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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Dec 22. 2022

우울할 때는 수영을

나와 맞지 않는 대상과 거리 두기

        

두 달 남짓 만에 수영 강습에 나갔다.

추석 즈음 찾아온 감기는 점령군처럼 내 몸을 차지하고 한동안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감기가 찾아왔을 무렵 나는 수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두 달 전 데시벨이 꽤 높은 소란 끝에 강사가 바뀌었다. 새로 온 강사에게서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예전에 갈등을 겪다가 오전반으로 옮겨 가게 했던 강사와 닮은꼴이었다. 안 좋은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그는 무례함을 친화력으로 이해했는지, 할머니뻘 되는 회원에게까지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했다. 회원들을 지칭할 때는 손가락질을 하며 "여기! 여기!"라고 했다. 그렇다 해도 강습 능력이 무례한 태도를 덮을 만큼 뛰어나다면, 그런 흠쯤은 너그럽게 넘어가 줄 수도 있다. 우리는 수영을 배우러 온 사람들이니까.

그는 우선 칭찬과 격려보다 좌절감을 심어주는 강사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 그리고 그는 회원의 나이나 체력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선수 훈련 시키듯 쉬지 않고 뺑뺑이를 돌렸다. 스컬링과 발차기를 하고 나면 30분이 지나 있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의 자신감의 근원인 잘생긴 얼굴과 훤칠한 키와 근육질 몸매에 모든 걸 용서하기로 했는지 첫날부터 그를 열렬히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이쯤 되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고 모든 손가락이 나를 가리킬 수 있겠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도 내 판단을 반신반의하며 그의 무례한 태도와 스파르타식 강습법을 참고 꾸역꾸역 강습에 나갔다. 강압적인 태도로 무시를 하든, 반말로 소리를 질러 대든 나는 나대로 운동하러 왔다, 하는 마음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내린 결론은 그의 성격이나 강습 방식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인이 좋다고 해도, 나와 맞지 않으면 그걸로 끝인 거 아닌가.


나는 무례한 사람은 거르고 본다. 자기애가 강해서 주목받는 걸 좋아하고 사람들을 자기 방식대로 통제하려는 유형 역시 내게는 어려운 존재다. 그는 그 두 가지 유형 모두에 해당했다.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 있다고 아줌마다운 너그러움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내 체력으로는 벅찬 강습 방식이 결국은 체력 향상에 도움이 되고 수영 실력을 끌어올릴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내가 강습에 가기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운동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 거 아닌가?), 강습 시간 내내 온몸에 힘이 들어가다 보니 몸살이 나고, 그래서 며칠씩 연달아 결석을 하게 된다는 것(하루 운동하고 몸살 나서 며칠 쉬는 것보다 내 체력에 맞게 매일 운동하는 게 낫지 않나?), 그리고 무엇보다 점점 수영이 싫어진다는 것(이건 더 말할 것도 없다. ), 그런 이유만으로도 강습에 나가지 않을 결심을 하기 충분하다고 본다.     

 

당분간 수영 강습을 쉬는 대신 헬스를 하고 가끔 요가 수업을 들었다. 지상 운동은 편안했고 안전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두 달 넘게 수영과 멀어진 생활을 하다 보니 내가 수영을 할 수 있을까 싶은 게, 자신감이 떨어져 갔다.

그러던 중 그 수영 강사가 개인적인 일로 한시적으로 쉬고 그 기간에 다른 강사가 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다시 수영을 시작했다가 또 감기가 찾아올까 봐 좀 망설였다. 그리고 기온이 조금 올라간 어느 날 비장한 마음으로 수영복을 챙겼다. 수영이 조금 그립기도 했다.

새로 온 강사는 앞의 강사와 정반대 편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 말은 우선 예의가 발랐다는 얘기다. 당연히 존댓말을 썼다. 영법에 대한 설명을 시범과 곁들여 열정적으로 했는데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가 예의 바르고 열정적으로 하는 만큼 나도 그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눈을 맞추며 설명을 들었으며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다.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도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이라 궁합이 중요한 것 같다.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의 최선을 끌어낼 수 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수영장에 들어가니 몸이 기억하고 있던 동작이 나왔다. 물은 두렵고 어려우면서도 동시에 포근하게 내 몸을 감싸 안아주기도 한다. 오랜만에 운동다운 운동을 했다는 것을 손목에 찬 워치의 기록이 알려준다. 무려 550Kcal를 소모했단다. 나를 칭찬한다.      


얼굴에 수경 자국과 수모 자국이 남은 채로 밖으로 나선다.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 몇 시간 전의 얼굴이 아니다. 혈색부터 바뀌어 있다. 요즘 들어 무기력하고 우울했는데 마음에 머물던 그림자도, 습관이 되어 버린 자기 비하도 사라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된다.

다시 수영예찬론으로 돌아왔다. 수영과 거리를 둔 기간 동안 내가 다시 수영을 시작할 수 있을까, 나와 수영은 맞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만 가득했는데. 역시 사람은 몸을 움직여야 하는가 보다. 몸을 움직이기까지가 높은 능선을 넘는 것처럼 힘들어서 그렇지.  (202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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