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을 알면 진짜 보수가 보인다
평생 경찰로 헌신하다 정년 퇴임한
안천순 씨는 방림동 허름한 건물 지하에
자그마한 글방을 마련했다.
예전 단란주점이 있었다는
적색 벽돌로 된 어두컴컴한 밀실에는
안천순 씨가 쓴 여러 편의 시가 편액 되어
걸려 있었다.
안천순 씨가 쓴 시는 치열했던 80년대
금남로 시위 현장을 지키던 형사의 연민과
안타까움을 담은 작품도 있고,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도 있다. 제작진을 맞이한 그는
그 작품들에 대해 한참을 설명했다.
순간순간 평생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을 내비친 그는
일흔 가까운 나이에도 단단한 근육과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천상 형사였다.
마침 아들도 현직 경찰로 재직 중이란다.
젊은 시절, 시위 현장에서
무전기를 들고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진 한 장이 그의 인생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듯했다.
벽 한 귀퉁이 귀목에 걸린 '천치'라는
문구의 뜻을 물어보는 것에서부터
인터뷰가 시작됐다.
(인터뷰는 2018년 4월 27일
오전 10시부터 1시간 남짓
진행됐다)
정년 할 때 후배 하나가
“형님 글 쓰는 방 만드실 때 호를 하나
새기시죠?” 하더니 저 귀목을 선물했어요.
그래서 바보 천치같이 살아야겠다.
그래서 천치라고 이름을 저렇게 지었는데.
PD 중의적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어떤 의미인가요?
안 다 잊어버리자 하는 거예요.
금남로에서 겪었던 일 중에서
가장 참혹했던 것은 더 생각하지 말자.
PD 80년 5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안 동부경찰서 형사계에서 근무했어요.
그리고 시위 진압부대에 편성이 돼서
제가 그땐 키도 크고 덩치도 커서
맨 앞에서 막았었어요. 가장 선두에서.
PD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
안 저는 동부경찰서 소속 진압부대예요.
젊은 사람들을 차출한 것이죠.
도청 앞. 옛 광주은행 사거리,
서현교회 쪽과 태평극장 앞에서 막고
그랬었죠. 그다음에 조선대학교
건널목 철길 (지금은 없어졌습니다만)
철길을 경계선으로 해서,
저쪽에선 학생들이 밀고 내려오고
저희는 거기서 못 내려오게 막았었죠.
제일 선두에서 했어요.
PD 5월 18일 이전부터 그랬었나요?
안 18일 전에도 거의 집에는
못 들어가고 길거리에서 자고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웠었죠.
경찰들이 파김치처럼 지쳐있었어요.
15일인가 16일인가,
그때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말하는 '민주 성회'가 열렸고요
횃불 시위가 있었지만 비교적 평온했어요.
군중은 많이 모였는데 끝날 때도
비교적 질서 있게 평온하게 끝났었죠.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계엄군이 들어오면서부터
격화되기 시작했었죠.
당시 상황을 증언한 일선 경찰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쓰는 단어가 있다.
평. 온.
시위가 있었으나 평온했다는 것이다.
시위와 평온. 어울릴 수 없는 두 단어를
굳이 같이 사용한 이유가 뭘까.
5.18 이후의 상황이 전쟁터와 같아서
이기도 했지만, 문제가 없던 광주에
왜 계엄군이 투입됐나-
왜 광주를 아비귀환으로 만들었나-
억울함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PD 18일 이후에 시위가 격화됐고 체감한 때는?
안 공수부대들이 우리 경찰봉보다 훨씬 긴
나무 방망이로 두드려 패고. 우리들은
학생들이나 시위대가 던지는 돌이 무서워서
빨리 피했는데. 마구잡이로 쫓아가면서
진압을 하더라고요
공수부대가 투입되기 전과 후를 비교하자면
전은 비교적 평온했어요.
시위는 많았는데 평온했어요.
이전 상황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한
평화적인 토론과 발표가 주된 일이라면
계엄군이 들어온 뒤로는
조직적으로 이쪽 골목에서 나타나서
저항하고 쫓으면 도망가고
또 반대편에서 나오고.
소위 학생들의 시위가 조직적이고
전투적으로 변했어요.
그리고 20일 저녁 광주역 앞쪽에서
총 맞은 시신이 금남로로 들어오면서
무장하자는 쪽으로 바뀌었어요
그리고 21일이었던가요?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다가 출근을 하면
오라고 해서 거기를 벗어났죠.
PD 당시 현장에 계셨잖아요. 그때도
계엄군이 너무 과격하단 생각이
드셨었나요?
안 그랬죠. 저 새끼들 봐라, 저거,
왜 애기들을 저러냐. 야 저 누구 조카다-!
광주는 좁아요. 저 새끼들이 우리 아기들
다 죽이려 그런다, 그러면서 시민들이
급속히 집결했죠.
공수부대가 들어오기 전에는 학생들
위주였고 시민들은 한 발짝 떨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커진 겁니다.
PD 당시 진압하는 것을 보고 어떠셨나요?
안 저건 아니다. 국민의 군대가
왜 국민을 마구잡이로 죽이냐
저거는 아니다-라고 생각을 했었죠.
저도 분노를 했어요.
총으로 막 정조준해서 쏠 때는
저도 총이 있었으면 (공수부대) 쪽에 대고
쏘고 싶더라니까요.
경찰서 앞에 2층에 진주 다방이 있었어요.
저희들은 공수부대가 발포를 한 후에는
후퇴를 해서 경찰서 정문만 막고 있는데
2층에 있는 진주 다방 주방장이
옥상에서 고개를 내밀면서
"너희 빨리 안 내려가냐" 항의했는데
땅! 소리가 나더니 그냥 죽었어요.
거기서 총 맞아서.
또 예술의 거리 경찰서 앞을 지나는데
땅! 소리 나더니 시민이 다리에
총 맞아서 저희가 끄집어다가
병원에 보내고 했죠.
PD 경찰과 군인의 역할분담은 어땠습니까?
안 계엄군 투입된 뒤로는 경찰은 없었어요.
계엄군이 잡아서 경찰에 인계해주면
호송해주고 했어요. 경미하다 싶으면
현장에서 돌려보냈던 일들이 있는데.
돌려보냈단 이유로 경찰 간부가 구타를 당했던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까 경찰은 없었어요.
그저 모든 것을, 모든 시위를 막고 하는
통제는 그 사람들이 했어요.
PD 당시 총기 소산과 관련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안 그때 안병하 국장께서 18일인가 19일에
31사단으로 총을 전부 다 쏟아내라고
이야기를 하셨어요.
저희들은 연일 계속되는 시위 진압 때문에
파김치가 되어 있는데 또 무기고에서
총 끄집어내서 막 쌓고 하는 게
귀찮더라고요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 경찰의 역할
(2017년 10월, 전남지방경찰청)에 따라
총기 소산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광주권 2개 경찰서 무기․실탄 및
비밀문건 소산 완료
(5.19. 22:00)
* 무기(경찰국 대공분실) / 실탄(담양서)
/ 비밀문건(화순서) / 유치인(나주서)
경찰국․1중대․118중대 무기를
CAC(전교사) 병기 창고에 입고
(5.21. 09:36)
*화순 무기고 소산 조치 지시
(5. 21. 11:18)
*각 경찰서 무기고 소산 지시
(5. 21. 15:46)
*총기는 노리쇠, 공이 제거 조치하여
안전한 곳에 묻고 노리쇠와 공이는
별도 보관
근데 20일부터 총에 맞은 시신이
나타나고 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하는 것을 보면서
'맞다. 우리가 총을 갖고 있었으면
우리 보고 쏴서 막으라고 그랬을 텐데
나중에 이 사건에 대해서 덤터기를
경찰이 통째로 다 썼겠다.
이것은 안병하 국장님이 최고로
잘한 일이다.'
광주 시민과 전라남도 도민들한테
경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신 것이다- 했었죠.
근데 만약에 총이 있었다면
시민을 향해서 쏘지 않고 계엄군을
향해서 쏘는 일들도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광주사람이고, 전라도 사람인데
외부 군인이 와서 그렇게
무자비한 살상을 하는 것을 보고
분노를 안 느낄 수가 없었죠.
결코 생각하기도 싫은 장면들이에요.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5.18이 끝난 뒤에
한 4~5년 동안을 환청 때문에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당시 김 XX 내과에서
수면제 들어간 처방도 받았죠.
또 송 xx 외과에 아침에 가서
링거 주사 맞고는 미회수된 총기를
찾으러 돌아다니고 그랬었죠.
그전까지는 선생님들같이
머리숱도 참 많았어요, 아주 괜찮았어.
근데 그 뒤로 머리가 욱신 다 빠진 뒤로
더 빨리 탈모가 온 것 같아요
(일동 숙연)
지금까지도 아주 어렵습니다.
PD 총을 미리 옮기지 않았다면
정말 끔찍한 상황이네요?
안 그러니까 옮기지 않았다면
경찰이 무장했을 것이고, 군부가
경찰한테 총을 써서라도 진압하라고
했으면 경찰이 발포했을 겁니다
계엄군이 발포했던 것은 싹 덮어지고
모든 책임은 경찰이 몽땅 뒤집어
썼을 거예요.
4.19 혁명 때도 마찬가지죠.
경찰이 총괄 책임을 졌던 것 아닙니까?
안병하 국장께서는 그러했던 것들을
미뤄 짐작하시고
우리는 무장할 수 없다, 총 다 반납했다.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소산을
하셨던 것 같아요.
PD 당시 경찰이 조금 더 시민을 배려한
진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뭘까요?
지역 연고를 둔 분들이 많아서일까요?
안 맞아요.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했던 시위에서 횃불이 나왔어도
해산할 때는 길을 밝히는 역할이었지
공격을 하고 불을 지르기 위했던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진압은 유연히 해산하고
질서를 확립하는 쪽으로 갔지.
그걸 적으로 생각하고 진압을 한 것이
아니고 우리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PD 또 하나 논란이 된 게 21일
계엄군이 도청을 빠져나갈 때
경찰들이 오합지졸이었다는 논란이
있었는데 그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안 경찰이 오합지졸이라 그러는데
솔직한 이야기로 경찰이 방망이 높이
들어서 때리는 장면이라도 사진 찍어서
나오면 그 방망이 든 직원은 죽습니다.
그것이 경찰이었어요.
저희들요 건너오는 주먹밥을
나중에 보면 시 껌 해요.(까매요의 사투리)
그걸 먹고 버텼어요.
근데 오합지졸이네 뭐네 하는데
군인들이 안 들어왔더라면 오합지졸이
아니었다니까요.
결국은 공수부대가 들어와서
불을 지른 거예요.
PD 21일 이후엔 어떤 상황이었나요.
안 경찰서를 비우고 귀가해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저는 경찰서 지명수배 철이라고
있어요. 그것은 없어지면
안 되는 내용이에요.
이렇게 두꺼운 것이
다섯 권인가 여섯 권인가 되는데
그놈을 싸 짊어지고 집으로 갔어요.
집에 갖다 놓고 저는 경찰서에
나와 있었어요.
경찰서를 비우지 않고 계속
지키고 있었어요.
PD 그때 시민들이 경찰을 대하는
태도가 어땠습니까?
안 그때는 경찰들하고 아주 좋았어요.
경찰서에 있으면 김밥도 가져다주고
시위대와 같이 경찰서를 지켰어요.
경찰서에 들어오려고 그러면
손대지 말라고 같이 있던 시민들이
그렇게 해서 경찰서를 지켰었죠.
5.18 마지막까지도
경찰하고 시민들이나 학생들하고
충돌은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시골(전남 일부 지역)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경험으로는 없었어요.
아주 저희들을 보호해줬지
저희들에게 해코지하는 것은 없었어요.
PD 앞서 잠깐 언급해주셨는데
안병하 국장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안 그분은 광주시민과 전라도민한테
경찰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PD 특히 어떤 부분에서?
안 경찰 무기를 군으로 보내버린 것
경찰이 총을 들지 않게 하셨던
것만으로도 광주 시민과
전라도민들한테 경찰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PD 5.18 이후 시위 현장에 있었나요?
안 네 그 뒤에 했어요.
PD 오랫동안 시위 현장에 계신 걸로
아는데 가장 효과적인 시위 질서 유지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안 제가 87년도에 정보업무를 하면서
재야 운동권, 5.18 단체, 학생시위를
전담했어요.
근데 80년 이후로 87년까지 5월이면
시내 거리가 다 막혀버려요. 시위대 쫓고
최루탄 쏴서 쫓고, 그러면 저쪽에서
막아 버리고 경찰이 또 쫓아다니고
광주 시내가 전체가 막혀버려요.
"그래서, 이건 아닙니다.
80년도에 총 맞아 죽고, 방망이에 맞아
죽고 다친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행사를
한번 하겠다는데 막아야 될 이유가
뭐 있습니까- 하게 해 줍시다-"
"해주고 나서 나중에 끝날 때
충돌 없도록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집회 시위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제가 경장 땐데 상사들에게 막 대들고
따지고 들고 그랬어요. 도와달라고 하고..
그래서 88년도에 그러면 한번 해보자.
그래서 첫 번째로 도청 앞에서 공식적으로
허용된 행사를 하게 되죠.
그때 저쪽에 유동까지 사람이 다 찼어요,
근데 금남로만 막혔지 다른 데는 전부다
차가 소통이 됐어요,
그래서 저는 1987년부터 2000년까지
소위 집회 시위문화를 정착시키는 쪽으로
가자- 그 방법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명지대생 고 강경대 학생 노제 때도 그랬어요
그 시신이 내려올 때 제가 총괄을 했었어요.
북부 경찰서에서 막다가 못 막고
"광주은행 사거리에서 노제를 지냅시다.
끝나면 그대로 계림동, 서방으로 해서
망월동까지 운구하는 걸로 합시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렇게 주최 측과 협의했어요.
실제로 광주은행사거리에서 강경대의
노제를 지냈고 그 옆에서 정보형사가
무전으로 그 상황을 알렸어요.
얼마든지 대화로 가능하단 이야깁니다.
문익환 목사님이 석방돼서 나오셨어요.
화랑궁 식당에서 모임을 가지시는데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파악해서
보고하라고 오더가 떨어지더구먼.
그러면 프락치를 갔다가 심을 것입니까.
난 그건 못한다고 했어요.
직접 가서 기다렸어요.
내가 확실히 인사를 하면서
저는 동부경찰서 정보과에 근무하는
경사 안천순입니다.
목사님이 오셔서 하신 말씀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했다-라고 일목요연하게
보고하는 것이 오해를 안 삽니다.
앞, 뒤에 딱 잘라버리고 가운데만 살려서
마치 이북을 찬양하는 듯한
그 말만 딱 꼬집어내게 됩니다.
제가 제대로 보고를 하겠습니다,
참석하게 해 주시겠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나서
이렇게 훑어보시더니
"좋다. 네 말이 맞다. 네 말이 맞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된 보고를 해라"
그래서 공식적으로 참석자들처럼 회비 내고
가서 밥 먹고 목사님 하시는 말씀
그대로 듣고 나왔어요.
나중에 그 양반이 별종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어요, 별종.
고인이 되신 윤한봉 씨가 귀국해서
저를 찾았어요
80년 이후 광주 재야 운동권이 됐든
학생운동이 됐든 모든 것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싶다-고 했더니
여러 사람들이 동부경찰서에 근무하는
안천순을 만나면 될 겁니다-그랬다고
연락이 와서 만났어요.
만나서 한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그분이 그러시더구먼,
"지금까지 공안기관이라고는 만나지도
않고 꼴도 안 보던 사람인데,
안 선생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없을 것이오."
저는 다 툭 터놨어요.
다 끄집어내서 다 보여주면서
아까 말했던 대로 한 부분만을 가지고
용공으로 몰아세우는 짓을 안 했어요.
PD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시위에 대응하는
방법이 두 갈래인 것 같아요.
강하게 진압해야 된다. 오히려 미국 같은
선진국은 그렇게 한다. 반대로, 평화적으로
시위 집회를 허용하는 게 효율적이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안 경찰은 샌드위치예요
한쪽에선 법을 강조합니다.
법대로 처리해라 법대로 해라.
그런데 민중들은 덕치를 주장을 해요.
법과 덕 가운데 샌드위치 돼 있는 것이
경찰입니다.
그런데 최소한의 법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시위대를 만나면 여기까지가 한계다.
더 이상은 물러날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절충을 하자.
너희도 명분을 쌓고 우리도 명분을 쌓고.
그전까지 화염병과 돌멩이가 날아오고
우리는 최루탄을 쏘고 한바탕 해요.
그러고 나서 잠깐 내가 들어가서 저쪽
운동권 집회 시위 주최자 나와라.
그리고 우리 경찰 서장, 정보과장 만나서
주선을 하게 해서 풀어내고 그랬죠.
말씀드렸던 대로, 폴리스 라인이
설치되면 존중해줘야 합니다.
최소한의 것을 지켜줘야만이
덕치도 가능한 일이에요.
안병하 국장은 6.25 전쟁에 참전해 남침을
저지했고 간첩 소탕에 앞장섰다.
냉정하게 보면, 군인과 경찰이라는
공권력 집행 기관이 그러하듯
체제를 수호하는 역할이었다.
5.18 당시 시위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긴 것도 확전을 막기 위한 선제적 조치였다.
시위대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고 북괴를 규탄하며
태극기를 들고 총알이 빗발치는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시위의 목적이
본질적으로 체제 수호에 있다는 걸
알리는 신호였다.
또 당시 일선에 있던 경찰들도
과잉진압을 탓하지만 그 결이 좀 다르다.
과잉진압이 질서 유지에 방해가 됐다고
지적한다. 방점이 질서 유지에 찍혀 있다.
강경진압과 평화 시위 허용 중에
어느 것이 더 질서 유지에
효과적이냐고 반복적으로 물었던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그들은 변수 발생을 최소화하는
평화 시위가 질서 유지에 더 효과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 당연한 상식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게
38년 전 광주에서의 일이고,
신군부가 자행한 만행이다.
하지만, 자칭 한국 보수는
헌정 질서를 어지럽히고 보수의 참 가치를
무너뜨린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을
여전히 원로로 숭상하고 은연중에 그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친일 반공 이데올로기와 천박한 물질주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출세주의에
눈이 먼 결과다.
그런 이유에서 한국 사회에서 보수- 진보
세력이 극한 대립한다는 말에 반대한다.
한국에 진짜 보수가 있는가?
단언컨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의 대혁신을 바라고 그게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면,
80년 5월, 안병하 국장과 전남 경찰들,
그리고 겨레의 통일과 자유민주주의 가치 수호를
위해 거리로 나온 광주 시민들의 숭고한 희생을
바로 알고, 그 위민정신을 계승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