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국제무예센터 기고5
낯선 사람에게 말을 잘 못 겁니다. 무예 수련자로서 멋진 모습만 보이고 싶은데, 첫 문장부터 뭔가를 못 하는 모습부터 털어놓으려니 쑥스럽네요. ‘나를 잘 바라보는 일’을 수련의 일부인 사람으로서 마주한 제 자신을 드러내 봤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길 어려워하는 제가 늘상 익숙한 장소를 벗어나 다른 도장의 사람들을 만난 일에 대해서거든요. 그 다른 도장이 언어가 통하지 않는, 다른 나라의 도장이라는 점에서 스스로 느끼기에 더 신기한 일이 된 어떤 추억에 대해서입니다.
파리 검도도장에 찾아가보면 어떨까
한달 전 5단 승단심사에 합격했습니다. 주변에서 제 나이 또래의, 같은 성별의 사람들이 보통 몇 단 정도인지를 생각하면 큰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2년 동안의 미끄러짐 끝에 승단한 거거든요. 합격이라는 결과가 스스로에게도 낯설고 저를 옆에서 지켜보며 함께 수련한 사람들에게도 좀 묵직한 의미로 다가온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원래부터 계획에 있었던 해외여행을 떠날 때 벅찬 기분일 수 있었어요. 프랑스 파리와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오가는 여행이었는데요. 여행 준비를 하며 몇 년 전 인천에서 열린 세계 검도 대회의 한 장면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한국에서 열린 대회인 만큼 직접 대회장을 찾아가 경기를 지켜봤고, 그때 제가 좋아하는 검도를 하는 외국 사람들을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거든요. 그중 프랑스 여자 국가 대표팀의 단체전 경기를 기억하고 있어요. 그들의 경기를 보면서 “와 잘한다”라고 생각했던 느낌. 유럽권 나라라 익숙하지 않을, 아시아의 무예인 검도를 진지하게 수련했을 실력을 보여준 모습 등등. 쓰는 말은 다르지만 같은 무예를 수련하는 사람에게서 전해지는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침 프랑스에 가니까 어쩌면 프랑스 도장에서 하루 정도는 검도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여기서 중요한 건, 제가 파리에 아는 도장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 프랑스 도장에서의 하루를 위해 누구에게 연락하면 좋을지조차 모르는 채였다는 겁니다. 과연 어렵게 가게 된 파리에서, 파리 검도도장에서의 하루를 보낼 수 있었을까요?
함께 여행을 준비하며 알게 된 일행들에게 ‘파리에 가면 검도도장을 한번 찾아가보고 싶다'고 말을 꺼내봤습니다.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나. 여행만으로도 바쁜 상황. 이런 것들을 떠올릴 때 말이 안 통하는 나라의 검도도장을 찾아가는 일이 가능할지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여러분은 그런 경험 혹시 있으실까요? 뭔가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 신기하게도 그 말을 밖으로 꺼낸 순간부터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어떤 상황이 그 일을 하게끔 등떠밀어주는 경험이요.
늘 쑥스러움을 안고 사는 저에게는, 그런 상황을 몇번 겪으며 생긴 조금 대책 없는 마음이 있어요. “하고 싶다고 일단 말해본다.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혹은 어떤 상황이 결국은 내가 그 일을 하게끔 등 떠밀어줄 지 모른다.” 이번에도 그 대책 없는 마음을 믿어봤어요. 프랑스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저에게, 마침 프랑스 유학 경험이 있는 여행 친구가 파리의 도장 몇몇을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주었습니다. 도장마다 홈페이지가 있어서, 저는 그 사이트에 적힌 이메일 주소로 이렇게 편지를 보냈답니다. 프랑스어는 물론이고 영어도 잘 못하기 때문에 한글로 글을 적고 구글 번역기의 힘을 빌렸습니다.
처음에는 친구가 찾아준 도장 이메일로, 나중에는 연락이 오지 않아 프랑스 검도 인스타그램 계정을 찾아서, 그러다가 여러 번의 소통 끝에 페이스북에 있는 프랑스 검도 커뮤니티로. 이 메시지를 여기저기 보내봤어요. 여행 출발 몇주 전부터 이곳저곳 메일을 보내봤지만 ‘운동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지 못했어요. 혹시 몰라 도복이라도 가져갈까 싶었지만 20일 가까이 되는 장기 여행의 짐을 싸다 보니 캐리어가 어느새 묵직해져 있더라고요. 도복을 빼자고 생각하면서, 그냥 원래 계획했던 여행만 해내자는 마음으로 인천공항에서 밤의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공항 바닥에 앉아 스마트폰의 알림을 확인하던 그때. 제가 쓴 페이스북 커뮤니티 글을 보고 누군가가 메시지를 보내온 걸 봤습니다. 파리에서 오래 거주 중인 한국 분한테서 온 거였어요. 파리 도장인 BUDO 11이란 곳에서 수련하는 분인데, 호구와 죽도를 빌려줄 수 있다는 메시지였죠. 아, 도복을 괜히 두고왔다.. 이미 집을 떠나온 데다가 항공기로 짐까지 부친 마당에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요. 결국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제가 비행기 탈 때 답변을 확인해서요. 연락이 없다고 생각해서 도복을 두고 왔어요. 도복까지 빌려주시지 않으면 운동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무슨 뻔뻔함인지. 심지어 도복까지 빌리면 그 도복을 빌려준 분이 내 땀으로 젖은 도복을 빨아야 한다는 건데..! 지금 생각해도 거듭 죄송하지만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저 말 외에 다른 걸 떠올리지 못 할듯 해요. 얼굴을 두껍게 하고 저 말을 보냈고, 우여곡절 끝에 하루 신세질 파리 도장에 그 어떤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가는 무모함을 감행했습니다.
인생에는 모든 걸 갖추지 못 해도 뛰어들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무예를 수련하면서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강자 혹은 어떤 돌발상황에 부딪히며 체감하는 무예인들. 그런 우리에게는 그 무모함의 용기를 몸으로 감각하는 순간이 있지 않나요. 다양성과 활기로 가득 찬 공간에서 파리의 도장을 찾아간 날은 여행 이틀째였어요. 파리 시각으로는 오후 8시 30분. 한국시간으로는 자정이 지난 새벽 시간이었죠. 밤을 꼴딱 새고 검도하는 기분이었달까요. 시차 적응이 안 되어 운동시간 내내 달에 착륙한 최초의 우주인이 된 마냥 붕붕 뜬 몸으로 대련에 임했습니다.
프랑스 여자국가대표팀 주장이자 5단인 이녜스가 저를 맞아주며 호구와 면수건을 빌려주었고요. 머리가 호구 장비 머리 부분에 들어가기엔 조금 커서 죽도로 맞을 때 내 머리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속으로 “음, 안 맞으면 되지.” 라고 결심했고 물론 많이 맞았습니다.
파리 도장에서 느낀 건 다양성이에요. 다양한 나이대, 다양한 인종. 한국의 검도도장에서는 별일 없는 한 늘 같은 인종의 사람들을 마주해왔으니까. 이렇게 이목구비가 다른 사람들과 수련하는 일상이 당연하다니. 지구 저편의 도장에서 날아온 아시아인인 저는 파리의 수련자들을 마주하는 일 자체가 무척 신기했지요. 연락을 주신 한국 분께서 체력단련을 하는 날이라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것도 신기했어요. 도장에서 저는 늘 저보다 나이 많은 분들과 함께 했으니까요.
좀 더 파이팅하는 분위기, 활기. 그런 것들로 검도도장이라는 공간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늘상 있던 곳에서만 수련했더라면, 이렇게 다른 분위기의 검도 도장이 있다는 감각을 못 느꼈겠죠. 이제껏 제가 익숙해져 온 근엄한 분위기와 진중함. 지구 저편의 파리 도장에서는 그와는 다른 활기참. 저는 하루의 잠깐만 여기에 몸담았을 뿐이지만요. 눈으로 직접 봐야만 알아챌 수 있는 것들을 경험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갓 5단이 된 저로써는 운동 커리큘럼을 진두지휘하는 ‘이녜스’의 모습에서도 강한 인상을 받았고요.
낯선 땅에서 좋아하는 무예로 익숙함과 친근함을 느낀 순간 운동 후 도장 분들과 간단한 맥주타임을 했습니다. 프랑스는 와인의 나라인 줄 알았는데요. 운동 후에는 아무래도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맥주가 딱이지 않겠습니까. 파리 도장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하는 거 같더라고요.
일본인인 6단 여자 사범님, 이녜스, 운동 커리큘럼이 프랑스로 진행될 때마다 통역을 해준 한국 분, 저에게 메시지를 주신 한국 분까지. 함께 모여 도장 근처의 펍에서 맥주를 마셨어요. 한국분께서 감사하게도 맥주를 사주셨는데요. 카드 결제기가 고장 나 현금으로 술값을 결제해야 해서 주문 줄이 늘어졌지만, 그마저도 일하는 사람을 우선하는 듯한 프랑스 문화의 일환이란 생각에 느긋하게 기다리며 검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파리의 검도와 한국의 검도를 왔다갔다 하며 대화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서로 비교를 할 수도 있고, 서로 흥미로워할 만한 부분에 대해 의견을 꺼내볼 수 있으니까요. 함께 해주신 한국분들 덕분에 짧은 단어로 뜨문뜨문 소통하는 대신 긴 맥락의 대화를 했네요. 땀을 흠뻑 흘린 터라 너무 목이 말랐고 벌컥벌컥 맥주를 마시고 알딸딸해져서는, 지하철을 타고 들뜬 걸음으로 종종 뛰어가며 숙소에 도착한 기억이 납니다.
낯선 나라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타는 일, 음식에 적응하는 일 등 긴장의 연속인 상황. 그 가운데 내가 오랫동안 좋아한 무예로 익숙함과 친근함, 새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 짧은 시간이고 단 하루의 저녁이었지만 좋은 마음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무모함과 배려 없음에 친절함으로 답해주셔서요. 미래의 일은 알 수 없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고를 드리자면요. 또 파리에 가게 된다면 그때는 장비를 들고 가겠습니다. 죽도는 대형 수화물을 부칠 때 골프채로 취급되어 약간 번거로워져 못 갖고 갈 듯한데요. 경량 호구와 기능성 도복은 꼭 함께 해보겠습니다…!
※ 이 글은 유네스코 국제무예센터 뉴스레터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