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다 창조 욕구 인정 욕구로 뭉치게 되었는가
퇴근하는 길에 유튜브에서 <남자는 사랑받길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연애 / 심리 클립을 무심코 클릭했다. 비디오의 내용은 요약하자면, 여성은 파트너로부터 애정표현을 받고, 보호를 받으며 안정감을 느끼며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을 갖는 반면, 남성은 자신이 사랑받는 것보다는 파트너에게 자신이 무언가를 해주고, 상대방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또는 고맙다는 표현을 받음으로써 다시 말해, ‘인정’을 받아야 사랑과 행복을 느낀다는 내용이었다. 생각이 깊어졌다. 나는 아닌 것 같은데….
일주일 전에 생일 기념으로 절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나는 왜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을까, 글로든 영상으로든 이야기를 펼쳐내고 싶어 할까.’ 고민에 빠졌다.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신기하게도 답은 생각보다 빠르게 내게 다가왔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을 거다. 나는 담임선생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 중 한 명이었다. 굳이 나서서 선생님의 새치를 뽑아드린다던가, 심부름을 도맡아 교실과 교무실을 넘나드는 행위를 즐겼다. 사물함과 책상도 집에서와는 다르게 깨끗이 쓰고, 청소도 박박 열심히 했다. 학교라는 사회에서 나의 존재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기쁨으로 다가왔다. 반면, 집에서 내 방은 돼지우리였다. 책상은 한 번 치우고 나면, 1주일이 채 안되어 책상 위는 물건으로 다시 가득해졌다. 가끔씩 우리 집에 오시는 할머니는 그런 내 책상을 말끔히 치워주셨다. 어릴 때에도 한 번쯤은 집에서와 너무나 다른 나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거다. 세 자매 중 둘째인 나는 공부도 곧잘 했다. 공부에 영 재미를 못 붙이는 언니나 동생과는 다르게 공부를 좋아하기도 했다. 공부 못하는 학교라고 소문난 곳에서 반에서 5등 안에 들고 하는 게 뭐 그리 내세울 일이랴만, 우리 학교가 그 정도라는 것이 한 편으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만족과는 달리, 준수한 시험과 수행평가 성적표를 받아 부모님께 내밀 때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좌절했다.
“아이고, 우리 딸! 너무 잘했네. 자랑스러워. 공부하느라 고생 많았어.”
이런 반응을 꿈꾸었지만 매번 돌아오는 대사는 건조하고 차갑게 혹독히 나를 훈련시켰다.
“그래, 수고했다. 너 그렇다고 여기서 자만하지 마라.”
언제나, 언제나, 이런 반응이었다. ‘그래, 뭐 어차피 내 만족으로 하는 거니까.’ 하며 털어 버리곤 했지만, 애정 없는 충고는 오랫동안 은근한 상처와 결핍이 되어갔다. 인정받고 싶었다. 엄마한테, 아빠한테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우리 딸 너무 잘했네. 멋져. 그동안 노력의 결실이야. 축하해.’ 순수한 축하와 칭찬은 해줄 수 없었던 걸까.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항상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집에서 못 듣는 칭찬을 학교에서라도 들어야 했나 보다. 가족이 줄 수 없는 인정을 선생님한테서, 친구들한테서라도 어떻게든 채우고 싶었던 거다. 학교에서는 싹싹하고, 사교성 좋고, 공부도 곧잘 하는 나는 급우들과 선생님에게 성실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 수많은 학기의 학급 임원을 자처해서 지냈을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다시 아까 유튜브 영상 이야기를 꺼내자면, 나는 애정표현도, 인정도 골고루 결핍이었던 것 같다. 남녀 따라 다른 게 아니라, 각자의 히스토리에 따라 사랑을 느끼는, 결핍을 채워주는 요소가 다르지 않을까. 결국 그 결핍도 각자 스스로의 치유와 사랑을 통해 해결할 수 있겠지만. 나의 어릴 적 애정결핍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을 엄마를 꼭 안아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채워나간다. 지금도 엄마는 나의 상처를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지만 괜찮다. 나는 이제 나를, 내 속의 어린아이를 얼러 만져주도 사랑해줄 수 있는 책임 있는 어른이 됐기 때문이다. 그 괴정들을 담아내기 위해서 글을 쓰고 싶고, 기록을 하고 싶은 욕구가 넘실대는 것 같다. 이 꽉 찬 마음을 풀어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결국 나의 어린 자아의 애정결핍은 나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