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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보리 Oct 19. 2020

엘로 언니에게 1

첫 번째 편지

 언니 잘 지내고 있어요? 찾아보니 언니가 사는 나라는 이번 주 내내 비가 오네요. 습도는 무려 90%나 되어요.


우리가 같은 방을 썼던 지구 반대편의 그 나라는 아주 날이 좋대요. 그곳도 꽤나 더웠는데요, 그죠? 가만히 서있어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을 느낄 수 있었잖아요. 밤에는 선풍기를 늘 틀어놓고 자다가 전기가 나가 꺼지는 순간에 거짓말처럼 동시에 잠도 딱 깨곤 했어요. 태풍이 와서 창문이 덜컹거려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만큼 깊은 잠을 자는 사람인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더워서 어쩔 줄 몰라 우리 사이에 쳐진 커튼을 살짝 옆으로 치워보면 언니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었어요. 고온다습 아열대성 기후에서 나고 자란 언니의 내공을 따라가기엔 제가 너무 멀었었죠.   

 

 언니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해요. 저는 하루가 넘는 비행 끝에 아순시온에 도착했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앞으로 한 해 동안 일하게 될 학교를 드디어 마주했어요. 그리고 언니는 1학년 교실 작은 불 아래 네모난 나무 의자에 앉아 재봉틀을 하고 있었지요. 제게는 꽤나 생소한 광경이었어요. 이런 저에게 언니는 개학을 앞두고 학생들 의자에 씌울 의자 커버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어요. 귀여운 무늬가 그려진 얇은 천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사실 대놓고 티는 못 냈지만 첫날 저는 세 가지 충격을 받았는데요, 하나는 학교 다락방에 살아야 한다는 것과 또 하나는 저희에게 '방'이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나머지 하나는 조금 후에 말할게요.


 일단 먼저는, 학교에서 지내야 하는지 몰랐어요. 따로 숙소가 마련되어 있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담당자분이 저를 그 학교에 두고 떠나셨을 때 조금 놀랐답니다. 하지만 이 정도야, 파라과이행을 결심할 때부터 편한 생활에 대한 기대는 접었기에 금방 마음을 다잡았지요.


 조금 더 놀란 것은, 제가, 그니까 우리가 지낼 방을 보고서예요. 사실 방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이민 가방을 낑낑 들고 계단을 몇 번 올라가니 작은 나무 문이 나왔고, 잠겨있는 그 문을 언니가 열어주니 이번엔 통로가 좀 더 좁은 계단들이 나왔어요.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올라가니 여러 물건들이 쌓여 있는 창고가 있었어요. 조금 퀴퀴한 냄새가 났어요. 앞서 걸어가는 언니를 따라가니 옷들이 쌓인 선반들이 나왔고요. 그리고 거기에 고리가 달린 커다란 나무판자가 있더라고요.


 언니가 그 고리를 잡아당기자 마법 같게도 두 개의 작은 침대가 사이좋게 놓여있는 아담한 공간이 나왔어요. 두 침대 간격은 너무 가까워서 우리가 침대에 걸터앉으려면 다리가 서로 닿지 않게 엇갈려서 앉아야 했지요. 그 방은 창고 겸 다락방에 나무판자를 삼면으로 가벽처럼 세워 만든 공간이었어요.


 천장은 아래층 강당과 공유하고 있는 구조라서 방에서 나오면 강당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죠. 환기가 잘 되어 그래도 다행이었어요. 나중에야 방으로 가는 길에 있던 물품들은 학교 비품, 옷들은 선교 단체에서 후원받은 물품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여기서 일 년을 보낼 수 있을까, 짐을 둘 자리는 있을까 등 그런 류의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쳤어요. 그런데 언니에게도 한 번 말한 적 있듯 남미의 학교에서 일하는 것은 제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꼭 이루고 싶었던 꿈이었어요. 게다가 다행히 스물한 살의 저는 지금보다 좀 더 순수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금방 받아들일 수 있었답니다.


 제게 마지막 서프라이즈 펀치를 날린 것은 바로 그다음의 일이었어요. 약 스물다섯 시간의 비행을 했던 저는 피곤하면서도 이 모든 것이 얼떨떨했는데 이런 제 마음을 읽었는지 항상 배려심 많던 언니가 제게 샤워를 하고 쉬기를 권했어요. 저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는 언니에게 무척 고마웠죠. 시간은 이미 한 밤 중이 되어가고 커다란 짐가방을 풀 엄두는 못 내어 대충 짐을 뒤져서 잠옷과 세면도구를 꺼냈어요. 언니가 샤워실로 저를 이끄는데 아,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요?


 학교 화장실 구조는 한국 학교의 그것과 비슷했어요. 언니가 학창 시절을 보낸 필리핀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변기가 있는 여러 칸막이를 지나면 마지막에 대걸레 빠는 곳이 나오거든요. 거기도 그랬어요. 단지 대걸레 통이 벽에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옆에 따로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죠. 네, 바로 여기가 샤워실이었어요. 언니, 언니한테 말은 못 했지만 우습게도 저 사실 그 날 졸졸졸 나오는 물을 맞으며 조금 눈물이 났잖아요. 할 수 있다, 잘 지낼 수 있다,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사실은 그렇게 자신이 있지는 않아서 눈물 몇 방울이 계속 났어요. 더운 여름에도 차가운 물에 샤워를 못하는데 그 날 하필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서 더 그랬을 수도 있겠어요.


 언니가 아니었으면 저는 첫날 그렇게 마음을 강하게 먹을 수 없었을 거예요. 제가 스페인어를 잘하지 못하던 때라 순조로운 대화가 오고 가지는 못했지만 언니의 따뜻한 눈빛과 친절함에 용기가 생겼어요. 무엇보다도 언니와 함께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어요. 제 작은 침대 왼쪽으로 걸려 있는 얇은 커튼 너머로 언니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어요. 그래도 혼자가 아니구나. 도저히 오지 않을 것 같던 잠이 오더라고요. 와이파이도 없고 전화가 되는 휴대폰도 없어 가끔은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왜 이렇게 안도감이 들었을까요, 왜 이렇게 위로가 되었을까요. 언니, 언니는 그곳에서 그동안 어떻게 혼자 지낼 수 있었어요?


그냥 갑자기 요즘 문득 그때 생각이 부쩍 나서 편지를 썼어요. 사실 그 일 년의 기억은 부분 부분 선명하기도 하고 불투명하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첫날의 인상은 아주 생생해요. 학교도, 언니도요.


글을 쓰며 다시 한번 깨달았지만 언니는 여러모로 참 대단한 사람이에요.

오늘은 이만 줄이고 조만간 또다시 편지할게요.



언니의 파라과이 룸메이트 동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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