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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석천 Oct 16. 2021

정말로 사소한 습관 하나가

무위자연(無爲自然)

지금은 오른 엄지 손끝이 동그랗게 아물어 있다. 엄지 손끝으로 고생한 지 얼마만인지 모른다. 최근에는 계속 악화되어 어디까지 갈지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다. 손끝이 트는 것은 젊을 때부터 겨울철마다 있었던 일로 반창고를 붙여두면 낫곤 하니까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내왔다. 요즈음에는 일회용 반창고를 오려 붙여서 별로 눈에 띄지도 않게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일회용 반창고가 나오기 전에는 백색 면 반창고를 붙이곤 했었는데 눈에 띄고 다른 사람과 만나노라면   

   

“손 다쳤어요?”하고 묻곤 했다.

“아니요, 별거 아니에요.”      


라며 대수롭지 않은 척 지나가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손 끝에서 반창고 떠날 날이 없으니 신경을 안쓸 수가 없다. 그러나 겨울철이 지나고 나면 괜찮아진다. 하루 이틀 있다가 반창고를 떼어내면 터진 부위는 발그레 붙지만, 주변 피부가 물에 불은 듯 허옇게 들떠 버린다. 그러면 너슬너슬한 피부가 개운치 않아 가위로 잘라내곤 한다. 그런데 이것이 되풀이되다 보니 피부가 얇아져  민감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에는 좀처럼 원상 복구되지 못하고 손끝이 계속 헐어있다.    

 

지난 1-2년 간 손톱에 백화가 생기며 손톱선이 자꾸 내려가 손톱이 줄어들고 있다. 궁리 끝에 일종의 무좀이 아닐까 생각하고 잘 듣는 무좀 약을 발라도 별 소용이 없다. 발 무좀에는 금방 효과를 나타내는데 내 손끝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습진약도 발라 보았으나 별 반응이 없다. 답답해 약국에 가서 환부를 보여주며 상의를 했다,   

  

“처음에 무좀약을 써보신 것은 맞는 거였어요. 무좀과 습진 약이 다 안 들으면 요즈음 복합약으로 나오는 피부약이 있는데 한번 써 보세요.”    

 

크게 기대는 못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 사다가 며칠 발랐지만 역시 별 반응이 없다. 내 풍월상식으로는 무좀약과 스테로이드 습진약이면 피부약은 거의 다 써본 셈인데 낫지 않으니 큰 기대를 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약으로 고치기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포기했다. 그리고서는 대책 없이 지내고 있었다.     


“유전이야” 이런저런 임시 조치를 취하곤 하지만, 손끝이 아플 때마다 어머니가 늘 “야, 눈물이 쏠쏠 나오는구나.”라고 아파하시던 생각이 난다. 아플 때마다 ‘나도 유전이구나’라는 생각 때문인지, 그때그때 신경 좀 쓰이다가 괜찮아지곤해서인지 꼭 고쳐야겠다는 생각은 못했던 것 같다.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있으니 고쳐질 리가 있겠는가? 이러한 유전에 대한 관념이, 유전병 진단을 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작용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한겨울에 계속 악화되는 손끝을 보며 얼핏 엄습하는 가벼운 두려움과 함께 ‘이걸 어떻게 고치지?’하는 생각이 문득 떠 올랐다. 정말 처음으로 하는 진지한 질문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몇 년 전 등의 가려움 때문에 피부과를 찾았을 때 내가 아마 평생 잊지 않을 의사의 확실한 명 코멘트가 떠 올랐다.     


“피부는 첫째도 보습, 둘째도 보습, 셋째도 보습’이에요.”     


그럼 ‘보습제를 열심히 바르자.’ 손 끝에 보습제 바르기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도 그 오랜 시간 겨울마다, 눈물이 쏠쏠 나오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낫도록 열심히 바르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방울 약통에 보습제를 채워서 여기저기 두었다. 언제라도 손 끝에 자극이 오면, 바를 수 있게 준비를 하고 정성껏 바르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나도 큰 차도가 없던 중 하루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반창고를 붙이고 상처가 회복되면 물에 불은 허옇게 된 피부들을 가위로 잘라내곤 하였다. 이미 부르터 떨어져 있는 것이니 더러움 끼지 않게 없애는 것이 낫다는 변명과 함께 잠시 개운한 느낌에 이 습관을 계속해왔다.  그런데 그날은 아무런 죄가 없어보이는 이 작은 습관을 살펴보게 된 것 같다. 아마 '안 되겠다.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한 게 아닐까?     


우리 피부는 하나의 커다란 보자기라는 것을 떠올리면 이 작은 순진한 습관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자책하게 된다. 건드리지 않고 두면 터진 피부들이 서로 붙어 금방 아물 텐데 물에 불었다고 잘라내곤 하였으니 보자기가 찢어지기만 한 게 아니라 구멍이 뻥뻥 나버린 것이다. 겉 피부가 잘려 나갔으니 그 밑의 얇은 피부가 외부 자극에 그대로 노출되고 민감해진다. 이를 생각지 못하고 가위로 잘라 내고 청소됐다고 개운해 하였으니 말이다. 그러고서는 자르기 버릇을 결별하였다.      

이제 보습을 정성껏 하기 시작한 지 두 달 정도 되지 않었을까? 지금은 손끝이 거의 동그스름하게 아물어 있다. 아직 완전히 덮지 못한 표피층 피부가 있지만 이대로 가노라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좋아지지 않고 지금 상태에서 유지된다고 해도 보습제 좀 열심히 바르면 큰 문제없을 것 같다. 많이 매끄러워진 손끝을 바라보며 결국 ‘무지가 병’이구나. ‘유전이 아니다. 무신경이 병이다.’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유전이에요.” 라는 말은 환자에게는 과학적인 의미 이상으로 들린다. 감기 자꾸 걸리면 호흡기가 약한 유전이고 소화가 잘 안되면 소화기가 약한 유전인데 세상에 유전 아닌 병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손끝 트는 것조차 유전인데. 과학적 관점에서 유전이라고 하지만  환자가 들은 이 말은 ‘고칠수 없어요’라는 선고로 들린다. 철문이 쾅 닫기는 소리로 들린다.    

 

손 트는 것, 유전 때문이 아니다. 단순한 보습문제다. 문이 끽끽거리면 기름 좀 치면 금방 부드러워지지 않는가? 여기 신경 좀 써 달라는 신호일뿐이다. 듣기 싫은 ‘끽끽’ 소리가 문에서 계속 나는데도, 눈물이 쏙쏙 나오게 아픈데도 신호에 귀 막고 있으니 문제가 커지는 것이다. 끽끽거리던 문은 결국 찌그러져 고칠 수 없게 되어 큰 일이 되고 헐어버린 피부도 손대기 힘들게 될 것이다. 이렇게 커져 버린 일들은 곳곳에서 우리를 지치고 힘들게 만든다.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철학은 그런 지치고 혼란된 우리의 마음을 오랜 세월 보듬어 주고 치유해주는 가르침이었다. 그렇다고 무위자연이  엄청나게 크고 깊은 구름처럼 높은 지혜라기보다 지금 현재의 문제에 귀 기울이고 응하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무위無爲는 인위人爲가 없음을 말하며 즉 자연이고 순리이다. 빨간 신호면 멈추고 파란 신호면 가는 것이 순리이고 자연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들어오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으며 반응하는 것이 자연이고 무위라고 생각한다.      

(원고지 17.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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