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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Feb 12. 2023

단상들

일기 몇 토막

새해 첫날, 알람 소리에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몸이 꾀를 부리기 전에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아파트 후문을 나서니 두꺼운 외투와 모자, 장갑으로 무장을 한 사람들이 축제 행렬처럼 한 방향을 향해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그 행렬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선 사람들이 일제히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 연보랏빛이 도는 하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다렸다. 이미 날은 밝아오고 있었고, 일기예보는 맑음이던데 혹시 구름 뒤에 숨어 있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붉은색도 노란색도 아닌 분홍이었다. 하늘을 캔버스 삼아 누군가 미묘한 색의 물감을 섞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삐죽이 고개를 내민, 반달을 엎어 놓은 것 같은 그것. 순간 박두진의 시 ‘해’의 구절이 떠올랐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그랬다. 해의 얼굴은 맑고 정갈했다. 앳되고 순수했다.

그것은 지구의 자전 운동에 따라 똑같은 태양이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지식 따위와 별개의 현상이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하나의 이벤트였다.

진분홍의 고혹적인 그것은 조금씩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내며 점점 원의 형태에 가까워졌다. 하늘 가운데 자리 잡은 다음에야 그것은 우리가 아는 연노랑 빛으로 몸을 바꾸고 세상을 밝게 비추었다. 환한 조명이 들어온 것 같았다. 저렇게 자그마한 것이 세상에 빛을 주어 하루를 열게 하고, 그것이 떠 있는 동안 인간들은 활동을 한다. 저마다의 애환을 지닌 채.

이제 완전히 광안대교 교각 아래로 당당하게 몸을 드러낸 해를 오래 바라보며 속으로 소망하는 것들을 떠올렸다. 꽤 간절한 마음이 되었다. 사람들은 돌아서서 해를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싱싱한 해처럼 신선한 마음들이다.

돌아가실 때 시차를 두고 안전에 유의하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혼잡하지는 않았다. 해가 하늘 위에 안착하고 사위가 완전히 밝아지자 사람들은 왔던 길로 줄을 지어 돌아갔다.


이전에는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한라산이나 동해 같은 먼 곳으로 밤을 새워 이동하는 사람들이나, 춥고 어두운 새벽에 집을 나서서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 똑같은 해이고 그냥 반복되는 자연 현상일 뿐인데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이제 사람들에겐 그런 이벤트가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이 알겠다. 똑같은 일상, 만만치 않은 하루하루의 틈바구니에서 그런 이벤트는 잠시 멈춰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의미가 있다.

나도 뭔가가 절실했나 보다. 퇴직 3년째인 2022년은 마음이 좀 힘들었다. 친구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은 내 마음에도 영향을 미쳤다. 작은 일들에도 마음이 요동쳤다. 하반기에는 오래 몸살을 앓았다. 늙어가는 과정이라는 심증이 들었다. 요양병원에 2년째 누워 계시는 엄마가 늘 마음 한 귀퉁이에 박혀 있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엄격한 자기 검열과 그에 따르는 자기 비하가 나를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해댔다. 연말이 되자 이제는 좀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죽비처럼 나를 쳤다. 달라지기 위한 몇 가지 다짐을 스마트폰 메모장에 메모했다. 실행에 옮기기 어렵지 않으면서도 변화를 위해 절실한 항목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맞게 된 새해 첫 아침, 나는 해를 보러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나를 칭찬해 주기로 한다. 이제 별것 아닌 일에도 나를 자주 칭찬할 것이다. 몇 가지 계획이 실천하기 쉬운 것들로 채워진 이유이다. 결국은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로맨스 소설에서처럼 준비되어 있지 않다. 늘 듣는 말이지만 자신을 사랑해야 타인도 사랑할 여유가 생긴다.



     

마음으로 직진해 들어와 꽂히는 말을 라디오에서 들었다. 행복은 동영상보다는 사진에 가깝다는 말. 순간을 남기는 한 컷의 사진처럼, 행복은 오래 변함없이 지속되기보다 행복했던 순간들이 가슴에 인화되어 남는 것. 맞아, 그렇지, 깨달음이 왔다.

     



얼마 전 친구와 2박 3일의 여행에서 돌아와 집을 둘러보는데 내 안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괜찮아. 괜찮아.”

정확히 두 번 반복해서 들려왔고 나는 그걸 복기하듯 소리 내어 발음했다. 이건 간증도 아니고, 신비주의 체험도 아니다. 절박하게 내면의 ‘나’가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던 거지.     

    



퇴직한 직후에는 제자들이나 전 직장 동료들이 간헐적으로 보내오는 소식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제자나 전 직장 동료라는 틀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 통으로 다가온다. 스벅에서 글을 쓰다가 오랜만에 소식을 알려온 제자의 카톡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내게는 오래되고 깊은 인연뿐만 아니라, 수영 강습 회원들, 문화센터 회원들,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들, 보통 사람들이 있다.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앞으로 내가 쌓아가고 싶은 가치이다.

천태만상인 사람들 중에 나와 맞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내가 까다롭고 별나서만은 아니다. 그래서 나와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만나면 잡아야 한다는 게 요즘 드는 생각이다. 수영 강습 회원 중에 나에게 자주 친절과 호의를 보이는, 69세 된 언니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른다. 그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친화력 만렙에 소녀 같은 명랑함을 장착했다. 누구에게도 벽은커녕 성근 그물조차 치지 않고 넓은 품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부지런해서 아침 수영에 골프 연습, 저녁 요가까지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을 한다. 나이가 되면 누릴 수 있는 장점, 시간의 여유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어느 날 요가를 하고 나와 정수기 앞에서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는 중에 그 반전이 찾아왔다. 그가 오랜 세월 힘겨운 시집살이를 했으며 시어머니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몸의 이상 반응으로 나타나 뚜렷한 병명이 없이 많이 아팠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몇 년 전에야 시어머니를 분가시켜 드렸다. 고령의 시어머니는 혼자 사실만큼 건강하고 별난 성격도 그대로인데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 음식을 해서 들여다본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던 다른 요가 회원과 내가 눈을 크게 뜨며 의외라고 하니, 그는 웃으며 다들 그런 반응을 보인다고 했다.

그의 남다른 친화력과 공감 능력의 근원을 알 것 같았다. 아픔을 겪은 사람은 타인의 아픔에 더 잘 공감하고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다. 고통의 몇 안 되는 효용 중 하나다.     




글은 생각의 지도이다. 흐릿하고 형체가 없는 생각이 글을 쓰면서 분명하게 살아난다. 글은 어쩌면 글을 쓰는 나나 내 생각과는 다른, 또 다른 선로를 가지고 있다. 생각과 나란히 가는 또 다른 선로. 그런 면에서 모든 글은 허구라는 말이 맞다. 소설만 허구가 아니라 에세이도 넓게 보면 허구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매일의 일상은 논리도 없고 플롯도 없다. 무질서하고 중구난방이다. 그걸 앞뒤 말이 되게 구성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 글쓰기이다. 화살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붙잡아 의미화한다. 글을 쓰지 않으면 생각은 진전될 수 없다.     




아주 가끔 어떤 일을 할 때 효율이 최대치로 끌어올려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침전물이 가라앉듯 불안이 가라앉고 영혼도 맑은 물속에 고요하게 침잠하는 상태가 된다. 그럴 때는 외부에도 음악을 포함한 일체의 소음이 없고, 내부도 스스로가 내는 소음으로 시끄럽지 않다. 신이 준 명상의 순간. 나는 아무 걱정도 불안도 없이 깊은 잠영을 하는 기분이다. 심해의 물고기처럼.

문화센터 수업을 하고 온 날 밤 스케치북을 펼쳐 그리던 그림을 조금 더 그린 뒤에 방으로 들어와 책을 펼친다. 까마득한 추억처럼 이번에는 독서의 리듬에 올라탄다. 단어와 문장 사이에서 걸림이 없이 단어와 문장 위 5센티 정도의 고도에서 동공과 뇌가 같이 달린다. 수면에 닿지 않고 미끄러져 가는 고속 페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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