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
여행의 기술_#1. 내가 들 수 있는 만큼.
혼자 떠났던 여행을 돌아본다. 태국에서 넉 달을 생활할 때도 큰 캐리어 하나와 배낭, 스페인에서 몇 주를 보낼 때는 같은 배낭 하나와 작은 크로스백뿐이었다. 내 몸으로 들 수 있는 정도로 타협하니 배낭의 크기는 작았다. 꼭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느라 몇 번을 넣었다 빼면서 짐을 싸야 했다. 놀라운 건, 그때마다 불필요한 게 나왔고, 적은 짐에도 불구하고 여행 내내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와의 삶은 여행보다 더 예측 불가능한 것 투성이었다. 그러니 필요한 짐은 점점 늘어났다. 아이를 달래기 위해 핸드폰 사용은 하지 말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 부부는 늘 책과 장난감을 챙겨서 들고 다녔다. 더 어릴 때는 기저귀, 조금 더 자라서는 이유식과 간식, 언제 필요할지 몰라 챙기는 여벌 옷만 해도 가방 하나로는 부족했다. (물론 밖에서 불필요한 지출을 하지 않겠다는 또 다른 결심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다행히 몇 년 전부터 예측 불가능한 시기가 어느 정도 지났다. 외출할 때 가방을 챙기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짐을 챙 길 때는 우리만의 규칙이 있다. 각자 들 수 있는 만큼만 챙기는 것이다. “들어주세요.”는 허용되지 않으니 자기가 들 수 있는 가방에 필요한 것을 잘 골라서 넣어야 한다. 자기 등만 한 가방에는 종이, 색연필은 기본이고, 색종이와 딱지, ㅍㅋㅁ카드, 구슬에 간혹 인형도 들어있다. 숙박을 할 경우 입을 옷이나 공통의 짐은 엄마 가방에 넣을 수 있지만, 이 또한 스스로 챙겨야 한다.
어디서든 잘 놀기 위해 스스로 준비하고, 자기 물건을 챙겨서 돌아오는 연습, 언젠가 아이가 혼자서 해야 할 일이 늘어날 때를 준비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래도 가끔은 뭐든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힘도 세고, 덩치도 큰 엄마였으면 하는데 그렇지 못한 나로선 늘 아쉽고, 여행을 가자니 또 아쉽다. 그러니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다. 이번에도 우리는 내가 들어서 옮길 수 있는 사이즈의 캐리어 하나와 각자의 가방 하나로 움직여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짐은 가급적 적어야 할 것 같다.
여행의 기술 _ #2. 걸어야 보이는 것
신체적 조건, 물리적인 상황을 제쳐놓더라도 여행의 목적과 방식이 짐을 챙기는 데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예쁘고 유명한 곳을 중심으로 보고 오려면 차로 다녀오면 될 일이다. 그런데 나는 굳이, 아이와 많이 걷는 여행을 하고 싶다. 지금껏 여행을 하면서 도시 간 이동 외에는 되도록 걷는 것 또한 나만의 방식이기도 하다. (고생스럽긴 하지만) 걷다 보면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들, 사람들의 모습이 마음에 담긴다. 차를 타면 지나쳐버리는 소중한 풍경들이 너무 많았다.
‘유’는 작은 차이를 잘 찾아낸다. 그리고 그 순간을 엄마와 공유하며 행복해한다. 덕분에 아이와 걷는 길은 늘 보물 찾기를 하는 기분이 든다. 구름 속의 다양한 동물 모양도, 난생처음 마주친 쌍무지개도, 돈의문 바닥에서 작은 유적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유’ 덕분이었다.
오감이 남보다 발달한 아이(누군가는 까다롭고 예민한 기질이라고도 부르지만 우리는 달리 부르기로 했다)에게 줄 수 있는 선물 중 하나는 발견하고 관찰할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번 여행은 두 손 잡고 걸으며, 그런 시간으로 채워주고 싶다. 그리고 그 순간을 아이와 고이 간직하고 싶다.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
그러니 우리는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잘 상의해서 각자가 들 수 있는 무게만큼의 짐을 싸야 한다. 과연 우리가 떠나는 날 가방엔 무엇이 들어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