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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Jan 03. 2023

2023년도 다이어리

잠든 소비 욕구에 불을 지핀 물건

   

퇴직한 후 소비와 멀어진 생활을 하고 있다.

퇴직 후 1년 정도 지나고 깨달은 것은,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건이 몇 가지 안 된다는 거다.

옷을 예로 들자면, 계절이 금방금방 바뀌다 보니 계절별로 자주 입는 옷은 서너 벌 정도이다. 격식을 갖춰 입고 나갈 만한 모임도 없고, 외출이라고 해 봐야 문화센터, 글쓰기 수업, 친구와의 만남 정도이고 보니 늘 입는 편한 차림으로 나간다. 운동하러 갈 때는 말할 것도 없다. 어쩌다가 직장 다닐 때 입던 옷을 입게 되면 이런 옷을 어떻게 입었나, 싶게 불편하다. 편한 걸 선호하다 보니 사계절 내내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 익숙해졌다. 봄가을엔 긴 팔 티셔츠에 청바지, 여름에는 짧은 팔 티셔츠에 청바지(아주 더울 때는 원피스를 입기도 하지만), 겨울에는 그 위에 패딩을 걸치면 그만이다. 신발은 옷차림에 걸맞게 항상 운동화이다.


소비는 꼭 필요해서 하는 경우보다 심리적인 기제가 작용해서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마음에 구멍이 났을 때 새 물건을 사면 그 순간만큼은 자신도 새 물건처럼 반짝거리는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고양되는 기분을 느끼는 건 물건을 구매하는 그 순간뿐이다. 그런 점에서 소비는 현실의 누추함을 일시적으로 잊게 만드는 저강도의 마약 같은 거 아닐까.

퇴직 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져서인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마음의 공백이 채워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구매욕구는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일주일에 한 번 문화센터 수업 때문에 백화점에 가도, 진열된 물건들이 내 눈을  일은 없다. 꼭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 계획을 해서 쇼핑을 하거나, 가끔 지하 1층 매장에서 와인을 구매하는 정도이다.


구매욕이 사라진 이유 중에는 집안을 채우고 있는 짐에 대한 부담도 있다. 물건은 사서 들여놓으면 그때부터 짐이 된다. 하나를 사면 하나는 버려야 된다. 사실 버릴 게 너무 많은데 엄두가 안 나서 미루고 있다. 20년 넘게 산 아파트 구석구석을 묵은 짐이 차지하고 있다.

물건은 마음의 짐이다. 법정 스님은 우연히 소유하게 된 난 화분에 애착을 갖게 되면서, 물건에 대한 애착이 집착을 낳고 집착은 번뇌를 낳는다는 진리를 깨달으셨다는데(겨우 난 화분 두 개에!), 나는 온갖 종류의 소유물을 무겁게 지고 사니 번뇌의 무게가 어마어마하다.

한때 이사를 할까 생각했을 때도 짐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직장 생활 하며 입었던 옷들과 책장의 오래된 책들, 주방의 안 쓰는 그릇 등 쌓인 짐들은 집안 곳곳에서 자기 존재를 주장하며 집주인 행세를 해 왔다.

새해 다짐 리스트에 매일 안 쓰는 물건 한 개씩 버리기를 넣어야겠다.     

     



그런데 얼마 전 모처럼 나의 잠든 구매욕을 자극하는 물건을 만났다.

문화센터 수업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교보문고로 올라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매대에 진열된 다이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다이어리가 시선을 붙잡은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새해를 앞두고 뭔가 거창한 다짐으로 다이어리를 사서는 한 달 치도 안 쓰고 버려두는 일이 반복된 건 이미 오래전 일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다이어리를 사지 않게 되었다.


2022년이 저물어 가던 지난 연말 희미한 위기감이 올라왔다. 작년 한 해는 내 일신만을 생각하면 큰 사건은 없었지만, 마음이 불안정한 해였다. 작은 일에도 소소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하반기에는 이유 없이 몸이 아프고 무기력해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그러다 보니 노년을 향해 다가가는 자신을 의식하는 일이 많았다. 호랑이 등에 탄 것처럼 앞뒤 안 보고 정신없이 산 젊은 날은 순식간에 멀어져 갔고 허허벌판에 늙은 여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문제의 무기력은 불규칙한 생활습관에 젖게 만들었고, 그 결과 긴장감 없이 푹 퍼진 내 모습을 대면해야 했다. 나는 억지로라도 자신을 다잡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전까지 관심 밖이었던 다이어리가 눈에 들어온 것도 그런 맥락 위에 있다. 나는 한참 동안 서서 다이어리 내지를 들춰 보고 내게 맞는 양식을 생각하면서 오랜만에 들떴다. 작심삼일이 예정되어 있는 들뜸이라 해도 좋았다. 다이어리는 무기력한 내게 주는 맞춤한 선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다이어리 코너에 서 있었지만, 계산대로 들고 가지는 않았다. 집의 책장 어딘가에 꽂혀 있을, 연도에 상관없이 쓸 수 있는 다이어리가 떠올라 나를 제지했기 때문이다. 살까 말까 할 때는 안 사야 한다는 말이 마지막으로 나를 붙잡았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과연 두 페이지만 쓰고 고이 꽂아둔 아담한 사이즈의 갈색 표지 다이어리가 있었다. 내지를 살펴보니 구성도 괜찮았다. 그런데도 마음이 흔들렸다. 내 마음은 지면마다 새해의 날짜가 선명하게 인쇄된 새 다이어리로 하염없이 기울고 있었다.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거기서부터 남은 인생이 멋있게 채워진다. 너무 크지 않은 과제를 주고 하나라도 정성스럽게 수행하는 나를 보고 싶었다. 2023년의 하루하루를 다이어리에 가감 없이 기록하고 싶다는 욕망이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그것도 2023이라는 숫자가 선명히 박힌 새 다이어리에. 마침 손에 들고 있던 낡은 다이어리의 표지에서 갈색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왔다. 너무 오래 보관한 탓에 표지의 접히는 부분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나는 이때다 싶어 자기 합리화에 성공했고 다음날 바로 다이어리를 사러 갔다. 친구의 것까지 두 권을 샀다. 그리고 다이어리를 사 온 그날부터 오늘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의 사건과 단상을 기록하고 있다. 다음날 해야 할 일과 실행 여부도.

하루하루가 소중한 날이다. 다이어리를 채워나가듯 오늘을 흡족하게 채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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