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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Dec 16. 2024

우리가 본 것은 의지

오래 전 책장에 묵혀 둔 전공 책을 꺼냈다


사회계약론의 토대는 기독교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에서 생명은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고 확대하며 번식하는 속성으로서 정의한다. 자살이 죄악이자 금기인 건 그래서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기 이전에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다. 더불어 탄생과 사멸은 신의 관할이다. 피조물이 감히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비도덕적이다.      


로크가 상정한 자연상태에는 이러한 시각이 뚜렷이 녹아 있다. 그는 자연법 개념을 설명하며 ‘자살을 지양하고,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며,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대원칙으로 전제한다. 즉, 우리의 헌법도 이러한 생명관에 근거한다.


이건 헌법이 개인의 생명권을 보호하는 것과는 맥이 조금 다르다. 사회계약론에 등장하는 생명관은 국가가 자신의 권력 기구를 바라보는 시각, 즉 ‘국가관’을 형성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국가는 하나의 ‘몸’으로 상징되는데, (아까도 말했듯) 생명체는 발전하고 번영하고 번식하고 발양하는 속성을 가졌다. 지금의 서구 민주주의 체제 역시 그러하리란 당연한 가정 하에서 모든 것이 출발한다. 이 세계관에 따르면 국가는 국가 자신과 구성원의 발양을 전제로 존재한다.  


근데 이 세계관이 통째로 박살 난 적이 있었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이다. 이 나라의 헌법 역시 기존의 기독교적 생명관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근데 이 나라의 국민들은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나치즘)를 광적으로 지지했고, 끝내 바이마르 공화국에 스스로 사형선고를 내린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민들은 자발적 투표를 통해 민주주의를 폐기했다. 자신들의 의지로 자유와 권리를 내팽개쳤다. 그렇다. 체제도 얼마든 자살이 가능하다. 그게 민주주의라면 더 그렇다. 이것이 다수의 뜻이라면, 민주주의의 자살은 언제든 가능하다.  


재밌게도 전후 서구의 민주주의 헌법에는 이 체제적 자살에 대한 안전장치가 여전히 없다. 권력자의 전횡을 막는 헌법적 안전장치들도 언제든 없애는 게 가능하다. 그게 주권자들의 뜻이라면 말이다. 전체 의원의 3분의 2가 찬성하고 국민의 절대다수가 (장기간) 지지하면 된다. 그러면 지금의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완전히 다른 체제로 바꿔버리는 게 가능하다. 그게 공산주의든 나치즘이든 말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국민들 절대다수는 독재를 지지하지 않는다. 약 20%에 가까운 사람들은 그런 듯하지만, 다행히 다수는 그렇지 않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살짝 뒤집으면 보인다. 헌법과 제도가 우리를 보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우리의 의지로 지탱된다. 즉, 민주주의는 오직 구성원들의 의지에 의해서만 굴러가는 것이고, 어쩌면 사실 그것이 전부인 체제다.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는 어떤 것도 아닌, ‘우리는 이 길을 가겠습니다’라는 선언과 그 실천인 셈이다.      


우리가 지난 11일 동안 본 것은 아마 대한한국 민주주의의 생명력이었을 것이다. 이 생명력은 민주공화국을 지지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의지에서 나왔다. 동시에 우리는 20%의 권위주의 지지자들이 체제적 자살을 부르짖는 것 또한 함께 지켜봤다. 민주주의 체제의 면역이 아직 잘 작동하는 걸 보며 안도하면서도, 광기가 전염병처럼 번지는 건 늘 순식간임을 곱씹어본다. 나도 내 의지를 보태야겠다.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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