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은 반려질병의 이름
2021년 9월. ADHD 진단받은 날을 떠올려봐야겠다.
오랫동안 품어온 내 구멍에 이름이 생긴 날이니까.
경증 우울증을 진단받고 약을 먹기 시작했다. 2주 정도의 주기로 병원에 가면 의사가 어떻게 지냈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어떤 일이 있었고 그에 따른 감정은 이랬다고 말한다. 우울감 여부를 체크한 후에는 곧이어 항우울제인 설트랄린의 처방 용량이 정해진다. 진료에서 ADHD라는 이름이 처음 나온 그날도 대화 패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왜 우울했나요?”
감정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일하면서 불편했던 순간을 쭉 말했을 뿐인데. 내 말을 들은 의사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ADHD가 의심되요. 사실 첫 진료 때부터 의심했던 부분이거든요. 이 기회에 검사를 해봅시다.”
컴퓨터로 여러 질문에 답하는 CAT 검사를 받았다. 걸린 시간은 40분 정도. 모니터 속 도형을 보고 키보드로 정답을 입력하면 된다. 검사가 끝나고 결과지를 바탕으로 진료가 진행됐다.
“대부분 ‘보통’ 에 해당하는 수치가 나올 항목에서 ‘부족'이란 결과치가 네 개나 나왔어요. ADHD가 강력 의심된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앗..아아.. 네."
“ADHD 약에는 두 개가 있어요. 효과가 높은 콘서타와 상대적으로 효과는 낮지만 부작용이 적은 스트라테라인데요. 일단 스트라테라를 먹는 걸로 시작해봅시다.”
정신 산란한 사람한테 농담처럼 “너 ADHD냐?”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지 않던가. 근데 그 병의 이름이 내꺼라고? 정신과 진료에서는 드러나는 증상만으로 병명을 판단하나? 어딘가 찝찝했다. 근육파열이나 골절처럼 직접 뇌 사진을 찍어 ADHD 여부를 알아내면 좋을텐데. ADHD 확정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 진단 앞에 오랫동안 혼자 ‘구멍'이라고 불러온 내 어떤 부분들이 훅 스쳤다.
손에 쥔 물건을 금새 잃어버리는 나. 다섯가지의 심부름을 받으면 두 세 개는 꼭 잊어버리는 나. 분명 눈 앞의 사람이 있는데 머릿속이 자꾸 다른 세계로 날아가버리는 나. 이런 내가 누군가의 말을 주의깊게 들어야하는 인터뷰 진행과정에서 회사 사수에게 들었던 꾸지람. 간신히 견딘 끝에 익숙해진 행동들, 혹은 지금까지도 울며불며 간신히 해내는 것들이 등푸른 생선에 들어갔다는 그 성분(DHC) 같은 이름의 병 때문이었구나. 그렇게 병의 이름을 받아들였다.
ADHD. 정식이름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관련 팸플랫에는 ‘주의력을 조절하는 뇌기능의 장애로 증상이 발생한다'는 설명이 있다. 주의력을 담당하는 뇌 부위, 이를테면 전두엽이나 두정엽 등에서 생기는 신경전달물질의 결핍으로 관련 증상이 나타난다.
내 경우는 과잉행동장애는 없고 주의력 결핍 증상이 두드러진다. 과잉행동장애는 도파민 결핍 때문에, 주의력 결핍은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분비 부족으로 생긴단다. 병에 대한 정보를 읽다가, 이 부분에서 나는 아.. 하고 한숨을 뱉었다. 도파민이 부족하면 행복감이 낮다. 아드레날린이 부족하면 소심하고 불안감을 잘 느낀다. 긍정적 감정의 평균치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던 시간들, 소심함과 불안감에 압도되 눈앞의 일을 움켜쥐어도 손안의 모래처럼 스스륵 빠져나가던 순간들. 그런 시간을 거친 끝에 지금의 내가 있었다. “노력하면 고칠 수 있는데 왜 너는 매번 그대로야?” 주변 사람들에게 들었던 말에 이제는 발끈하며 대답할 말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의지 부족이 아니라 뇌 속 호르몬 부족이거든요…!”
무엇보다 나의 구멍, 아니 나의 병인 성인 ADHD에는 완치 개념이 없단다. 부족한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을 약으로 보완하며 일상의 과업을 수행해갈 뿐. 그러니까, 이제 난 반려취미(십수년 동안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할 것 같은 검도)에 이어 반려질병도 생긴 셈이다.
ADHD가 확진된 후 약을 받고 병원 문을 나섰다. 애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고등어(?) 됐어. ADHD 확정이야.” 곧 카카오 캐릭터인 무지가 작은 악어 캐릭터인 콘을 껴안으며 우는 이모티콘이 왔다. 상대 반응이 금방 와닿지 않았다. “응? 울어? 이거 슬픈건가? 이미 이렇게 살아왔는데 뭘.” 마음에서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 아무렇지 않다. 그 사실이 왠지 더 이상하다.
멍하니 걷다 보니 삼성역 앞. 오가는 사람이 퍽 많았다. 입을 굳게 다문 채 면바지에 자켓을 걸치고 가는 사람. 노트북을 켜고 카페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흰 와이셔츠의 사람. ADHD이던 아니던 내가 저 사람들과 다를 건 없다. 이전에는 직장인으로, 이제는 조직 밖 프리랜서로 사회생활을 이어가며 돈벌이를 해내왔다. 급여 적용을 받는 덕에 약값도 2만원대로 예상보다 저렴했다. 1회기에 몇십 만원 하는 상담 비용을 생각하면 최고의 가성비 아닌가! 이대로 의료 민영화만 안 된다면 평생 곁에 둘 뇌장애를 다루기에 수월할테다.
왕십리 방향의 2호선 열차를 타러 역 안으로 들어갔다. 에코백 주머니를 뒤져 체크카드를 꺼내 개찰구에 댔다. ‘방역을 생활화합시다.' 귀에 들리는 음성.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너 ADHD냐?”라고 내게 농담 한다면 어떨까?
아마 예전처럼 더는 웃지 못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