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기록
기억과 기록
여행을 갈 때 늘 준비하는 것은 크로스백에 들어가는 사이즈의 작은 노트와 연필, 좋아하는 잉크펜 하나다. 색연필도 있으면 더 좋다.
여행지에서 만난 길가의 돌멩이가, 타이어를 묶어 만든 그네가, 짓다만 건물의 흔적이, 신문지로 무심히 담은 꽃 한 다발이 관련된 어떤 순간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곤 했다. 그럴 때면 길가의 벤치에 앉아 글을 썼다. 글에는 따듯한 추억이, 후회가, 보내지 못한 사람에 대한 미련과 미안함이,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가 담겼고, 글을 쓰고 난 후에야 무언가 매듭이 지어진 듯한 마음을 안고 다시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보니 여행 갔던 곳을 생각하면 사실 유명한 관광지보다 길과 벤치, 사람들의 걷는 모습이 늘 떠오른다. 바삐 보내던 일상에서 소화되지 않은 감정들을 여행을 통해 흘려보냈던 것 같다.
노트를 넘겨보면 점과 점을 이은 선이 등장하는데 그날의 기분과 발걸음에 따라 이동한 기록이었다. 작은 도시의 이름, 지역의 기차표가 붙어있다. 누군가에게 받은 메모와 편지, 써놓고 붙이지 못한 편지들도 간혹 나온다.
그 순간들을 노트에 적어두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곤 했다. 기록이 기억을 대신해주니 괜찮았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무언가 쓰고 남기며 기록에 기대어 살고 있다.
물려줄 수 있는 유산_순간을 기억하는 법
딸과 데이트할 때 주로 도서관이나 카페에 가고, 전시회도 간다. 핸드폰 속 사진을 보면 ‘그런 곳이 있었지’, ‘참 예뻤다.’라는 현재의 마음이 떠오르지만, 그 장면을 그 각도로 찍은 이유와 그때 나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 글로 기록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는 순간이다.
사람들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르듯이, 나의 경우 이미지가 주는 상상의 여백도 좋지만 글에 더 애착을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아이가 매일 일기를 쓰는 걸 독려한다. (다른 친구들처럼 매일 학원 가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 두 아이가 공유하고 타협한 부분 인듯하다.) 성실한 아이들 덕분에 요즘 일상은 아이들의 일기를 보면 알 수 있는데(물론 보는 것도 찍는 것도 아이들의 동의하에) 그날 아이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다시 느껴져서 참 좋다.
나는 더는 일기를 매일 쓰지는 않지만, 글쓰기를 통해서 언젠가 아이들도 자신의 마음을 알고, 기록하고 잊기도 하고, 생각을 수월히 전했으면 좋겠다. (이미 그렇게 자라주고 있어 고맙기도 하고)
10년 후, 지금을 돌아본다면
10년 후에, 언젠가 아이도 (원한다면) 엄마가 된 후에 이번 여행을 어떻게 기억할까 생각을 하다, 함께 여행일기를 쓰기로 했다. 그림은 못 그리지만 기억에 남는 장면도 그려볼 생각이다.
며칠 전 여행 때 가지고 갈 스케치북이 도착했고, 함께 고른 여행 일기장이 다음날 도착했다. 택배 상자를 열어보고 싶었을 텐데 늦게서야 집에 온 엄마를 기다렸다가 함께 열어보자고 한다. 택배 상자에 이미 신난 딸은 ‘엄마 우리 여행 가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둘 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들떠있다. 엄마와 같은 물건을 사고, 같은 취미를 가졌다는 것에 기뻐한다. 방학 때 친구들은 학원에만 가는데, 엄마는 자기랑 시간을 많이 보내줘서 행복하다고 한다. (유, 우리 아직 여행 안 갔어..라는 말을 삼킨다.) 아이의 마음은 이미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떠난 듯하다.
여자니까, 누나니까라는 말을 상대적으로 안 하는 집이지만, 동생이 있기에 나름의 고충이 있을 것 같다. 동생이 있어 풍성하기도 하지만, 부모를 홀로 독차지하고, 주목받고 싶다는 마음은 영원히 채워주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오빠가 있는 나는 어쩌면 동생이 있는 유의 마음의 한 부분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직 떠나지 않은 여행에 이리도 기뻐하는 아이를 보니, 그리고 그것이 단둘만의 시간이라는 점에 행복해하는 아이를 보니, 이번 여행은 참 잘한 결정이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