판을 내셨다. 아주머니가 조금 강한 타입이긴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누구도 기분 나쁘지 않게 원하는 것을 얻어내신다.
보통 트리니다드에 가는 여행객이 가는 해변은 '라 보까'아니면 '앙꼰'이다. 아들의 집은 이 두 해변의 중간 지점에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입구를 알 수 없게 되어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이 곳이 들어가는 길이라고?'라고 생각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살짝 실망했다. 아주머니가 별장이 너무너무 보니또(bonito: 예쁜) 하다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나 보다. 내가 생각했던 분위기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물이 무서운 나는 여기서 나의 생명을 걸고(?) 스노클링이나 다이빙을 해도 되는 걸까 싶어서 사실은 속으로 조금 속은 기분이 들었다.
아주머니 아들이 집에 안 계셔서 일단 나는 아주머니와 아주머니 며느리와 그늘에 의자를 놓고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제야 찬찬히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왔는데 동물들이 참 많았다. 오리에 개 두 마리, 토끼, 그리고 새끼를 밴 뚱뚱한 돼지까지. 점점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이 모든 분위기가 즐거웠다.
아저씨는 약 한 시간 뒤에 한 스페인 남자와 함께 돌아왔는데, 먼저 이 남자와 함께 잠수를 하고 돌아와서 나와 함께 가기로 했다. 쿠바는 끝없는 기다림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게 된다. 뭐 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가까운 작은 해변에서 일하는 청년이 자전거를 끌고 집에 놀러 왔다. 아주머니는 그 청년과 함께 해변가에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자전거를 못 탄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걷다가 갑자기 뒤에 타란다. 나보다 체구도 작고 자전거도 두 명이 타면 부서질 것처럼 생겼는데.... 내적 갈등을 하다가 올라탔는데 살짝 오르막길이기도 했지만 엄청 힘들어 보였다. 진심으로 미안했다.
도착하니 해변가가 내가 생각하던 해변이 아니고 돌이 많고 갑자기 확 깊어지는 바다였다. 스노클링 하기에는 딱이겠지만 수영도 못하고 구명조끼도 없던 나는 친절한 프랑스 사람들의 배려로 파라솔 그늘을 빌려 앉아 먼 바다만 쳐다보았다. 수영 못하고 자전거 못 타는 게 이렇게 한스러울 줄이야.
하지만 그늘을 계속 빌리기도 눈치 보이고 할 것도 없어서 한 20분 만에 다시 돌아가려고 일어났다. 걸으면 15분 정도 되는 거리라 걸어간다고 했는데 아까 그 청년이 굳이 다시 태워준다며 일어나다가 돌부리에 발을 부딪혀 피가 콸콸 났다. 그런데도 태워준다고 자전거를 가지고 오는데 웬걸, 타이어 바람이 빠졌다. 발 다친 것도 타이어 바람이 빠진 것도 내 탓이겠냐만은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그렇게 감사와 이별의 인사를 하고 혼자 길을 걸었다.
그렇게 걸어서 한참을 걷는데 내가 위에 언급했듯이 별장의 입구는 어디가 입구인지 알아보기 힘든 곳이었다.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가다 보면 눈에 익은 곳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계속 걷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헉헉대며 나를 부른다. 뒤돌아보니 아까 그 해변에서 일하는 청년의 친구가 자전거에 앉아있다. 잠시 숨을 고르고는 이래서 너를 혼자 보내면 안 되었던 거야! 한다. 알고 보니 이미 별장 지났다고. 웃으면서 다시 돌아갈게, 했더니 매점에서 맥주만 사서 온다며 잠깐 기다리라고 한다.
다시 돌아와서 이번에는 나를 자전거 앞에 태워줬다. 자전거 뒤에 타본 것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앞에 타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 또 너무 힘들어하면 어떡하지 걱정이 되었는데 우와, 자전거가 쭉쭉 나간다. 너무 재밌었다. 궁상맞지만 주변 풍경도 너무 아름답고 바람도 시원해서 꼭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누가 나를 또 이렇게 태워주겠는가. 그리고 이 청년은 다년의 해변 라이프가드 경험과 자연 태닝으로 만들어진 탄탄한 구릿빛 몸매의 소유자였다. 쿠바 사람들 몸매는 워낙 좋지만 사람 몸이 정말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이 든 적은 처음이었다. 나도 이 청년처럼 튼튼하고 건강한 몸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까 전에는 자전거 못 타는 게 그렇게 한스럽다가 지금은 못 타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다니 아, 나 너무 간사한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