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 초딩언니의 얼렁뚱땅 섹슈얼리티 탐험: 2
서른일곱 초딩언니의 얼렁뚱땅 섹슈얼리티 탐험: 1
잘 지내? 연락이 뜸했어.
주변 사람들과 일 속에 묻혀 살다가 이렇게 불쑥 연락하게 돼.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친구라고 싫어할까. 퍽 정리되지 않는 마음에 힘들었는데 문득 네 생각이 나는거야. 비슷한 경험을 해온 너라면 내 재미없는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어주지 않을까. 옳고 그른지 판단을 유보해주면서 혹여 가능하다면 이해까지 해주지 않을까. 혼란한 마음을 너에게 말하는 모험을 해볼테야.
하고 싶은 말은 얼마 전 경험한 불편한 독서에 대해서야. 작가 캐롤라인 냅이 쓴 <욕구들>이라는 책인데 혹시 읽어봤어? 너라면 이미 봤을 수도 있겠어. 평소에 책 읽는 걸 좋아하지만 그날만큼은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마음이 바닥에 떨어져 늘러붙는 기분이었어. 어릴 때의 내가,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자라지 못하거나 혹은 제대로 대면하지 못했는데 이미 훼손된 내 일부를 보는 듯한 거야. 내 두꺼운 다리를 미워하던 나. 다리에 대한 말을 들을까봐 여름에도 통풍 안 되는 긴청바지과 롱스커트에 꽁꽁 숨겨두던 몸들. 나인 것 자체로 뭔가 잘못해버린 기분이 들었던 시간들.
냅은 오랫동안 거식증으로 고생해왔데. 하루 800칼로리를 정해두고 새 모이마냥 식사를 하던 그를 보며 내 모습이 겹쳤어. 거식증까진 아니지만 식욕을 통제하며 뿌듯했던 시간이 내게도 있거든. 대학교 때 한창 살을 빼겠다고 하루 섭취열량을 1500 칼로리로 정해놓았어. 기억나? 어릴적 ‘하이에나'라 불릴 정도로 먹을 걸 좋아하던 나잖아. 그런 내가 그렇게 조금 먹으면서 하루 두 시간씩 운동했던 거야. 66킬로그램이던 몸무게가 57킬로그램까지 빠졌어.
살을 뺐더니 그간 한 마디도 안 걸던 과의 남자선배들이 처음 내게 말을 걸더라? 살 빼기 전까지 나는 그냥 말 없이 만화책만 보는 덕후였는데 말이야. 살을 뺀 것만으로도 ‘성별'이 생긴 기분이었어. “살 빠졌네"라는 말이 칭찬 같았지. 그런 칭찬이 뭐라고. 좋아하던 모카 빵도 바삭한 겉껍데기만 뜯어먹고는 살찔까봐 쓰레기통에 버렸던 거야. 새벽부터 빵을 만들어 판 사람의 노동을 떠올리면 정말 무슨 짓이었을까. 스스로 강제한 ‘1500칼로리’ 지침은 픽 쓰러진 나를 남동생이 들쳐업고 집에 데려다줄 때까지 이어졌어. 양껏 먹으라는 부모님의 꾸중에 그때서야 온전히 한 그릇의 밥을 다 먹었어.
그렇게 조였던 나를 풀어주었건만. 눌렀던 내 식욕은 스스로 가늠했던 것보다 더 컸나봐.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다가 일어나 비몽사몽하며 뭘 먹는 식이장애가 생기더라구. 아침에 일어났을 때 머리맡에 어지럽게 흩어진 과자봉지와 눈 마주친 기분... 혹시 아니? 식이장애로 꽤 오랫동안 고생했는데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 이런저런 과정 속에서 내 몸은 다시 좀 살집 있어졌지. 정수기 통을 갈거나 내가 좋아하는 운동 취미를 즐기는 데는 지금의 몸이 훨씬 괜찮아. 몸으로 해내는 게 많아지면서 나를 좋아하는 방식이 ‘예쁘다'가 아니라 ‘이걸 해냈어'라는 식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내 욕구와 화해하지 못한 또 다른 영역을 떠올렸어. 바로 여성성에 대해서야. 요즘이야 탈코르셋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숏컷이 많아졌다지만, 실은 탈코르셋이라는 단어가 생기기 한참 전부터 난 숏컷이었어. 메이크업도 잘 안 하고 다녔지. 그러다 보니 인스타그램에서 #탈코르셋 #탈코인증 해시태그를 쓰며 꾸미지 않는 자신을 인증하는 어린 여성 친구들이 이해가 안 되어 고민했어. 나는 숏컷에 노메이크업인 나를 전시한 적이 없었으니까. 아, 나는 꼰대가 된건가. 어쩌면 어린 친구들이 그들의 더 어린시절 겪었던 ‘예뻐야 한다'는 시선이 더 답답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꾸미지 않음에 대한 내 맥락은 그 어린 친구들과는 좀 달랐던 거 같아. 숏컷에 편한 복장을 하고 다닐 때 내심 이런 생각을 했거든. 나는 꾸며봤자 예쁘지 않아. 이를테면 잡지에서 본 무릎 위 기장의 원피스를 내가 입는다 해도 그건 내몸으로 표현할 수 없는 예쁨인거야. 날씬하게 드러날 다리의 선도, 슬림하고 탄탄하게 빠지는 복근도 내게는 없으니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 데 어떤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다른 사람이 “나는 별로 예쁘지 않아.” 이러면 “아냐, 넌 어떻게 생겨도 너 자체로 빛나!”라며 목소리를 높였을 텐데. 유난히 자기 자신에게는 그 말을 못 해줬어.
몸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20대 초중반. 그때의 내게는 여성성을 탐험할 시간이 없었어. 조직에서 살아남는 것만 생각해도 벅차더라. 여성성에 대한 욕구 같은 건 찾기도 전에 뭍어버리는 게 훨씬 편했지. “튼튼하니까 발로 차야 할 것 같아서." “니가 무슨 여자냐. 날 형이라 불러.” 내 다리를 축구공마냥 차버린 회사 대리님 같은 남자들을 볼 때 생각했어. 괜찮은 남성을 찾는 바늘구멍같은 가능성을 품고 사느니 여성으로서 사랑받고 싶은 내 욕구를 어디 던져버리는 게 낫다고. 그렇게 ‘여성성'을 놓거나 죽이는 일들이 조금씩 자리잡았어. 보이지 않는 걸 뭔 수로 없애냐고? 감각을 외면하면 돼. 손에 잡히지 않는 것도 죽일 수 있어. 그렇게 하나둘 마음이 줄어들면 자기 자신도 작아져.
짧게 잘라낸 머리카락. 청바지와 맨투맨 티가 자리를 차지해버린 옷장. 친한 남자 선배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무성 혹은 명예 남동생으로 위치를 정해버린 나. 내 여성성의 실체를 찾아내기도 전에 보는 시선부터 비뚤어져버렸다고 해야 하나. 연애를 해도 어째선지 그렇더라. 좋아하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고백하거나 행동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을 만나면 “진짜 이상한 사람 같아요”라고 상대의 여성취향을 의심했어. 누군가 나에게 ‘연애 상대로서의 호감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신히 머리로나마 외웠어. 감정적으로 상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긴 생머리도 아닌데, 성격도 고분고분하지 않은데. 이런 내게서 무얼 보았을까. 나도 모르는 새 나는 그 사람에게 뭘 해줬던가.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 데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아주 많은 것 같아.
아참.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하고픈 게 있다. 요즘 지레 포기해서 아주 죽어버린 줄 알았던 내 취향이 고개를 들어. 사실 난 하늘하늘한 것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다. 같아, 가 아니라 그냥 좋아해. 내 핀터레스트 계정에는 ‘레이스 옷' 폴더가 따로 있거든. 그런 옷들은 너무 작은 사이즈로 나와서 내게 입을 기회가 생길 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사서 입는다 해도 드러나는 내 몸은 든든한 팔뚝과 다소 살집이 있는 허벅지겠지만. 꼭 잡지 속 아름다움의 모습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좋아하는 조합을 그러모아 취향을 드러낸 모습 자체로 내 아름다움일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어울리지 않을꺼야' 라는 생각으로 버려두었던 취향들을 조금 펼쳐내보고 싶어. 엉성해도 시도해볼거야. 내내 불편한 마음이 들게 했던 책 ‘욕구들’. 그 마지막에 자신에게 맞는 섹슈얼리티를 발명해야 한다는 그 사람의 말에 기대어 용기내려 해.
내가 나로써 표현할 수 있는 여성성을 하나씩 찾고 드러내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욕구를 하나씩 들여다보고 드러내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어. 책의 끝에 냅이 막 태어난 조카에게 바랐던, 조카가 원하는 것으로 아이가 ‘가득 차는’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더라. 이런 막막한 일에는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줄 목격자가 필요하니까. 혼란스러운 마음이 떠오를 때 너에게 또 편지를 해볼게.
다음 편지에서도 괜히 힘주어 재미없는 말들을 늘어놓을까, 벌써 걱정된다. 그때까지 건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