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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고래 PD Jul 15. 2020

안병하 치안감 부인
전임순 여사 인터뷰 2

악의 평범성 그리고 일의 슬픔과 기쁨

인터뷰 1편에서 이어집니다.


PD 동빙고에 다녀온 후에는 어떠셨나요? 

전 평소엔 굉장히 건장한 분인데 완전히 초주검이 돼서 왔어요. 

내가 물어봤을 땐 시민들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는 그 한마디뿐이었어요. 

'얘기 들으나마다-' 싶어 자꾸 물을 수도 없었어요  


PD  (옆에 있는 호재 씨에게) 아드님은 어떻게 기억하세요?

안 처음에는 자존심 때문인지 당당하게 오셨어요. 얼마 안 돼서 몸이 망가졌다는 걸 알았죠      


PD 어떤 걸 보고 그렇게 느끼셨어요?

안 남자들은 그런 게 있잖아요. 힘들어도 버티는 거. 그런데 짧은 시간에 바로 쓰러지셨죠.

  

 PD 외상은 없으셨어요?

전 불을 밤새도록 켜놓고 잠을 못 자게 했대요 

안 낮은 곳에 24시간 앉아있었던 거죠.      

전 단 한마디 죽고만 싶었다’ 그 한마디를 하셨어요 

옆방에 김종필 씨 기침 소리가 나더라뒷방엔 이후락 씨가 있더라고 하더라고요.     

안 그런데 아버님이 계급상 제일 아래라서 힘들단 말도 못했다-고 했어요.

     

1980년 5월 18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600여 명의 재야인사가
체포되고 200 여 명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졌다. 김대중, 문익환, 고은, 이해찬 등 
37명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끌려갔는데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오원철과 같은
박정희 시대 핵심 인사들도 권력형 부정 축재 혐의로 잡혀 갔다.     


한편, 안병하 국장은 계엄사 합수부에서 조사 중 사표를 종용받고
치안 본부로 이송됐는데 치안본부에서는 사표 제출을 직접 요구하기 곤란하자
부속 주임으로 근무하던 권 OO에게 이야기하여 사표를 제출토록 하였고
(안 국장은) 혹독한 추궁에 대한 정신적 충격과
치안본부에서 받은 냉대로 사표를 제출했다.
- 안병하 전 전남 국장 5.18 관련 순직 진상조사 보고 171P
'05년 9월, 전남지방경찰청 -

      

 PD 이후에는 어떠셨나요?

 전 몸을 가누지 못해서 신대방동에 침을 잘 놓는 한의원이 있었어요. 

 거기 가서 침을 맡기 시작했어요.


안 국장은 사표를 제출한 6.13. 경 귀가했는데 계엄사 합수부로 연행되어
당한 고문과 후유증으로 몸져누웠다. 3개월 여 동안 침과 뜸으로 치료를 했고
종로의 한 의원에서 만성 담낭염 및 신장염 등으로 치료를 하였음 
      - 안병하 전 전남 국장 5.18 관련 순직 진상조사 보고 172P 
'05년 9월, 전남지방경찰청-   
  

PD 평소 안 국장님은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하는 데다, 온화한 성품으로 갈등을 

싫어하는 분이라서 상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전 그렇게 했다는 것이 침착한 성품에서 온 게 아닐까 싶어요 전쟁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극한 상황일수록 더 침착해요 벌써 앞뒤를 다 생각하신 거죠 본인은 각오한 거예요 희생할 각오로 

경찰 본연의 일에 충실한 거죠  


안 선택의 여지가 없었더라고요. 만약에 하라는 대로 했으면 편했을지 모르지만 틀림없이 역사적인 

심판을 받을 거고, 그럴 바엔 차라리 명예롭게 죽는 길을 선택한 거죠.     


전 25일에 경찰이 앞장서라는 것도 경찰한테 책임을 다 미루려고 한 거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소명의식이 투철한 분이에요 그런데 시민한테 총을 쏠 수 있겠어요?  계엄군 투입 이후 

사태가 확 커진 거예요 광주에서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을 세워서 한 것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인데 계엄군의 강경한 진압만 아니었으면 번지지도 않았죠. 어떻게든 수습이 됐겠죠.

     

보통 회사나 조직에서 부당한 지시나 명령을 거부하면 그 사람의 인품을 들먹이면서
트러블 메이커라고 손가락질한다. 제 성질머리를 못 이겨서, 버릇이 없다는 식이다.
회사에서 시키면 그냥 할 일이지, 누군 생각이 없어서 가만있나. 선배(직장 상사)가 말하면
"네, 알겠습니다" 하면 되는 것을 왜 토를 달고 문제를 일으키냐는 논리다. 

     

무 조건적 순종이나 순응만이 지고지선일까? 그게 좋은 사람의 조건이고 직장인의 미덕일까?
안병하 치안감의 사례로 알 수 있듯이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는 건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소명의식과 직업정신에 관한 문제이다. 직업윤리가 투철하고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희생을 각오할 만큼 정의롭고 따듯한 사람이란 뜻이기도 하다.

      

갈등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는 건 일종의 물타기다. 메시지에 문제가 없으니 메신저를 공격하는 꼴이다.
침묵하는 다수들은 도덕적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메신저 공격에 동참한다. 인신공격에 주눅 든
내부 고발자들은 본인의 성격적 결함을 자책하며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게 된다.
때론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절대 그래선 안 된다. 자책할 필요도 없다. 


옳은 일을 하는 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PD 강제 해직당한 뒤 많이 억울 해하셨겠어요?

전 식구들이랑 서울로 올라간 다음 다시는 광주에 못 내려갔거든요 26일 지나고 나서 전남 도청에서 

근무하던 분들이 대표로 여럿이 왔어요. 기념품도 가져왔어요. 너무 고생했다고- 와서 인사하더라고요

그때 서야 광주에 있는 짐을 가져온 거 같아요.     


PD 광주에서 오신 분들이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전 광주때문에 피해를 입으셨다고, 미안하다고 말씀들 하셨어요     

 

PD 국장님은 뭐라고 하세요?

전 듣고만 계시죠. 경찰은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하는 거 같았어요.       


PD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전 남들은 잘 모르더라고요. 광주만 모두 욕을 하더라고. 시민들이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했죠

과격한 진압 때문에 일어난 거지, 처음부터 그런 게 아니라고. 밤낮 설명해도 아는 사람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도 있었어요.

나중에 하나하나 제대로 밝혀지니까 그랬었냐고 얼마나 억울했겠냐고 했어요     

 

PD 주변에서 수군대는 사람들도 많았겠어요?

전 아, 어떤 사람은 나한테 직접 말은 못 하고, 동창 친구한테 "헬리콥터 타고 도망갔다며?" 했어. 

너무 기분이 나쁘죠. 그래서 이건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늘 생각한 거죠.


PD 그런 말씀 들을 때마다 후회되진 않던가요?

전 안 국장님이 군에 있을 때도 감찰장교였거든요. 그래서 부정 같은 건 감히 생각도 못했어요. 

저 자신도 그런 게 싫었거든요. 늘 청렴하게 살고, 참 올바른 정신을 가졌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게 너무 자랑스러워요. 권력형 비리에 관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안 국장님처럼 올곧았으면, 이 나라가 더 낫지 않았나 싶어요

                    

PD 국장님 생활은 어떠셨어요?

전 항상 누가 따라다닌다고 했어요. 어디 가서 누구랑 만나고 점심 먹으려고 하면 누가 있다고요.


PD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지셨잖아요. 그때 많이 힘드셨겠어요?

전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심하게 아프면서도 아픈 내색을 안 해요. 미국에 저와 처음 갔을 때, 

입원하게 됐어요. 그때 한 열흘 입원했었나 봐요.

      

80년 12월, 심한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안병하 국장 부부는 형제들이 살고 있던 독일과
LA에서 4개월 동안 머물렀다.


미국에 있는 시동생들이 자꾸 들어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애들이 군대를 가야 하니까 

못 가고 있다가 심하게 아플 때 미국에 입원했는데 한국에 빨리 가서 입원해야 한다고 의사까지 

소개해줬대요. 그런데 내가 너무 힘드니까 안 국장님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안 했어요 

그때까지 몰랐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그래서 (신장) 투석하게 된 거예요


안국장은 84년 3월 12일경부터 같은 달 31일까지 사이에 담낭염, 고혈압,
만성신부전증의 진단 하에 국립경찰병원에 입원 치료하였으며 
병세가 호전되지 않고 악화되어 85년 5월 18일 도미(渡美)하여 치료하였으나 
진전이 없어 9월 1일 귀국한 후 86년 11월 29일에는 국립의료원에 입원하여 
같은 해 12월 9일까지 만성신부전증 당뇨성 신병증, 당뇨성 안질환, 고혈압 등 
진단 하에 입원 치료하였음.
- 안병하 전 전남 국장 5.18 관련 순직 진상조사 보고 172P
 '05년 9월, 전남지방경찰청-


PD 5.18 관련된 이야기는 아예 안 하셨어요?

전 언젠가 4.19 혁명 얘기를 하더라고요. 애들도 아버지가 잘못했구나- 생각하지 않겠어요?

자세한 건 모르잖아요. 4.19 얘기를 하는 것이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말하는 거 같았어요.     

4.19 당시 시민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 내무장관이 사형당하고 많은 경찰관들이 희생됐다고 했어요.     


1960년 3.15 부정선거를 획책하고, 성난 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린 당시 내무장관인 최인규는
4.19 혁명 이듬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PD 다른 말씀은 없으셨고요?

전 네, 5.18에 대해서는 절대로 잘했다, 못했다는 변명을 안 해요. 제 눈으로 봤으니까 

어떻게 했을지 짐작이 다 가요.     


PD 생계를 유지하려면 굉장히 고생하셨겠어요?

전 이루 말도 못 했죠. 재산이 은행에 다 넘어가고, 갑자기 이사 가게 됐는데 여관에서 살기도 했어요. 


PD 어떻게 꾸려 나가셨나요? 

전 보증금이 3천만 원인데 우리 집에서 7백만 원인가 받아서 나온 거 같아요. 옛날에 국장님 잘 아는 분 

중에 의사가 있는데 그분이 천만 원을 보태줘서 2천만 원을 내고 천만 원을 못 내서 그때 월세로 냈는데

국장님이 돌아가시고 나선 그 보증금도 다 까먹어서 사실은 갈 데가 없이 돼버렸어요.      


PD 많이 힘드셨겠어요?

전 그래도 자존심은 있잖아요. 남한테 초라한 꼴 보이질 않으니까 사람들이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줄 몰랐죠. 이제 제대로 밝혀지니까 다 얘기할 수 있었죠. 그때는 형제한테도 창피해서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지금 같았으면 이사 다니면서 국장님 유품이라도 맡겼을 텐데 상패라든지 그런 거 

다 부셔서 불로 태웠어요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러워요 형제들한테 맡겼더라면 더러 남아있을 텐데.. 

필요할 때가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경찰청에서도 유품을 달라는데 뭐 남은 게 있어야죠.      


PD 국장님도 이 상황을 목격했을 텐데..?

전 그때는 시골(강원)에 할아버지가 농사짓는 게 있어서 조그만 집이 있었는데 

주로 거기에 많이 가셨어요. 남들이 볼까 봐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가곤 했어요.

      

치안감 승진을 앞둔 남편이 5.18 민주화 운동에 휘말려 직위 해제되고 서슬 퍼런 신군부에 무능한
관리자로 찍혀 감시당하는 신세가 됐다. 강제 해직 후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중병을 얻어 8년 만에
숨졌다. 인고의 세월, 전임순 여사의 가슴에 쌓인 한과 설움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안병하 국장은 직위해제당한 스트레스와 정신적 충격으로 고혈압이 조장되고 
카테콜라민 호르몬 분비를 증가시켜 당뇨병을 얻게 되고 이로 인하여 
만성신부전증으로 사망에 이르게 됨
- 안병하 전 전남 국장 5.18 관련 순직 진상조사 보고 173P 
05년 9월, 전남지방경찰청 -      

 

PD 돌아가신 후, 공원묘지에 안장되셨죠?

전 충주 진달래공원묘지라고 친척들이 알아 봐줘서 (안장했어요) 동기생들이 우선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돌아가신 지 17년 만에 (2005년) 국립묘지에 가게 된 거예요.      


PD 그때 심정이 어떠셨어요? 

전 그 말해서 뭐해요. 평생 고생만 한 거죠. 전쟁 때도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요. 

광주에 와서도 본인이 아주 잘못했으면 모르는데 본인은 잘 한 건데 인정도 못 받고 

너무 불쌍하게 돌아가신 거죠 이렇게 세상이 바뀌었으면 얼마나 인정을 받았겠어요.      


PD 가족들은 어땠어요?

전 국장님 돌아가신 이후에 다 따로 살았죠..     


PD 생계 때문에요?

전 집이 없잖아요.. 저는 저대로 살고, 결혼한 큰아들과 둘째도 친정에 있었어요     


PD 이사도 자주 하셨겠어요?

전 우리 아들한테 물어보세요. 이사를 얼마나 갔는지 쟤들은 너무 한이 될 거예요.

지금 이제는 (호재 씨를 가리키며) 늙었잖아요. 자기 인생을 제대로 살아봤겠어요.

국장님이 돌아가신 뒤에 셋째 아들(호재)도 결혼했거든요. 그런데 (호재도) 자존심이 있으니까 

처가에 그런 사정도 얘기 못할 거 아니겠어요? 경찰 고위직 생활 그렇게 하면서 

그 정도로 어려울 줄은 몰랐다고 주변에서 얘기하더라고요     


1992년 5.18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안병하 국장의 가족들은 관련 피해자로 보상 신청을 했지만,
심사 과정에서 제외됐다. 관련자 범위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에 여론의 반발이 심해졌고 재심에서 실정법상 한계 때문에 제외된 인사(윤한봉 씨 등)들이 
다시 포함됐다. 또, 행정 재판에서 8일간의 불법 구금이 인정돼 보상금 800만 원을 받았다.
보상금 청구 소송을 준비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온 전임순 여사는 셋째 아들(호재) 부부와 함께
구 시청 사거리 어느 한의원 옆 골목에 OO 회관이라는 자그마한 식당을 차렸다.
그때가 94년 일이다. 2020년 현재, 식당이 있던 자리에는 주차장이 들어서 있다.       

 

 PD 이곳이 식당이 있는 자리인가요

전 네. 겨우 보상을 받게 됐는데 그때까지 그냥 있을 순 없잖아요. 그래서 이곳에 식당을 열어 

지인들이 모임을 가져 주면 생활비는 나오지 않겠나 싶어서 시작하게 된 거예요.      

 

PD 많이 도와주셨나요?

전 우리를 도와주려고 모두 많이 와 주셨는데 제가 제대로 감당을 못했어요. 그때는 보증금 줘야 

요리사도 구할 수 있는데 그럴 형편도 못 되니까, 대충 하는 사람을 뒀죠. 

옆에서 제가 도와주면 될 줄  알았죠. 그런데 음식 솜씨 좋은 광주에서 대충 해서 되겠어요? 

그때 제일 속상한 건 전남경찰국장이 오셨는데 그 시간 내에 못해줬어요. 

그래서 밥도 못 드시고 그냥 갔어요. 얼마나 미안했는지..      

특히 예전 경찰 동료들이 손님들을 데려오고, 모임도 여기서 하고 그랬어요.     


안 그분들 중 일부는 그분들도 강제 해직 잔데, 자기 일보다 아버님 명예부터 회복시키려고 

자신들 일처럼 매달려 주셨죠     


PD 식당일도 도와주셨다고요?

전 손님이면서도 식당에 와서 도와주고..지나고 생각하니까 너무 미안하고 창피하기도 해요


안 광주에 왔다 갔다 하기 너무 힘드니까 직장도 관두고 왔다가 도저히 광주 시청하고 다투면서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니까 저는 먼저 올라갔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갔어요.     


전 그래서 800만 원을 받게 됐는데 그때 얘들은 서울로 갔고 저도 그때 몸이 안 좋았어요. 

일종의 스트레스병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돈 받은 걸 가지고 대수술을 받았죠.

                               

1997년 강제 해직 사실을 인정받아 보상 생활지원금과 위로금으로
약 1억 1천만 원을 받은 유가족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에 들어서야
광주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명예 회복됐고 2006년 국가 유공자로 지정돼
안병하 국장을 국립묘지에 모실 수 있었다. 

이어 국가 유공자법에 따라
2009년 보훈 급여를 신청했는데 보훈처는 조건부 지급을 통보했다.
5.18 보상금을 반환해야만 보훈 급여를 지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족들은 다시 한번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은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따라
2005년부터 소급받은 급여 5천9백여만 원과 보훈연금 매달 1백90여만 원씩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감사원은 유가족에게 지급한 5.18 보상금이 이중 보상이라고 지적했고 또다시 보상금 환수 통지 처분을 내렸다.

이에 맞서
유족들도 보상금 반환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냈고 2심에서 승소했다.
"보훈 급여는 부인에게만 매달 지급될 것"이라는 점을 들어
이중 보상이 아니라고 판시한 것이다.
그러나 3심 대법원은 “5.18 보상금을 유족들이 지분을 나눠서
정부에 반환하라 “고 판결을 내렸다.

 이에 유족들은 다시 ’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을 제기했다.
나머지 세 아들에게는 반환을 면제해 달라는 소송이다.
하지만 광주시청은 채무 독촉은 물론이고 가압류 통지서를 보냈다.
94년부터 23년 넘게 소송이 이어진 셈이다. 
- 시사저널, 2017년 3월 22일, 정락인 기자, 일부 발췌 - 


PD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어요?

전 남들은 자식한테 바라고 하지만 나는 미안한 거밖에 없어요. 하다못해 세라도 얻어서 줬으면 

그렇게 고생을 덜 했을 텐데 그것도 못해줬는데 자식들의 생활이 오죽했겠어요.      


PD 가족 분들도 많이 힘드셨죠?

전 그때 제가 악착같이 쫓아다닌 것도 너무 애들이 고생하고 있으니까 재판에서 꼭 이겨야겠다고 

생각해서 쫓아다녔는데 아무런 힘이 없었던 거죠. 변호사만 잘 선임했으면 괜찮았으리라 생각되는데 

제가 법을 제대로 몰랐고 그저 진실을 밝히기만 하면 다 괜찮을 줄 알았어요     


PD 지금은 어떠세요?

전 이제 명예 회복되어서 마음은 좀 괜찮은데, 역시 압류가 들어오고(2018년 현재) 그런 것 때문에 

애들, 손자들이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이건 꼭 해결해야 한다 싶은 거죠     

제가 쫓아다녀도 안 되고 그래서 (호재는) 화가 난 거죠, 활동하면서 사람들한테 알리는데 나한테 

얘기를 안 했어요. 그래서 몰랐어요. 자기 가족도 있는데 누가 좋아하겠어요. 

밥벌이하고 일에 충실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보상 관계로 재판한다고 하면 남들은 다 그래요.

‘뭐 서장 생활도 오래 했는데’, ‘그만큼 국장 생활하면 빌딩도 있다던데’ 이런 소리만 한다고요. 

    

그러니까 거기에다 무슨 말을 하겠어요. 이제 제대로 다 밝혀지니까 마음이 후련하죠. 

이제는 떳떳하고 내가 고생한 건 아무것도 아니죠. 이웃들은 그래요. 

어버이날에 애들이 와서 어쩐다고 하면서 애들이 안 오면 화가 난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자식들한테 너무 미안한 것뿐이라고 하죠.다른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죠.


PD 손주들한테는 뭐라고 하세요?

전 우리 손녀딸은 창피해서 말을 안 한 대요. 우리 할아버지가 경찰 국장했다는 말도 안 한 대요. 

너무 못 사니까 창피해서. 그러면 내가 말해요 ‘경찰이 이렇게 사는 건 떳떳한 일이다'

'나쁜 짓하면 돈 벌지. 그게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해요. 그래도 애들은 이해가 안 가죠. 

이제야 명예회복이 되니까 걔들도 깨닫게 되겠죠

     

2020년 5월 11일, 안병하 평전 출판 기념회를 맞아 광주에 온 전임순 여사는
어느 때보다 홀가분해 보였다 표정도 밝았다. 대성황을 이룬 출판 기념회에는 4월 총선에서
당선된 광주 지역 국회의원들 여럿이 참석했다. 유력한 대선주자들이 축전을 보냈다.
언론에서도 관심이 쏟아졌다. 더할 나위 없이 성대한 추모 행사였다. 
지난 40년 동안 안병하 치안감의 명예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고 악착같이 가족을 건사한
전임순 여사에게 소회를 물었다.

     

PD 오늘 기분이 어떠세요?

전 이런 일이 오리라 생각도 못했지.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잠시 허공을 응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늦게라도 알아줬으니 이제는 여한이 없어요 그동안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이제는 다 사그라졌어 

(환하게 웃음) 진실이 알려졌다는 것 때문에 너무 흐뭇하고 무언가 할 일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생전에 가족들에게도 얘길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희는 광주가 원망스러웠어요. 

그런데도 "광주 시민들에게 고맙다"라고 국장님은 늘 말씀하셨어요. 

경찰들이 희생되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자기가 겪은 고통을 위로받았던 것 같아요       

  

PD 여한이 없으시겠네요?

전    이제 정말 여한이 없어. 진실을 어떡하든지 세상에 알리고 싶었어. 때가 되어 결국은 다 알게 되니까

내 맘도 후련하고 그때는 이런 일을 바라지도 않았지만 언젠가 안 국장님이 그러더라고요

"먼 훗날 역사가 알아줄 것"이라는 그 한마디뿐이었어요. 그게 이뤄진 거죠. 끝.


다음 인터뷰 <안병하 치안감의 셋째 아들 안호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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