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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Mar 15. 2024

축구, 끌어내는 자와 끌려가는 자

축구를 재미있고 수준 높게 즐기는 법: 끌어내는 자와 끌려가는 자



축구를 즐겨 보는 사람들이라면 경기 한 시간 전에 확인하는 게 하나 있다. 양 팀의 선발 라인업이다. 선수마다 전문 포지션이 있으므로 선발 라인업은 곧 포메이션을 의미한다. 포메이션을 파악하면 감독이 이번 경기를 어떤 콘셉트로 맞이할지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표팀이 442로 나왔다면 조규성과 손흥민을 투톱으로 두고 황희찬이 왼쪽에서 돌파를 시도하겠다는 의도가 짙다. 이 경우 중앙에 미드필더 하나를 뺐으므로 박스 안에서의 공격력을 그만큼 강화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거, 아마 많이 보셨을 게다. 저작권: KFA


하지만 이건 경기를 읽는 아주 기초적인 소양이다. 포메이션은 조직의 형태를 설명할 뿐, 조직의 운영 방식을 모두 담아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봐야 경기를 정확하게 볼 수 있을까? 모든 축구는 공간과 압박의 싸움이다. 우리가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편 골대 가까운 곳에서 공간을 점유하는 게 좋다. 당연히 상대는 이 공간을 내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 어떻게? 촘촘하게 대열을 구축하거나, 상대 선수들에게 뛰어가 압박을 시도한다.      

축구는 발로 하는 스포츠다. 손보다 정밀도가 떨어지는 탓에 공격 성공률이 그리 높지 않다. 수비하는 쪽이 좀 더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버스 두 줄 세우기를 안티풋볼이라 부르는 것도 그래서다. 동시에 축구는 골을 넣어야 이긴다. 상대가 버스를 세우든 압박을 하든 이를 벗겨내고 공간을 점유해야 이기기 쉬워진다. 어떻게? 움직임으로 상대를 끌어내거나 밀어내야 한다. 그리고 이게 모든 빌드업의 시작과 끝이다.   

   

이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잘못된 경기 해석을 할 수도 있다(물론 해석 그 자체는 자유다). 단순 팬이라면 어떤 해석을 하든 상관없다. 하지만 지도자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가장 좋은 예는 2022년 9월 고양시에서 열린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이겠다. 당시 대표팀은 442에 가까운 형태로 나왔다. 양쪽 풀백인 김진수와 윤종규가 상대편 박스 앞까지 오버래핑을 하며 공격적으로 나왔다. 공격적으로는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역습 과정에서 2 실점을 했다.      



포메이션 위주의 경기해석이 오류를 만드는 이유



당시 팬들은 양쪽 풀백의 위치를 지적했다. 지나치게 높게 올라가 측면이 비었고, 이를 코스타리카의 양쪽 공격수들이 노렸다는 것이었다. 포메이션의 틀에서 보면 이 지적이 맞다. 하지만 포지션 별 움직임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윤종규가 골라인까지 올라가면 권창훈이 박스 대각선 방향으로 침투했고, 그 뒤를 정우영이 커버해 줬다. 현대축구의 기본 교리인 풀백-윙포워드-수비형 미드필더의 스위칭 플레이가 정상적으로 가동됐다. 풀백과 윙포워드가 위치를 바꿔가며 측면에서 공격작업을 하면 3선 미드필더는 바로 뒤에서 빈 공간을 커버하거나 잠시 들어와 수적 우위를 확보한다. 그 뒤에는 센터백이 2중으로 커버를 한다.


측면 공격수-수비형 미드필더-풀백의 삼자 스위칭 플레이에 기반한 경기 운영이었다. 이는 해당 경기에서 대표팀이 현대축구의 교범에 맞는 플레이를 구사했음을 보여준다.  


저작권: KFA, TV조선


그렇다면 2 실점의 원인은 뭔가? 코스타리카가 후방에서 빌드업을 하면 황의조와 손흥민이 압박을 하러 달려 나간다. 이러면 우리측 대열이 벌어진다. 이 자리를 코스타리카의 3선 미드필더가 점유한다. 이들을 다시 압박하기 위해 황인범과 권창훈이 뛰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상대 측면 공격수들에게 큰 공간이 생긴다. 좌우로 크게 반대전환 패스를 넣어 주기만 하면 바로 패널티박스까지 어렵지 않게 전진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선수들이 너무 순진하게 끌려 나온 탓이다. 포메이션의 문제점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 라인을 구축할지, 어느 시점에서 압박을 나올지 판단하지 못하면서 생긴 문제였다. 이게 실점의 원인이다.


결국 한끗 차이다. 성공하면 압박, 실패하면 유인당한 수비다.      


저작권: SPOTV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자. 아까 말했듯 빌드업은 상대를 끌어내고 밀어내는 작업이다. 이 분야에서 요즘 가장 핫한 지도자는 브라이턴&호프 알비온의 데 제르비 감독이다. 우선 센터백인 덩크나 벨트만이 공을 잡는다. 그리고 서서 기다린다. 상대편 공격수는 어리둥절하다 공을 뺏으러 달려온다. 이러면 상대편 공격수와 미드필더 사이가 벌어진다. 그 자리를 수비형 미드필더 그로스와 길모어가 점유한다.      


그럼 상대편 미드필더가 이 둘을 마크하기 위해 따라 내려온다. 순간 그로스(또는 길모어)가 '이때다!' 하며 에스투피냔이나 미토마에게 패스한다. 이 둘은 높은 지역까지 드리블을 시도한다. 자연스레 수비라인은 이들을 막기 위해 주저앉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웰백과 페드루, 마치가 박스 안으로 침투한다.      



끌어내기와 밀어내기. 빌드업의 시작과 끝



경기를 좀 더 쉽게 보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공을 잡은 선수 맞은편을 보면 뜬금없이 수비수 하나를 끼고 달려가거나, 슬금슬금 위치를 바꾸는 선수들이 보일 것이다. 수비수가 그들을 잡으러 끌려 나가면 빈 공간이 생긴다. 그러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진다. 



이런 움직임은 문전 앞에서 훨씬 빠르고 긴박하게 이뤄진다. 2006년 독일 월드컵 1차전 토고와의 역전 골, 많이들 기억할 것이다. 공을 잡은 박지성이 중앙 미드필더 하나를 유인해 끌고 들어가다 우측으로 위치를 바꾸는 안정환에게 슬쩍 흘려준다. 이로써 안정환은 수비수로부터 벗어나 슈팅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정말 놀라운 사실 하나 더: 박지성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센터백과 센터백 사이로 침투한다. 안정환 또는 조재진이 박지성에게 패스를 했을 가장 위협적으로 받아낼 있는 곳이다. 동시에 안정환의 슈팅이 골키퍼에게 막혔을 세컨드 볼을 가장 확실하게 받아낼 있는 위치이기도 하다)


여기서 하나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박스 앞 조재진의 움직임이다. 안정환의 슈팅 각도가 나올 수 있게 수비수를 좌측면으로 밀어버리고 있다. 슛은 정확히 그 각도로 꽂혔다. 좌우 스위칭과 포스트플레이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약속된 빌드업 패턴이었다. 포메이션은 빌드업을 담는 그릇일 뿐, 이런 움직임까지 설명할 순 없다. 경기를 읽으려면 선수들이 수비수들을 끌어내기 위해 시도하는 반복적 움직임, 즉 빌드업 패턴을 읽어야 한다.      


득점력은 떨어지지만 감독들이 고집스럽게 선발하는 스트라이커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 이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스트라이커는 다른 포지션에 비해 공을 잡는 횟수가 현격히 적다. 그런데 누군가가 스트라이커에게 '움직임이 좋다'고 말한다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반대로 좋은 수비는 공격수의 유인에 끌려 나가지 않는다. 대형을 유지하면 그만큼 수비 성공률이 늘어난다. 그걸 선수들이 모를까? 당연히 안다. 하지만 끌려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달려가서 막아야만 할 것 같은 딜레마를 조성하는 것이 공격수, 그 움직임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이 수비수의 역할이다. 모든 축구의 수 싸움이 여기서 시작된다.         


잊지 말자. 누가 끌어주고 밀어주는지. 그리고 누가 끌려 나가는지. 이걸 아는 순간 경기가 훨씬 재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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