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그리고 일의 기쁨과 슬픔
가족만 아니면 이놈의 회사 당장 때려치웠다
일의 고단함이나 관계의 피로함이 홀로 감당할 수준을 넘었을 때 자조 섞인 투로 내뱉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가족이 없어도, 회사를, 당장, 그만 둘, 용기를 내긴 쉽지 않다는 것을.
실상은, 연차를 쓰면서도 상사의 의중을 살피는 게 현실 아닌가.
나 같은 경우 고작 아빠 육아휴직 6개월을 냈을 뿐인데도 큰 격려를 받았다.
격려 이면에 드리운 걱정 어린 시선 또한 무겁게 다가왔다.
그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회사의 의중을 면밀히 살폈어요?"
이처럼 법적 권리조차 사용하기 힘든데 계엄령 하에서 군부 독재자의 지시를 거부하는 건
얼마나 힘겨운 일이었을까.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안병하 치안감의 부인 전임순 여사를 처음 뵌 건 2016년 5월이었다.
남산타워 바로 밑 좁은 골목 반지하 단칸방에 살고 있었지만
세간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고 말투와 행동에서 품격이 느껴졌다.
군더더기라곤 벽면 곳곳에 걸린 30년 전 남편의 사진들뿐이었다.
취재가 끝난 다음엔 기어코 갈비탕 한 그릇을 사 주면서 광주 음식과 비할 바가
못될 거라며 미안해하셨다. 품이 참 넓은 분이었다.
2018년 5월 다큐멘터리 <민주경찰 안병하> 취재를 시작하면서
86세가 되신 여사님을 다시 뵀다. 남편에 관한 기억만큼은 또렷했다.
힘이 느껴졌다. 일종의 버티는 힘 같은 거였다.
옛 전남도청 주변과 경찰 사택에서 한 번, 후암동 자택에서 한 번 더 인터뷰를 했다.
후암동 반지하 단칸방. 안병하 치안감 영정 사진 아래 마주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
전임순 여사 곁에는 아들 호재 씨가 있었다.
간혹 인터뷰가 끊기면 전후 상황을 친절히 설명해줬다.
매번 느끼지만 순하고 선한 분들이었다.
1933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8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전임순 여사.
규모가 큰 출판사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해방 이후 서울 용산 원효로 쪽으로 이사했다.
아버지의 사업 수완이 좋았던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기를 지냈지만
수도여고 2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해 가까스로 대구로 피난을 갔다.
안병하 대위를 만난 건 1951년 부산 삼촌 댁에서였다.
전 1951년 처음 만났을 때 안 국장님이 몸이 안 좋아 부산 육군병원에 있었어요.
그때 제 삼촌이 경찰이었거든요. 예전에 노량진 파출소에 있었고,
안 국장님이 노량진에서 (광신 상고)를 다녔대요. 잘 아니까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었어요.
(고교)를 졸업하고 나니까 결혼하자고 한 거예요. 대학에 다녀야 하니까 안 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제가 서울로 올라와서 육군 본부에 전화했나 봐요. 전화를 받더니 최전방 15사단에서 나왔더라고요
그때를 계기로 부모님의 승낙을 받아(1953년) 속초 중학교 강당에서 결혼을 했어요.
전 말없이 뭐든지 바로 실천하는 성격이거든요. 잡담하는 것도 싫어해요.
보통 부지런한 게 아니에요. 관사에 있을 때도 새벽에 일어나면 마당을 다 쓰니까 다른 관사 가족들이
자기 남편한테 뭐라고 그런대요. ‘저렇게 감찰부장은 마당도 쓸고 부지런한데 당신은 왜 안 하냐’고.
부하 직원한테도 잘했어요. 언젠가 지프차 타고 서울에 오는데 겨울에 눈이 잔뜩 와서 지프차에서
바퀴가 하나 빠졌대요. 바로 옆이 낭떠러지예요. 겨우 죽음을 면했는데도 기사한테 아무 말도 안 해.
무슨 잘못을 해도 손짓만 하지 소리 한 번 안 질러요. 화가 나도 소리를 안 질러요. 생전 소리 지르는 걸
못 봤어요. 아마 우리 애들도 아버지한테 욕먹어본 적이 없을 거예요.
전 훈장 많이 받았죠. 최고 훈장도 많이 받았어요 압록강에서 후퇴할 때 가랑잎 속에서
사흘이나 있었대요.
안병하 중위가 속한 6사단 7 연대 1대대는 압록강으로 진격한 최초의 부대였지만,
중공군에게 퇴로가 막혀 병력 76%가 전사했다.
안병하 중위는 가랑잎 속에서 사흘을 숨어 지내다 간신히 탈출했다
처음 부산에서 만났을 땐 피도 토하고 그랬어요. 무척 고생한 거 같아요. 이런 얘기도 동료들이나
자세히 이야기하지, 정작 본인은 말을 안 해요. 여러 가지 훈장을 탄 것도 뒤늦게 남들한테 들었어요.
한편, 안병하 중위는 춘천과 음성 전투의 공으로 각각 화랑무공훈장을 받아 1계급 특진했고,
1968년 경찰 총경 시절엔 서귀포 침투 무장간첩 체포 육상작전을 지휘해 화랑무공훈장 등
5개의 훈장과 중앙정보부장 표창을 받았다.
특히 춘천 전투 당시 포병 관측 장교였던 안병하 중위는 적의 정확한 위치를 포대에 알려
북한군 주력부대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 전투를 계기로 국군은 군을 재편해 지연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고 단기간 내 남한을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전략도 실패했다.
전 방에 있는데 여섯 사람이 왔어요. 길재원, 오치성 등 6명이 와서 옛날 국가재건 최고회의에 가서
일하자고 해요. 그런데 “군인이 무슨 정치를 하느냐”라고 딱 거절했어요. 이후에 보니까 그들은
국회의원도 하고 다들 한 자리씩 했죠.
육사 8기는 5.16 쿠데타의 주역으로서 김종필, 길재원, 오치성, 윤흥정, 이희성 등
70-80년대 한국 현대사를 쥐락펴락한 정치 군인들을 배출했는데, 5.18 당시 윤흥정은 전남북계엄분
소장이자, 전교사령관으로 안병하와 조우했고, 이희성은 계엄사령관으로서 안병하에게 발포 명령을 직접 지시했다. 이희성과 안병하는 모임을 같이하며 가족들과도 친분이 있었지만 발포 명령을 거부했단
이유로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전 안 국장님은 신경을 안 써요. “남들 다 하고 난 뒤에 하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만 생각해요. 자기 맡은 임무에 대해서 불평을 한 적이 없어요. ‘남들은 어디를 보내 달라-’ 로비를 하는 것 같은데 가면 가는 대로
그리고 무조건 자기가 맡게 된 보직에 대해서는 만족해요. 반면 ‘(인사 청탁)할 수 있는 걸 왜 신경을 안 쓰느냐’ 그게 늘 제 불만이었어요. 그때는 본인만 원하면 얼마든지 됐거든요.
전 안 하세요. 듣고만 있고 아마 골프장도 몇 번 안 갔을 거예요. 좀 운동하라고 해도 항상 시간이 없는 거예요. 서장 할 때는 밤낮 서를 지키고, 국장할 때도 그렇고. 명절 때는 더 집에 안 들어와요.
남들과 달리 우리 가족들은 같이 밥 먹는 게 부러웠다고요.
전 혹시나 사고 생길까 봐 집에 오시지 않아요. 한편으론, 참 가정적이에요.
집에 들어오시면 다 살피고 그래요.
전 그때(61년) 경찰 총경 시험이 있다고 했어요 본인이 대대장(중령)도 했고, 여러 조건에 해당되니까
시험 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시험 결과 발표나던 날, 다시 가면서 사진 찍은 게 이 사진이에요.
애들이랑 다 같이 나왔거든요. 원효로에 집이 있었거든요, 근처 사진관이 있으니까 기념으로 사진 찍자고
61년 경찰에 투신한 안병하 총경은 부산 중부경찰서장, 서울 서대문경찰서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첫 부임지인 부산 중부 경찰서에서 경찰관들의 비리 장부를
모두 불태워버리고 처벌 대신 만회할 기회를 준 건 유명한 일화다.
1968년에는 서귀포에 침투한 무장공비를 소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워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1971년 젊은 나이에 경무관으로 승진한 안병하 국장은 치안국 소방과장, 방위 과장, 강원도 경찰국장,
경기도 경찰국장을 거치며 1979년 2월 20일, 마침내 전라남도 경찰국장으로 발령받았다.
2018년 5월 13일, 전임순 여사와 아들 호재 씨가 광주를 찾았다. 80년 당시 전남 경찰국과 관사가 있던
지금의 아시아 문화전당 주변을 함께 둘러보았다. 당시를 회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했으며
때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하기도 했다. 인터뷰는 중간중간 이어졌다.
전 광주 온다고 하면 경찰로선 두렵잖아요. 신경 많이 써야 하니까. 처음엔 경남으로 발령 난 것 같은데 전남에 가겠다고 그래요.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무에만 충실하니까 어딜 가든지 걱정이 없다!
안 아버님이 다른 관사에 계실 때는 닭을 키웠어요 그런데 이곳은 주택가라서 강아지 2마리만 키웠어요
워낙 동물을 좋아하셨거든요. 취미가 엽전이나 우표, 골동품 모으기였어요. 서울에 계실 때는 고물상을
돌아다니면서 오래된 물건을 사 오곤 하셨어요.
전 남보다 책임감이 특출나요. 뭔 일이 있어도 생전 소리 지르고 화내는 법이 없어요.
더 화가 나면 더 침착해요. 남보다 조금 다르다고나 할까. 화낼 법도 한데 화를 안내요. 말없으면 속으로
화를 냈다는 걸 저만 알죠. 당황하는 법이 없어요. 그래서 5.18 때도 냉철하게 대응하지 않았나 싶어요
전 이곳에 있을 때 경찰 가족 모두와 사이좋게 지냈어요 다들 친절해서 가족들과 자주 만나게 된 거예요
함께 야유회도 갔어요. 다른 지역에선 그런 게 별로 없었는데 여기선 가족과의 모임이 많았어요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게 관사 마당에 나물을 따다가 먹더라고요 저도 그걸 배워서 요리했어요.
또 하나는 시설이 낙후돼서 관사 변소도 재래식이에요. 부뚜막에서 불을 때더라고요. 그런데 고칠만한
형편이 안 되어서 제가 사람만 내보내라고 해서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고치고 부엌도 입식으로 바꿨어요
전 정년을 앞두고 있는 어르신들이 같은 종씨라고 굉장히 공손히 인사한다고 감동하셨어요
광주 사람들은 정이 많다고 만족스러워하셨는데요. 5.18만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전 진급 발표 날 때가 됐는데 안 하고 있더라고요 이미 1년 반을 재직했으니까 발령 나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거든요 제가 치안본부로 들어가자고 그랬어요 국장님은 ‘진급도 되지 않았는데 창피하게 거길 가겠느냐 ‘
그랬어요. 그렇게 5.18을 맞게 됐죠.
안병하 국장이 전남 도경국장으로 오게 된 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순경에서 시작해 치안본부장,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충남도지사,
조달청장, 내무부 장관까지 지내며
대한민국 경찰의 전설로 불리는
안응모 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사장의 자서전 <순경에서 장관까지>에는
안병하 국장과 인사 발령이 뒤바뀐 사연이 나온다.
그 사연대로 만약 안응모 이사장이 광주에 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광주 시민들로선 안병하 국장을 만난 게 행운이 아니었을까?
(내가) 전남경찰국장으로 가는 내부 결재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그다음 날 가보니 충남경찰국장으로 바뀌어 있었다.(알고 보니) 압력과 청탁이 줄을 잇자
(내무부장관이) 발령지를 서로 뒤섞어 놓은 것이다.
내가 전남경찰국장으로 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한순간이 운명을 바꾼 것이다”
- 안응모의 책 <순경에서 장관까지> P.161 -
전 관사가 바로 앞에 있으니까 특별히 올 일이 없었죠. 그때야 국장님이 늘 사무실에서 주무셨죠.
5.18 직전에도 12일 만에 집에 들어오셨어요. 17일로 기억하는데 그때 들어와서 ‘이제 데모 안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주무시는데 갑자기 비상이 걸렸어요. 그래서 계엄령이 선포된 걸 알았죠.
전 5.18이 발발하기 며칠 전 전두환이 광주에 극비리에 내려와서 “선배님-” 하면서 악수를 건네더래요.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결국 서울에는 안 갔어요. 그때 서울에 갔으면 이야기 다 했겠죠.
전 18일 아침에 경찰 가족들이 일찍 관사로 왔거든요 그래서 우리도 나가보자고 (전남) 대학교 앞에 가니까
군인들이 있고 학생들이 밖에만 있어요. 분명히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간다고 약속을 했거든요
그런데 군인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까 돌팔매질을 하더라고요. 파출소에다가 돌팔매질을 해서 유리가
깨졌어요. 그래서 이거 큰일 났다, 그런데 오후 2시 공수부대가 들어온다고 해서 군인이 오면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군인들이 내리자마자 곤봉 같은 걸로 막 때리니까 그 자리에서 피투성이가 되더라고요.
그런 애들을 질질 끌고 차에다 싣고 가요, 이게 진짜 큰일이구나! 이럴 수가 있나 싶었어요.
그걸 보는 부모가 가만히 있겠어요?
그래서 광주 사태가 더 크게 일어나지 않았나 생각했어요. 사실, 18일 저녁에 전화가 빗발쳤어요.
학생들이 죽었다는데 사실이냐고 그래서 죽기는 왜 죽냐고, 지금 비상시국이니 학생들 내보내지 말고
잘 단속하세요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았어요. 그래서 19일 아침에 시장으로 가본 거예요.
아줌마들이 자식들이 죽어 가는데 우리도 다 들고일어나자-는 소리를 제가 들었어요.
그때는 우리 관사 전화만 서울과 통화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급하게 서울에 갔어요. 치안본부장, 경찰청장이죠. 찾아가서 광주 사태가 절대로 진압되지 않습니다. 경찰의 문제니까 어떤 조치를 해달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무 소리도 안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사흘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기다리면 어떤 명령이
갈 것이라고 그때 아, 치안본부장님도 아무것도 못하는구나 느꼈어요. 계엄령이니까.
전 20일 날 관사에 가정부와 순경이 남아있었어요. 잠시 후 전화가 왔어요. 경찰 4명이 사고로 죽었다고,
20일 밤, 도청을 지키던 함평경찰서 경찰 4명이 시민군이 몰던 버스에 치여 사망했다
그래서 아, 기어이 그랬구나 싶었어요. 21일에 우연히 국장님과 통화하게 되어서 “경찰관이
4명이 죽었다는데 국장님은 바빠서 어떻게 신경 쓸 것도 없는 거 같네요, 대신 제가 (함평)에 내려가서 경찰관들 장례라도 돕겠다” 고 했더니 “여기가 어디라고 내려오려고 하느냐!” “애들이나 잘 붙잡고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일이 제대로 벌어졌구나! 이제 어쩔 수 없구나!" 느낀 거예요.
이후 안병하 국장과의 연락이 완전히 끊기고 초조하게 광주 소식을 기다리던 5월 26일 오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26일 광주(송정) 비행장에서 전화가 왔어요.
서울로 지금 출발한다고, 서울로 오시나 보다 했는데 집에 안 와요.
치안본부장한테 가서 ‘국장님이 안 오시는데 어떻게 된 거냐’ 했더니 아무 말도 못 해요.
그래서 체신부 장관에게 갔어요 5.18 당시 전남북계엄분소장이었던 윤흥정 씨가 21일 체신부 장관으로
발령이 났더라고요. 가서 따졌어요. ‘경찰이 뭘 잘못했느냐, 군인들이 저질러 놓고 왜 우리가 잘못했다고
연행됐나!, 소식이나 압시다’라고 했더니 집에서 기다리라고 소식이 갈 거 라고 해요. 다행히 그날 저녁에
국장님이 전화가 왔어요. 어떻다는 말도 안 해요. 잘 있으니까 걱정마라-면서 속옷 들고 동빙고 초등학교로
나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밤 11시에 준비해서 나갔더니 사복 입은 군인이 받아 갔어요.
동빙고에 계시는지 그때 알았죠.
당시 전임순 여사는 평소 가족들끼리도 알고 지내던 윤홍정 장관이 경찰에게 책임을 떠넘긴다고
생각해 매일같이 언제 풀려나는지- (전화로) 따져 물었다고 한다.
보안사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은 안병하 국장은 6월 8일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2편에서 전임순 여사의 인터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