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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Jun 03. 2023

첫 전시회를 마치고

'나'와 잘 지내기

문화센터 그림 강좌에서 전시회를 연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귀찮다는 것이었다. 전시회에 출품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그림 실력을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고, 어떤 목적을 정해두고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데 본능과도 같은 저항감이 일었다.      


그저 그림 그리는 시간이 좋았다. 표정 없는 사물들이 내 손끝에서 나만의 형태로 살아나는 걸 보는 기쁨이 컸다. 그림 그리는 시간은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몇 안 되는 때다. 요가할 때 호흡과 아사나에 집중하다 보면 금세 한 시간이 지난 걸 알아차리듯, 캔버스 앞에 앉으면 두 시간이 축지법을 쓰기라도 한 것처럼 훌쩍 지나가 버리곤 했다.

그렇게 취미로 시간을 죽이려 했을 뿐인데 무려 전시회를 연다니.

.

게다가 선생님이 전시회 출품용으로 추천해 준 견본 그림은 한눈에도 너무 어려워 보였다. 들일 노력에 비해 잘 그렸다는 평을 받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그런데도 마음 약한 나는 내가 선택한 한층 단순하고 밝은 그림 대신, 선생님이 추천한 복잡하고 어두운 그림을 받아 들고 스케치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내 예감이 맞았음을 확인해야 했다. 그렇다고 다른 그림으로 다시 시작하기에는 그동안 들인 품이 아까워 꾸역꾸역 붓질을 했다.

제출 마감 일주일 전에는 딸을 보러 서울에 다녀오느라 하루를 남겨놓고 급하게 마지막 손질을 했다. 어쨌든 다음날 내 그림은 다른 수강생들의 그림과 함께 화방으로 갔다. 수강생들의 그림 실력은 들쭉날쭉했다. 미전 수상 경력이 있는, 그림 경력이 오래된 선배의 그림부터 나보다 늦게 시작한 수강생들의 그림까지 전시회장에 나란히 걸릴 것이었다.     


전시회 날이 되었다. 애초에 나는 출품한 작품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리 선생님이 가르치는 세 군데 센터 회원들이 출품한, 합쳐서 이십여 개의 액자가 걸리는 벽면의 한 귀퉁이를 내 그림 하나가 차지하게 될 그 행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전시회 오픈 날은 문화센터 수업이 있는 날과 겹쳤다. 나는 앞서 말한 이유로 수업에 출석해서 그림만 그리고 오려고 했다. 그런데 내 유일한 동기인 J 언니가 전시회장에 같이 가자고 자꾸 부추겼다. 첫날인데 선생님을 봐서라도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수강 기간이 짧아 작품을 내지 않은 수강생 두 명까지 모두 네 사람이 선생님 차로 부평동에 위치한 전시장까지 가게 되었다.

     

운전해서 가는 동안 선생님은 제자들을 차에 태우고 가는 일은 처음이라며 생색을 넘어 다소 불쾌함을 담아 말한 데 이어, 점심시간을 넘긴 시각이라 식당으로 바로 오라는 총무님과의 통화 내용을 전하는 J 언니에게, 전시회가 중요하냐, 밥이 중요하냐, 정색하고 화를 내어 네 명의 수강생을 가시방석 위에 앉혔다. 선생님의 예술가다운 까탈스러움에 대해서는 이미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나는 그러려니 했는데, 조수석에 앉은 J 언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황을 넘어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 남편이 그런 성질머리를 갖고 있다면(사실 남편도 만만치 않은 쪽이라 나는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 문제가 되겠으나, 일주일에 한 번 보는 그림 강사의 까탈스러움이 문제가 될 게 있겠는가,라고. 강사로서 매 수업 시간 강의실을 돌면서 수강생들의 그림을 하나하나 보고 각자에게 필요한 점을 맞춤해서 코멘트해 주며 깨알 같은 지식을 전수해 주는 실력을 갖추었으면 된 거지, 강사의 성격까지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과 함께 전시회장에 걸린 그림들을 보고 식사까지 하고 헤어졌다. 전시회장은 위치도 좋았고, 아담하나 깨끗해서 기대 이상이었다. 우리 센터 수강생들의 그림은 이미 봐서 알고 있었고, 다른 센터 소속 수강생들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서 또 배웠다. 내게 없는 장점을 발견하고 내 부족한 점이 뭔지 알게 되었다. 다음에는 어떻게 시도해 봐야겠다, 이런 생각도 하고. 역시 모든 경험은 그게 뭐든지 안 하는 것보다 해보는 게 낫다. 도둑질 빼고 다 배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전시회는 처음이라 마음에 적잖이 부담이 되었고,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을 기일에 맞춰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고, 그냥 어떤 행사를 한다는 것 자체에 귀차니즘이 발동했었는데, 전시회를 끝낸 지금은 참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 친구, 동생이 멀리까지 와서 축하해 줬다. 새삼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꼈다. 전시회 준비를 하면서 사람들과도 더 잘 알게 되었다. 특히 J 언니와는 당번을 같이 서면서 편하게 수다를 떨었는데, 상대방에 대한 호감은 단번에 삶의 한복판으로 이야기를 나아가게 했다.      




사실 나는 얼마 전 선생님으로부터 은밀한(?) 제안을 받았다. 선생님 작업실에 나와서 따로 그림을 배우라는 제안이었다. 우리 문화센터 수강생 중 수상 경력을 가진 고수 한 분을 포함해서 두 사람이 선생님 작업실에 나가고 있다고 듣기는 했다.

그 제안을 받은 날은 강의실에 통로를 찾기 힘들 정도로 수강생이 꽉 찬 날이었다. 수업 종료 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 나갈 때에야 유일하게 설명을 듣지 않은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았다. 선생님은 끝난 분들은 가도 좋다고 한 뒤에 마지막으로 내 그림 앞에 앉았다. 그때 칭찬에 후한 편이 아닌 그의 입에서 너무도 직설적인 고백(?)이 흘러나왔다. 나는 ○○○님의 그림이 좋습니다. 머릿속에서 샤랄라랄라 배경음악이 깔렸다. 이어서 그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작업실에 나오라고 했다.     

자존감이 평균보다 한참 떨어지고 의심이 많은 나는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 작업실 수강생을 하나라도 더 받으려는 거겠지. 그 다음주 수업이 끝나고 몇몇 수강생과 선생님이 백화점 6층 중식당에서 밥을 먹고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실 때, 그가 이번에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민망할 정도로 여러 번 나를 칭찬했다. 칭찬은 고래뿐 아니라 나처럼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도 춤추게 한다.      


그림 선생님에게는 다소(많이) 까탈스러운 성격을 덮어버리는 강의 실력 말고도 또 하나의 장점이 있다. 한 번씩 감탄을 유발하는 명언을 무심하게 던진다는 거다.

한 동료 수강생이 지나가다가 내가 그리고 있던 그림을 보고 잘 그렸다고 말했을 때였다. 그가 말했다.

그 그림은 잘 그린 게 아닙니다.

순간 싸늘한 적막이 흘렀다. 이어서 그가 말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잘 본다는 겁니다. 저 그림은 잘 본 겁니다.

최근에는 이런 말도 했다. 누군가 재능에 관한 얘기를 꺼냈을 때였다.

오래 하는 게 재능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게 바로 재능이라는 말은 자신감 없는 내게 용기를 주었다.     




퇴직 후에 오래전부터 미뤄놨던 일들을 한다. 좋아서, 재미있어서 하는 일은 아무도 못 말린다. 어떤 목표를 이루고 성과를 내기 위해 재능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재능의 유무와 상관없이 좋아서, 재미있어서 하는 일은 쉽게 질리거나 포기하지 않게 한다. 나 자신의 만족이 목적이 되니 그럴 수 있다. 나는 그저 어릴 때 재미있어했던 일을 기억하고 늦게나마 소환한 것이다. 그전에는 그림 그리기가 이렇게 기쁨이 되리라고 상상한 적이 없다.     


일렬로 선 줄을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듯 상급학교에 가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했다. 결혼 후에는 직장 일과 육아와 가사 일을 병행하며 거기에 쉽지 않은 시댁과의 관계까지, 헤쳐나갈 일들 속에서 허우적댔다. 그 일들이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엄청난 부하가 되는 일이라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야말로 정신없이 젊은 날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

나이 육십이 되어 ‘나’라는 친구와 새로 사귀는 기분이다. 그 친구와 계속 잘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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