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거짓말, 전두환 회고록
지난 2017년 4월 전두환 회고록이 출간됐다.
전두환은 이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해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피소됐다.
당시 전남경찰국장이었던 고 안병하 치안감을 기술한 대목도 다분히 악의적이었다.
"광주사태 초기에 경찰력이 무력화되고
그로 인해
계엄군이 시위 진압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전남경찰국장의 중대한 과실 때문이었다.
파출소가 습격당하고 경찰차가 불타는 등
소요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는데
시위 진압을 지휘해야 할
전남경찰국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았다.
점심을 먹는다며
경찰국 청사를 떠난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이
연락두절 상태가 된 것이다.
안 국장은 이날 오후 늦게 업무에 복귀했지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후였다.
- 전두환 회고록 1권 p.494-
회고록만 읽고 보면, 안병하 국장은 정말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휘관이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여러 증언과 증거가 이를 뒷받침하지만
당시 핵심 관계자들의 증언은 다소 부족했다.
제작진은 5.18 당시 전남도경 상황일지를 썼던 이재승 씨를 만났다.
광주 남구 봉선동 한 아파트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는 이 씨는
거동이 다소 불편했지만 인터뷰가 시작되자 까랑까랑한 말투로 당시를 회고했다.
안병하 국장에 대한 평가도 무미건조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법한 증언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간과됐던 계엄군 - 경찰, 치안본부- 전남경찰국의 관계를 정확히 짚어주었다.
덕분에 당시 경찰 지휘 체계를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질문과 답변이란 형식으로 반론과 제반론이 이어지면서 치열한 토론이 펼쳐졌고
때론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간단치 않았던 그날의 진실이 궁금하다면
일독을 권한다. 인터뷰는 2018년 5월 17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 남짓 진행됐다.
PD 안녕하세요, 먼저 자기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5.18 당시 어떤 일을 하셨었나요?
이 당시 저는 전라남도 경찰국 경비과 경비계에서 상황담당 경사로 근무했습니다.
제 임무는 무전을 통해 명령을 내리고, 현장 보고를 종합해 전남도경 상황일지에
기재하며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무선을 통해 진행되는 데모 상황을
보고 받고 통제 분석 지휘하는거죠
PD 80년 5월 이전에도 그 일을 하신 거예요?
이 광주 시내에서 데모만 벌어지면 사무실에서 곧바로 제 역할을 수행합니다.
PD 전두환 회고록에는, 경찰이 무능해서 계엄군을 투입했다고 쓰여있는 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전두환 이 사람은 모든 상황을 자기 편의대로 해석하는 거고,
저희들은 데모가 발생하면 기본 계획대로, 짜인 대로 막는 겁니다.
상황에 따라 새로 계획을 수립하거나 임시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광주권에 근무하고 있는 경찰 병력이나 기동대가 부족할 경우에는
24개 경찰서 지원 부대를 동원해서 운영해요. 전두환 회고록은 완전히
자기 멋대로 자기 주관대로.. 이건 뭐랄까? 비난받아 마땅할 회고록이고
그 자체로는 한낱 낙서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PD 안병하 국장이 점심을 먹고 도망갔다고 써져 있었어요.
이 그때 당시 도청 앞의 상황이요. 5월 18일부터는 도청 앞에 시민들이 꽉 찼어요.
밥은 어떻게 먹었냐면 병력들은 헬기로 받아서 먹었고요.
저희들은 아줌마들이 머리에 이고 배달하는 거 있잖아요.
국장님도 예외 없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어요.
누구를 막론하고 시민군이랑 다 대치하고 있는데
국장이 작업복 입고 밥을 먹으러 가겠어요?
상식적으로 그건 불가능하죠.
PD 차분히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17일 이전의 시위 양상은 어땠나요?
이 5월 1일은 메이 데이라고 해서 근로자들의 데모부터 시작됩니다.
5월 17일 이전에는 근로자 중심으로 데모가 이뤄짐과 동시에
대학생들까지 가세해서 그 양상이 심해지고 참석 인원도 많아졌습니다.
5월 초순까지는 전남도경 기동대(의경)와 경찰서 진압 병력으로 막아오다가
학생 시위 양상으로 장기화, 조직화되어서 저희 도경 산하 일선 경찰서 병력을
전부 불러서 시위를 막고 있었습니다. 사실, 해마다 그렇게 해왔어요
그걸 충정 작전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5월 16일에 가장 강력한 야간 횃불 데모가 있었습니다.
횃불 데모는 한 번도 없었거든요,
'데모는 좋지만 횃불은 심하지 않나-' 했는데
학생들은 딱 한 번만 하겠다고, 도청 분수대에서만 하고,
횃불을 들고 돌아다니지는 않겠다는 약속이 있어서
그날은 도청 앞에서 자기네(학생)들 계획대로 심하게 진행했어요.
심지어 막판에는 고생하는 경찰관을 위해 위문금을 걷자고 해서 위문금을 걷어서
동부 경찰서 정보과장에게 전달했어요.
이렇게 집회가 끝나니까 자기네 계획대로 흩어졌어요
이처럼 그때까지의 시위 양상이 불순 의도가 있다거나
이런 건 절대 없이 일상적인 데모 양상이라는 걸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17일에 갑자기 비상계엄령이 선포됐어요.
"아침에 뭐가 선포됐다고?" 제 집이 상무대였는데 군인 소령이 내리 길래
"상황이 안 좋은 게 있냐-"고 하니까 "계엄령이 발동됐다"라고.
그때 이미 계엄군이 MBC나 이런 데 배치가 돼 있어요.
그러다가 5월 18일에 상황이 벌어진 거예요
그때 당시 전남대학교에는 1 기동대가 배치됐는데 기동대장이
"지금 상황이 개판이다, 뭐 이런 법이 있느냐"라고 해요
일방적으로 학생들을 차단하고 한 뼘 이상 긴 진압봉으로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니까 큰 사달이 난 거죠.
그때 도청 안에 있는 공수특전사 부대 군인들은 한 손에 대검,
한 손엔 진압봉을 들고 대기하고 있더라고요.
"뭔 데모를 막는데 대검이 나오나" 할 정도로 살벌했어요.
제가 의문이 든 게 발포 시점인데
낮 12시 - 1시 사이에 윗분들과 금남로 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변함없이 분수대를 주변으로 경찰들이 24시간 있었고
시민들은 나름대로 주먹밥을 먹고 있었죠.
그때 도청을 향해서 버스 4대가 일렬로 있었고, 탱크 2대가 막고 있었어요
제가 듣고 본 바로는 그때 발포가 이뤄졌어요.
버스 위에 올라가 있던 시민 한 사람이 탱크에다가 화염병을 던졌어요.
탱크는 화염병에 취약하거든요. 그 순간 탱크가 뒤로 밀리면서
‘따따따’ 한몇 발을 갈긴 거예요. 저도 무척 놀랐습니다.
도청 앞에서 금남로 끝까지 모여 있던 시민들이 총소리에
일시적으로 쫙 갈라져서 도청 앞에 버스를 제외하곤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고요. 그것이 최초 발포 장면입니다.
더 정확한 설명을 돕기 위해
국방부 진상규명 위 5.18 조사 결과보고서(86-87p, 2007년)에
수록된 내용을 그대로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 12:58 장갑차와 화염병 공격으로 금남로 저지선 돌파당하고
군경 최후 저지선 정말 무너짐
△ 12:58 금남로에서 장갑차 2대로 일제 공격 개시로 금남로 방어선 무너지고
도청 앞 광장 군중 운집 도청 피함. 계엄군 전원 도청 내곽에서 작전 중
△ 12:59 군의 발포로 시위군중 일단 분산
△ 12:59 연속 총성(계엄군 공포 난사)
△ 13:00경 시위대 선두에 있던 장갑차가 시동을 건 후 불시에 계엄군 대열에 돌진하여
선두에 있던 61, 62대대는 피했으나 후방에 위치한 63대대 병사 1명이 압사.
도청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은 분산 및 재집결
△ 13:05 도청에서 총격전 발생
△ 13:05 도청에서 총격. 군인 2 시민 3명이 쓰러져 있음
△ 13:07 11 여단 지역 APC 및 버스 질주. 11 여단 1명 사망.
도청 쪽으로 나는 총성 20여 발
△ 13:10 도청은 현재까지 포위된 상태에서 대치중인바 폭도 차량이 경찰을 향해 돌진
통과하여 대응 발포하였음(사상자 다수 추정)
...
△ 13:30 자위권 발동
그다음에 어떻게 됐냐
시민들이 화순에서 예비군 무기고를 탈취해서 오면서
전대 병원 옥상, 전일빌딩 옥상에 LMG 기관총을 설치했어요.
예비군 무기고가 털렸다고 시시각각 상황이 들어온 거예요.
사실, 그전에 국세청 직장 예비군 무기고가 털린 보고가 접수됐어요.
그건 우리 경찰 관할 무기가 아니고 직장 무기고가 털렸기 때문에
실탄은 아니고 무기만 털렸다는 상황만 일지에 적어놨어요.
그런데 21일은 경찰 무기고가 털린 거죠. 거점 배치된 경찰들한테서
무전이 들어옵니다. 시민들이 총을 쏘면서 진입하고 있다고요.
한참 뒤쯤 3시 반쯤에서 4시쯤? 전대병원, 전일빌딩 옥상에서 도청 쪽을 향해 발사!
국방부 진상규명 위 5.18 조사 결과보고서(92p, 2007년)를 이어서 살펴보면
15:50 도청 500미터 상거한 우체국 쪽에서 학생 20여 명 카빈총과 실탄을 들고
도청 쪽으로 진입 중. 사방면에서 총성이 나고 있다 함
16:15 전남의대 12층 옥상에 LMG 2정을 설치하고 300m 상거한 도청을 향해 발사
16:30 광주시 동구 소태동 TNT 37,000여 개 탈취
17:40 광주시 지원동 종점에서 탈취 무기 공급
광주공원에서 나주지역에서 올라오는 무기 공급
그때부터 공수부대 특전사들이 도청 안으로 들어왔어요.
저는 상부 지시에 따라 기동대 병력을 전부 도청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경찰은 무기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공수부대가 총으로 발포하기 시작했죠.
그게 도청에서의 발포 상황이에요.
이때 경찰이 치안을 담당해야 하는데 총 한 발을 안 쐈고,
형식적으로 데모에 임했다는 게 나중에 안병하 국장이 압송된 원인이었어요.
실제로, 합수단의 ‘직무유기 피의사건 수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 경찰 무기를 폭도들로부터 피탈을 방지하겠다는 소극적인 발상하에
치안본부장에 건의한 후 경찰 2개소 및 4개 기동대의 무기 약 1,300정을
도경 안전가옥에 이동, 소개(疏開)시킴으로써
5.21. ‘진돗개 둘’이 발령되고
5.22. ‘자위권’이 발동되었음에도 광주시내에 근무하는 전 경찰의 무장을 불가능
(직무유기 피의 사건 결과 보고서 中)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진실을 얘기하자면 저희 경찰은 충정 작전, 데모 진압 기본에 의해서
데모 상황이 지속되고 심할 거 같으면 경찰관 무기를
군부대에 소산 하도록 계획돼있어요.
그건 5.18만이 아니라 전에도 시위가 격화되면
경찰서는 서장 책임 하에, 도경은 도경국장 책임 하에
상무대 기갑학교로 옮겨야 해요. 그곳이 저희 경찰 무기 소산처였어요.
심지어 각 부대, 경찰서마다 소산처가 달라요.
도경 국장이나 경찰서장의 판단에 따라 인근 군부대에 무기를 소산 시킵니다.
왜냐하면, 광주에 데모가 심하면 경찰서 병력을 끄집어 올리기 때문에
일선 경찰서에 치안 수요가 적거든요.
이미 저희들은 5.15 이전에 군부대에 무기가 소산 된 상태였어요.
우리는 데모 막는데 총을 쓸 것은 생각도 안 하거든요.
데모 막을 때 총을 쓸 생각을 하는 건 전쟁이나 폭동이나 해당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왜 5.18 때 경찰이 무장도 안 하고 무책임하게 있느냐!'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일각에선 안병하 국장이 김대중으로 정권이 바뀔 걸 생각해서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데모도 불성실하게 막았다는 유언비어도 퍼뜨렸어요.
이재승 씨의 답변 중 총기 소산에 관한 증언은 다소 엇갈린다.
당시 핵심 참모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안 전 국장은 총기 휴대 관계로 고민을 하다
유혈 과잉진압 및 살상이 심해질 것을 우려해 절대 무장을 시키지 않기로
결심을 한 후 경찰국 무기와 경찰서의 총기가 탈취당하지 않도록
군부대 등으로 소산 시키도록 지시하였고 무기를 전부 군부대로 이동시켰다
- 안병하 전 전남 국장 5.18 관련 순직 진상조사 보고 61p,
양 XX(당시 도경 경비과장) 증언 -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총기를 휴대하거나 무장을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여
경찰봉과 가스 마스크만 휴대하고 시위대와 대치하였다
- 안병하 전 전남 국장 5.18 관련 순직 진상조사 보고 61p,
권 XX(당시 도경국장 부속 주임) 증언 -
"경찰국 무기는 5.20 오전 안병하 도경국장의 지시에 의해 상무대로 소산하였고
경찰서 무기는 인근 군부대로 소산토록 일괄 지시를 하였으나
소산 했는지 확인은 하지 못했다"
- 안병하 전 전남 국장 5.18 관련 순직 진상조사 보고 63-64p,
이 XX(당시 도경 장비계장) 증언 -
당시 전남 각 지역 경찰서장들의 증언을 더 찾아보면,
이재승 씨가 증언한 것처럼 5월 1일부터 소산 한 곳도 있다.
"5월 1일 오전 경찰서 잔류 경력을 집합하여 경무과장이 직장하여
경찰무기와 예비군 무기를 구례군 구례읍 봉동리 소재
31사단 3대대로 소산 시켰으며.."
- 안병하 전 전남 국장 5.18 관련 순직 진상조사 보고 75p -
5월 18일 군부대로 소산 한 곳(보성),
총기를 소산 하지 않는 곳(고흥)도 있었으나
대개는 5월 20일~21일 사이에 상부 명령에 의해
총기 소산이 이뤄졌다고 증언한다.
- 안병하 전 전남 국장 5.18 관련 순직 진상조사 보고 67- 99p -
그중에서 광주 시내 경찰서는 소산 시기가 거의 비슷하다.
"5.20 야간에 예비군 무기와 경찰무기를 담양경찰서 무기고에 소산(광주 서부)"
"광산경찰서 무기는 전량 송정리 공군부대로 소산(광산)"
"광주 MBC 방송국이 시위대에 의해 불이나 전소(5월 20일)되고 광주 경찰서로
진출하려 한다고 하여 경찰 총기 및 실탄을 31사단으로 소산(광주)
위 증언들을 토대로 최근 새로 작성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2017년 10월, 전남지방경찰청)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요약했다.
*광주권 2개 경찰서 무기․실탄 및 비밀문건 소산 완료(5.19. 22:00)
* 무기(경찰국 대공분실) / 실탄(담양서) / 비밀문건(화순서) / 유치인(나주서)
경찰국․1중대․118중대 무기를 CAC(전교사) 병기 창고에 입고(5.21. 09:36)
*화순 무기고 소산 조치 지시(5. 21. 11:18)
*각 경찰서 무기고 소산 지시(5. 21. 15:46)
*총기는 노리쇠, 공이 제거 조치하여 안전한 곳에 묻고 노리쇠와 공유는 별도 보관
위와 같은 사실에 기초해 총기 소산 시기에 관해 재차 질문했다.
PD 15일 이전에 무기를 소산 했다고 하셨는데, 당시 경찰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18,19일에 31사단으로 무기를 소산 하라고 지시를 했다고 돼 있어요?
이 그건 아마 잘못됐을 거예요. 도경이 무기 소산 한 뒤 경찰서가 무기 소산을 안 하는 일이
없을 거예요. 그건 아마 필수적인 무기를 나중에 소산 했거나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선 (그럴 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사전에 무기를 소산 했었지만 지역 경찰서는 재량껏 그 시기와
규모가 정해졌고 전남 도경과 광주 경찰서는 안병하 국장의 지시에 따라
5월 20일 저녁에 최종적으로 총기 소산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재승 씨의 답변은 계속됐다.
"21일 오후 도청에서 경찰이 철수한 상황도 그렇습니다.
치안본부에다가 전남도경 직원들은
"이렇게 포위돼서 시위대가 총을 쏘는데 어떻게 할 거냐!" 항의했어요.
누군가 와서는 "나 검찰청 검산데 경찰이 왜 우리 검찰청은 안 지켜주냐"니까
한 사람이 하는 말이 "야이, 새끼야 검사면 공무원인데, 너도 인마 직장 예비군 무기 들고
너희 직장을 지켜야지 이 비상사태에 경찰이 검찰청까지 지킬 의무는 없다"라고
다툴 정도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오후 3시~5시 사이에 치안 본부에서 오더가 떨어져요.
지금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안전하게 귀가하라고 하면서
도청 뒤에 가와사키 헬리콥터 하고, 경찰 항공대 4인승 헬기가 있어요.
거기에 전남도지사, 경찰 국장, 경찰 국장 비서관만 타고 갔어요
그때 상황일지를 불태우라는 지시도 내려졌어요.
그래서 상황일지 불태우면, 일지 작성한 내 책임이다 하고,
불태웠다는 셈 치고 창고에 보관이나 하자-하고 캐비닛 밑에 서랍에 넣고
침대 코너 쪽에 엎어 놓고 불나더라도 괜찮겠지- 하고
담 넘어가려고 했는데 전경들이 옷이 없다고 잠옷이고 뭐고 달라고 해서
작업복 다 벗었어요. 옷 나눠주고 없으면 도청 각 사무실에 가서 있는 옷을 줬어요.
그 많은 전경들이 잠옷이고 뭐고 다 입고 도청 뒤로 빠져나갔어요.
그때 도지사랑 안병하 국장은 송정리 경찰 항공대에 임시 지휘본부를 설치했고요.
나는 집이 상무대 앞쪽이라서 걸어서 가서 하룻밤 자고 나니까 비상소집이 왔더라고요.
빨리 항공대 CP로 오라고..
남들 다 쉬고 있는데 하루도 못 쉬고 바로 국장님 계신 거기서 상황일지 작업을 했죠.
그러고 있던 차에 26일에 안병하 국장님이 계엄사에서 연행당했죠.
그러면서 송동섭 국장이 새로 부임했어요.
이때 또 하나 논란이 되는 게 시위대의 무기고 탈취 시기였다.
무기고 습격이 5월 21일 오후 1시 이후에
시작됐다고 하는 시민군 측의 주장과 달리
그날 오전부터 이미 무기고 습격이 진행됐다는 기록들이 있다.
정 OO 나주읍 금성 파출소장은 1980년 7월 16일
전남 합동수사단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5월 21일 10:00경 난동 분자 4명이 탄 지프차를 선두로
뒤따라 4~50명이 GMC에 분승하고 파출소 앞에 이르러
뒤따라오던 GMC가 파출소 안으로 돌진, 기물을 파괴하고…"
전두환 회고록(전두환 회고록 1권, 403p)
전두환은 무기고 습격 시간을 굳이 '오전'으로 정정함으로써,
오후 1시 계엄군 집단 발포가 자위권 차원이었다는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해선 여러 증언 등이 이미 나온 바 있지만 시시각각 펼쳐지는 지역 상황을
정리해 일지를 작성한 이재승 씨만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의 증언을 들어보자.
PD <전두환 회고록>에 따르면 21일, 나주 예비군 무기가 오전에 탈취됐다고 해요?
이 그건 완전히 상황을 날조한 거예요. 21일 오후에 남평 지서가 털렸어요.
PD 오전이냐? 오후냐? 이렇게 갈리더라고요.
이 오후죠. 오전에는 털릴 수가 없죠. 왜? 계엄군이 탱크에서 총 몇 발 쏜 게 최초 발포였어요.
그 전에는 총기 문제가 대두되지 않았어요. 시민군들도 그냥 대치하려고 했는데..
(계엄군이) 총을 쏘니까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LMG 기관총을 갈기고
무기가 필요하다고 해서 한 거지, 그런 말은 계엄사 쪽에서 심리전을 펼친 거예요.
하지만 신군부는 전남도경 상황일지를 근거로
오전 8시 나주 반남 지서, 오전 9시 나주 남평 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했다고 주장했다.
정작 상황일지 작성자 본인은
오후라고 증언하는데
상황일지에는 왜 오전으로
기록된 것일까?
보안사가 상황일지를 사후에 조작했기 때문이다.
보안사가 보존하고 있는 ‘전남도경 상황일지’는 집단발포 이전 시간대에
시민에 의한 총기피탈을 기록(인쇄)하고 있으나,
당시 경찰이 보유하고 있지 않던 ‘경찰 장갑차’가 피탈되었다는 등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고
문서의 불완전성(생산기관․년도 미기재, 표지와 본문의 내용 상이 등)
무기 피탈 관련 치안본부 감찰기록 및
당시 근무 경찰관의 증언 등으로 볼 때 조작된 것으로 판단됨.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2017년 10월, 전남지방경찰청) 보고서 37p 중
*이에 관한 내용은 당시 나주 관할 경찰서를 순회하며 직접 무기를 소산 시켰던
염행조 씨와의 인터뷰에서 자세히 밝힐 예정이다.
PD 21일 이후 상황은 어땠어요?
그때 상황은 오직 계엄사 통제를 받고 있기 때문에 각 동부에 있는 서별로
비상소집이 된 거고 나는 도경 직원이기 때문에 경찰 항공대에서 안병하 국장과
참모들이랑 밤새면서 상황일지를 작성했죠. 다행히 그때 통신망은 각 경찰서마다
24시간 유지되고 있었죠. 모든 치안 활동은 계엄사 지시를 받고요.
그러다가 26일 무기를 다시 꺼냈고요, 계엄군의 진입이 끝나니까 도경으로 들어왔죠.
도경으로 들어온 후, 신임 송동섭 국장은 데모 진압보다 후속 치안 유지에
더 신경을 썼어요. 그때는 저희 경찰도 실탄하고 총을 지급받아서 사무실에서 근무했어요.
PD 당시 안병하 국장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잖아요. 그런데 총이 없는 상황에서
발포 명령을 내려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왜 그런 지시를 내린 거죠?
이 신군부는 경찰이 무기를 가지고 있는 줄 알고 있어요. 무기를 갖고 있는데
도경 국장이 일방적으로 시위도 적당히 막고 있는 무기도 안 쏘고 있다고
자기들 멋대로 해석한 거예요. 그건 난센스고 잘못 생각한 거죠.
계엄사 측의 일방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두환 회고록의 취약점입니다.
PD 국장님은 주로 어떤 지시를 내리셨나요?
이 도경 국장은 직접 명령을 안 내립니다.
주간 일과 시간이든 아니든 마찬가지예요.
국장님 실에서 참모들이 전부 대기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나온 내용을 우리 상황실에서 (모든 걸) 무전으로 듣고 있어요.
모든 지휘는 우리가 합니다.
그다음에 가끔 강조사항이라고 있어요.
그럴 땐 저희들이 도경 국장님 강조 사항이니까
전 부대원들은 교대로 근무를 철두철미하게 하고 경계를 강화하라,
상황이 안 좋으니까 지휘관에게 감독 수를 늘려라
이런 지시를 저희 경비본부를 통해 내립니다.
시민을 자극하지 말아라, 군부 대하고 알력을 피하라, 협조를 잘하라
급식은 부족한 게 없느냐. 이런 건 간부회의 때 논의가 됐어요.
전남도경국장 주요 지시 사항․
1. 분산되는 자 너무 추격하지 말 것,
2. 부상자 발생치 않도록 할 것(5.18. 11:00)․
3. 연행과정에서 학생의 피해가 없도록 유의할 것(5.18. 11:55)․
4.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합동작전을 하게 되니 각 부대장은 현장 유지를 하고
가스차 피탈이나 인명피해가 없도록 조치(5.18. 15:32)
5. 가스는 가능한 사용치 말고 부득이할 때는
1호와 3호차를 교대로 사용할 것(5.19.11:20)
6․화학탄 사용은 가능한 억제하고, 학생들에게 가혹한 행위를 하지 말고
교문으로 밀어 넣을 것(5.19. 12:55)
7․군중 자극하지 말고 선무활동하면서 침착하게 행동하도록(5. 20. 20:00)
8․현 전선에서 사력을 다해 사수하도록 각 부대 지휘관은 책임감을 가지고
도청을 사수(5. 20. 21:27)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2017년 10월, 전남지방경찰청) 보고서 28p 중-
근데 우리 경찰은 유일하게 네 분이 돌아가셨거든요.(5월 20일 밤 도청 앞)
그것도 시민 군하고 다투다가 그런 게 아니라 누워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시민군 버스가 쳐버렸어요. 버스가 쌩- 온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최루탄 공격을 하니까
운전수도 눈이 매워서 그쪽으로 핸들을 틀어버렸어.
그래서 네 분이 타이어에 꼈는데 앰뷸런스 기사 하고, 간호사가 도망가서
경찰이 운전해서 나가는데 빠져나가질 못해서 치료를 못해서 죽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경찰관 네 분 시체를 길거리에 쌓아놨어
참 그분들은 돌아가시고 혜택을 못 받았어요. 목숨까지 바쳤는데..
그분들이 돌아가셨다고 무전이 오잖아요. 그런데 전부 무전을 안 받아요.
너무 조용하니까 도경국장이 빨리 참모들 나가서 파악하라고 해요.
나도 경비과장 모시고 갔더니 무전기 들고 있는 경찰관 눈이요.
꼭 야간에 보는 눈빛 있죠. 건들면 총이라도 있으면 쏴 죽일 거 같더라고요.
건들지 말라는 거예요. 완전히 극한 상황이었어요. 저 그런 눈빛 처음 봤어요.
그러다가 경비과장 잡아끌고 들어가자고 그랬어요.
직원이 죽고, 몇 날 며칠 밤새고 있는데 누가 진정을 하겠어요.
나도 똑같은 입장이었어요. "그래도 병력 배치는 해야 되니까 교대로 쉽시다.
힘들지만 서로를 생각합시다" 하고 대화로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때는 말이 쉽지, 전쟁터가 따로 없더라고요.
총소리만 안 났다 뿐이지.
PD 그렇다면 안병하 국장의 어떤 부분을 평가할 수 있을까요?
이 안병하 국장이란 한 인간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육사 8기입니다.
1962년도 중령에서 총경으로 예편된 분입니다.
육사 8 기생하면 유명한 사람도 많잖아요.
안병하 국장도 그런 프라이드가 있어서 그릇이 컸어요.
어떤 국장은 경호 경비나 데모 진압할 때 세밀한 사항까지
직접 지시하지만, 그분은 대범한 덕장이었어요.
참모진을 통해서 이런 사항을 이렇게 하라고만 해요.
군 출신들은 특이하게 참모들한테 지시하더라고요.
그분은 자질구레하게 "나 도경국장인데 이런 거 잘하라!" 이런 거 없이
직원들을 대할 때도 무리가 없는 덕장이셨어요.
5월 18일에 작업복 입은 총 경하고 공수대원 하고 싸움이 붙었어요.
나이도 있으신 분인데 작업복 입고 있다고 해서 일반 순경으로 본 건지
그때도 우리가 참고 넘어가자고 할 정도로 무리가 없었어요.
PD 안병하 국장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점도 있을 것 같아요?
이 고생했다는 소리는 안 하고, 자기네(신군부)들 정권 쟁탈 당위성을 위해서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 모든 경찰관들을 대표해서라도 그 점이 싫다는 거예요.
왜 일개 경무관한테 책임을 물었느냐, 그게 안타까워서...
저도 안병하 국장 관련해서 국보위부터 시작해서 수차례 조사를 받았습니다.
국보위에서 조사받으면서 그랬지만
"당신도 똑같다"라고 하길래...
나도 울화통이 터져서 악을 썼어요.
"당신네들, 5.18이 발발된 후 우리 전남도경이 어떻게 지낸 줄 아냐고.."
"당신네들이 데모 막기 위해서 길바닥에서 사흘 나흘 경비 서 본 적 있느냐고!"
"그런데 어떻게 소극적으로 데모 막고 다 도망갔냐고..."
국보위에서 악쓰니까 "이봐, 조용히 해" 하니까
"야이, x새끼야 나이도 어린놈이 왜 반말이야. 너도 공무원 아니야?
내가 누군지 알 게 뭐야? 나도 정상적인 경찰 공무원이고 당신네들도 공무원이면
고생했단 말은 못 할망정 반말이나 하고 그게 국보위가 할 말이냐"라고..
내가 불명예스럽지만 상황일지 잘 썼다고 전두환에게 상패를 받았어요.
버리려고 하다가 내 나름대로 몸 바쳐서 했기 때문에
저건 명예롭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PD 당시 경찰이 계엄군과 대응이 달랐던 이유는 뭘까요?
이 시위가 격앙되면 시민들이 군인이나 경찰을 똑같이 욕하고 그래요.
그렇지만 우리는 화학탄을 거의 사용 안 했어요.
왜? 전부 시민들이에요. 아저씨, 할머니였고.
그러면서 이런 진심이 있었어요.
우리는 이 지역에서 전시나 평시나 치안을 담당해야 하는 공무원이다.
시민하고 알력을 가급적이면 방지하고 참고 인내하면서 진압하자
그래서 그 사람들이 돌멩이를 던지면 우리는 방패로 막고
피하고, 우리가 피했다니까요. 특별한 면이 없었으면..
PD 안병하 국장이 이런 점까지 두루 고려해 대응한 거네요?
이 맞아요, 우리는 데모가 끝나더라도 치안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시민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진압에 신중을 기하라고 반복적으로 지시했어요.
20일 경찰 네 분이 죽었을 때도 신념을 가지고 끝까지 잘 지키고 지시에 따라주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계속 치안을 유지해야 하는 공무원임을 잊지 말고
시민과 대치하지 마라고 하셨고요.
반대로, 계엄군 입장에선 국장이 그런 지시나 하고 앉아 있다고 오해하기 쉽겠죠.
PD 그런 지침들이 적절했나요?
이 그때도 적절했다고 인식을 하죠. 왜 그렇냐면 데모 막고 끝나면
우리는 원 위치해서 일한다는 걸 잊지 않았죠. 사태가 해결되고 당신(안병하 국장)이
떠나더라도, 우리 일은 우리 일이다 이건 누구나 다 공감하고 있죠.
PD 경찰이 도망가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왜 그럴까요?
이 궁극적으로 경찰은 적이 아니다고 생각한 거죠. 담양 경찰들 같은 경우엔
흩어져서 갈 바엔 작업복 입고 정식으로 가자해서 행진하면서 갔대요.
시민들이 손들어하면 손들고, 무전기도 뺏기고, 그 사람들도 경찰관들이
데모 막는 건 원래 하는 일이지만, 시민들한테 피해를 안 줬다,
시민들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경찰관을 안 건들었죠.
일반 시민들도 경찰관이 평생 같이 지내야 할 사람인 걸 아니까 그런 면도 작용했겠죠.
PD 마지막으로, 안병하 국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제가 청와대서도 근무한 경비/경호 통입니다.
평상시에 무슨 상황이 일어나면 국장님 눈에 많이 띄고 과장, 계장 대신해서 무전을
많이 했고, 현장 지시를 담당해서 국장님은 저를 알아보시고 고생한다고
생각하고 계셨죠. 개인적으로도 저를 인정해주니까 좋게 느낄 수밖에 없죠.
PD 지휘관으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군인 출신이면서도 친화력이 좋았어요. 부정부패는 철두철미하시더라고요
참 청렴결백하시고 수덕한 분이더라고요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게 보안사에 가시기 전에 작업복을 입고 계셨는데
고개를 떨어뜨리면서 "참 야속하다"라고 허허 웃으면서
냉소적으로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그때 눈시울이 붉어지더라고. 그 목소리는 저만 들었습니다.
안병하와 전두환.
육사 선후배 사이였던 두 사람의 삶은 극명하게 갈린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전두환 대위는 육사 생도 800명, 졸업생 장교 200명 등
1,000여 명을 모아 시가행진을 한다.
당시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우리는 이미 각오한 바 있습니다. 온 동창생 생도들은
혁명과 더불어 생명을 바치기로 결의했습니다"라고 충성을 맹세했다.
당시 육사 교장이었던 강영훈 중장은 전두환의 계획을 제지하다
박정희에게 연금당하는 치욕을 맛봤다.
하지만 그는 "군이 정치에 개입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육사생도를 정치에 끌어들이는 것은 쿠데타의 경우에도
금기로 되어야 한다."라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 개정증보판 남산의 부장들 47-48p, 김충식 지음, 폴리티쿠스 -
반면 안병하는 쿠데타의 주역인 육사 8기 동기생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군인의 정치 참여에 단호히 반대했다.
80년 5월에도 둘의 행보는 정반대였다.
전두환은 하나회라는 특정 사조직과 결탁해 12.12 쿠데타를 일으켰고
겨우 독재의 신음에서 벗어난 이 땅의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으며
권력을 강탈했다. 그 과정에서 광주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오로지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안병하는 시민의 편에 서서 발포 명령을 거부했고,
그 대가로 강제 해직당하고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40년이 흐른 지금은 어떤가.
전두환은 여전히 건재하다. 법원 출석 요구도 불응한 채 골프를 치러 다닌다.
12.12를 자축한다며 측근들과 호화 만찬을 즐긴다.
측근들도 마찬가지다. 거짓으로 점철된 회고록을 펴내고
안병하의 육사 8기 동기인 이희성은 법정 출두를 거부한다.
그들 중 일부는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법의 명령도 가볍게 묵살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안병하 국장이 치안감으로 추서 되고
경찰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점이다.
40년이 되어서야 겨우 이뤄진 느림보 명예회복이다.
하지만 여전히 정의는 기울어져 있고, 법은 무권유죄, 유권무죄다.
29만 원이 전재산인 전두환과 그의 자녀들은 은닉 재산 의혹을 받으면서도
어떤 추징도 없이 국가의 경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
반면 안병하 국장의 유족에겐 이중보상을 들먹이며
무려 25년 가까이 소송을 이어가고 있다.
실로, 참담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PD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 경찰 시위 관리 방식은 어때야 한다고 보시나요?
이 전, 의경이 없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 의경 때문에 경찰이 욕을 많이 먹습니다.
전, 의경들을 군인들처럼 치안 유지 수단으로 쓰는 것에 특히 반대예요.
대신에 경찰 본연의 숫자를 늘려야 데모 진압을 하더라도 서로 설득하고 타협하면서
시위 문화를 이끌어가거든요. 촛불 집회 때 시위를 하면 양옆에 에스코트하면서 가는
이런 문화, 그게 시위 진압의 기본 방침이 되어야 해요.
병력도 적은데 의경 전경까지 투입하느니 차라리 폐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부는 2017년 5월 공공일자리 81만 개 창출 공약에 따라
2018년부터 의무경찰 인원을 매년 20%씩 감축하여
2023년까지 의경을 정말 폐지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