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리더, 안병하
2018년 5월 12일 토요일은 아침부터 제법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빗소리에 섞여 개 짖는 소리만 어렴풋이 들려오던 연희동 골목.
깊숙한 곳 육중한 담으로 둘러싸인 전두환 자택 앞에서
5.18 대학생 법정 회원들의 기습시위가 열렸다.
사실, 기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평온했지만, 어쨌든 확성기는 설치되었고,
스무 명 남짓 학생들도 모였다.
그들은 엇박자 난 목소리로 "전두환 구속!"을 외쳤다.
약속에 없던 외침이었는지, 입만 뻥끗한 친구들도 있었다.
철제문 앞에 소환장을 붙이고 전두환 가면을 쓴 사람을 무릎 꿇렸다.
5.18 피해자들의 얼굴을 넣은 피켓을 들고 "임을 위한 행진곡"도 불렀다.
어떤 이는 흘깃흘깃 카메라만 쳐다보았다.
그 광경을 또래 친구들로 보이는 의경들은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간혹 관리자들끼리 귓속말을 나누고선 이빨이 드러나게 웃었다.
집회가 끝나자 그들은 조용히 시위대를 돌려보냈다.
조금은 낯선 광경이었지만
앳된 학생들의 조곤조곤한 인터뷰에는 나름의 결기가 있었다.
80년 5월로부터 38년째(2018년 현재).
시위 풍경은 바뀌었을지 몰라도, 시위대의 분노와 슬픔은 변하지 않았겠다 싶었다.
변한 건은 누구의 공이고, 변하지 않는 건 누구의 탓인가.
물음에 답을 줄만한 사람을 찾아 위례 신도시로 향했다.
80-90년대 시위 현장을 관리하던 경찰 간부 이상규 씨.
80년 5월 광주 한복판에 있었다. 전남경찰국 기동 3중대장으로서 최일선에서
공수부대와 시위대를 겪었다. 그는5.18고 안병하 치안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인터뷰는 한 공원의 팔각정 아래에서 1시간 남짓 진행됐다.
마른 체격에 백발이 무성한 그는 온화하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PD 안녕하세요 선생님, 요즘 안병하 국장님이 재조명받고 있는데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이 네 그렇습니다.
80년 당시 제가 나주 경비과장을 하다가 기동대 3중대장으로 오면서
그분을 만났습니다. 기동대가 원래 1,2중대가 있었는데 시위가 많으니까
4월 초순쯤 3중대가 생긴 거죠. 3중대장으로 와 보니까 막사가 없어요
그래서 도청 상무관 앞을 막사로 썼습니다.
제가 그 당시 참모도 아니니까 안 국장님을 자주 못 뵀는데
막사 짓고 있는 날 한번 오셨어요. 막사에 2층 침대를 만들고 있었죠
안병하 국장님이 오셔서 이러는 거예요.
"중대장, 애들(자녀들) 있어? 없어?"
제 막둥이가 80년 4월 생이예요.
"애가 셋인데 막둥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됐습니다"했더니
안병하 국장님이
"침대 모서리가 삐죽 나오면 애들이 다치는데 어떻게 해야겠어?
"대패로 부드럽게 밀어야겠습니다." 했더니
"그렇지. 그렇게 해서 애들 안 다치게."
그걸 보고 '군인 출신이라던데 참 인간적인 분이시구나'라는 걸 느꼈습니다
또,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 다음날(18일) 아침 8시쯤
충장로 제과소에서 맛있는 빵을 했다고 무전이 와요.
국장님이 애들 하나 두 개씩 먹이라고..
빵을 받으러 가니까 안병하 국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제부턴 계엄군이 상황을 통제할 것이다. 또 16일 이후로 시위도 잠잠해졌고
우리 애들도 고생 많았으니까 빵 좀 먹이고 잘 좀 해주라-"고.
그 말씀을 막 하는데,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시위한다고 무전이 딱 오더라고요.
학내에 주둔하는 경무과 형사가 무전한 것 같아요.
무전이 딱 나오니까 예상을 못했다는 표정으로
"오래 못 쉬게 생겼네, 지금 바로 출동을 해야지, 그래도 변수는 없게 해~"
하고 가셨어요. 참 따뜻하고 좋은 분이셨어요.
안병하 국장은 막내 아들 또래의 의경들을 자식처럼 아꼈다.
1979년 의경으로 입대해 전남경찰청 관사 관리병으로 근무했던
한 분의 증언에 따르면, 우유를 배달하기 위해 관사에 가면
안병하 국장은 매일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우유 두 병을 건네면 그 중 한 병은 꼭 자신에게 줬다고 회고했다.
PD 4월부터 살펴보면, 광주에 시위가 잦았습니까?
이 4월엔 그렇게 시위가 많진 않았어요. 그때만 해도, 학교에 경찰이 상주하던 때거든요.
5월부터 시위가 많았다고 봐야죠. 저희 부대는 주로 유동 3거리에서 전남대학교 앞,
조선대학교 앞 시위 진압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는 돌도 던지고 그랬는데.
시위가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PD 5월에는 어땠습니까? 이전과 양상이 다를 만큼 격전이 벌어졌습니까?
이 저는 87년도 6월 항쟁할 때 시위를 많이 막아봤습니다.
그때는 제가 경비과장이니까 앞에 서진 않거든요. 그런데도 그 시위가 훨씬 심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광주 시위가 그렇게 심했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PD 5월 18일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이 한참 시가지에서 시위를 맡고 있는데. 그날이 공수부대가 투입된 날인가 봐요.
'이제 공수부대가 투입됐으니까 시위가 진압되겠구나-'그렇게 생각했어요.
당시 안병하 국장이 지시한 시위 진압 지침이
도망가는 시위대는 추격하지 않는다.
시위 중 만약 변수가 발생하면
너희들이 제일 고생하니까 절대 변수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어요.
근데 공수부대는 시위 진압이 좀 과격해요.
저희 경찰봉은 머리가 튼튼한 사람이 맞으면 머리가 깨질지 경찰봉이 깨질지 몰라요
근데 공수부대 박달봉은 한 대 맞으면 크게 다치겠더라고요
공수부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공수부대 투입된 후 20일까지는 금남로에서 군인들과 같이 잔 것 같아요.
시위가 밤 12시 넘으면 조용해지잖아요. 그때 그 소령에게 얘기 들어보면
부마사태 때도 투입됐는데, 부산과 여기는 좀 다르다는 거예요.
하루 이틀 과감하게 진압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안 된대요.
그러면서 난감해하더라고요.
PD 당시 경찰과 군인의 역할은 어떻게 분담했는가요?
이 우리가 앞에 막고 있다가 길을 트면 공수부대가 나가서 시위대를 잡아 오는 식이었어요.
보통 공수부대는 끝까지 추적해서 검거하고 잡히면 구타하고.
그래서 우리 경찰들은 막 도망가도 안 잡아주죠.
금남로 도청 분수대 바로 앞 광주서에서 나오다 보면 꽃집이 하나 있었어요.
그 꽃집에서 애들이 잠깐 쉬고 있는데. 시위대가 막 도망가요.
그러면 뒤에서 공수부대가 쫓아와요. 그러면 저도 아무 말도 안 하고
소대장도 아무 말도 안 하고 그 시위대를 안 잡아요.
안 잡는지 못 잡는지. 어쨌든 나는 아무 지시 안 했어요.
그럼 공수부대가 와서 "xx 같은 것들이 그것도 못 잡는다"라고 욕을 해요.
욕을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가만히 있어야죠.
PD 왜 안 잡아주죠?
이 잡아주면 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맞는데요, 그럼 안 되잖아요.
우리 애들 수 십 명이 있는데 그거 하나 못 잡겠어요.
앞으로 도망가는데 다리를 걸어서라도 잡을 수 있죠.
안 잡아주는 거죠. 잡아주면 많이 맞고 잘못될까 싶으니까...
PD 또 안병하 국장이 총기 사용을 엄격히 통제했던 걸로 아는데 어땠습니까?
이 근데 그 당시에 우리 3중대는 총기가 없었습니다. 이미 소산한 상태였어요
PD 전두환은 당시 경찰이 무능해서 군인들이 개입했다고 해요.
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시위하는 군중이 적이 아니고 우리 학생이고 우리 시민이고
어떻게 보면 내 새끼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과감히 진압하면 안 되는 거죠.
PD 그런 공감대가 확산돼 있었겠어요?
이 그니까 경찰이 그 당시에 희생자가 한 명도 없었잖아요.
교통사고로 함평서 직원 4명이 희생된 거 말곤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마 당시에 경찰이 과잉진압을 하고 시민들한테 적개심이 있었다고 하면
경찰들한테 피해가 많았을 수도 있죠.
PD 중대장님도 부대원들한테 같은 지시를 내리셨나요?
이 경찰은 위에서 지시하면 대부분 다 그대로 따릅니다. 특히 시위와 관련해서는.
그 이후에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변수 발생이 제1입니다. 변수 발생.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시위대가 다치거나 죽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다치는 것도 많이 다쳐선 안되죠. 설령 우리가 좀 다쳐도 그렇게 해야 해요
왜냐면 우리는 복장을 다 갖췄잖아요. 학생들은 무슨 복장이 있겠어요.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죠.
PD 당시엔 상황이 심각했는데 그래도 그 지시가 옳았다고 생각하시나요?
당연하죠, 예를 들어 말씀드려볼게요.
저 같은 경우 21일 오후 도청에서 철수할 때 제 결혼반지, 캐논 카메라 등
귀중품을 3중대 중대장실에 두고 왔어요. 중대장실이 상무관 바로 옆에 있거든요.
그다음 날 아침에 상무관 가보니까 그게 그대로 있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우리 애들은 작업복 벗고 운동복 입고 전남여고 뒤에 동명동 민가로 향했는데
시민들이 나와 있다가 우리 애들을 데리고 들어가요.
나중에 27일에 부대 복귀해서 물어보니까 첫날은 동명동에서 다 잤어요.
경찰이 과잉 진압했으면 시민들이 그랬겠어요? 밥도 안 해주고 잠도 안 재우고
우리 애들도 희생당했을지도 모르죠.
거리 헤매다가 나중에 보니까 한 사람도 희생 없이 다 원대 복귀했어요.
.
PD 그렇지만, 안병하 국장도 징계를 받고, 선생님도 징계를 받으신 거잖아요?
부당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신지요?
이 당시, 부대 지휘 소홀로 징계를 받았습니다. 제가 경찰로 재직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았는데 당시 상황이 그러니까 그러려니 했습니다.
PD 개인적으로 그것에 대해 동의하시는지?
이 동의 못하죠. 징계받을 때 기동 별 중대장 3명이 나란히 조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데 그 당시 기동대 1중 대장은 연세가 많은 분이에요.
총경들이 거기 앉아있는데, "xx 같은 놈들이 너네는 뭐하는 놈들인데 왜 앞에 앉아있고
우리는 여기 앉아있어" 이래도 그 사람들이 아무 말도 못 해요.
그러니까 그 징계 자체가 저희 경찰 지휘부보다 더 위에서 내려왔다고 봐야죠.
수용해야지 뭐, 경찰 사표 쓰고 나가면 몰라도.
PD 전남 경찰 내부의 정서는 어땠는지도 궁금합니다.
이 당시에 5월 27일이 지나고 난 다음엔 뒤숭숭해가지고 무슨 유언비어가 많이 돌았어요.
그래서 당시에 아마 경찰관 사표 내라고 하면 사표 낼 사람도 많이 있었을 겁니다.
PD 5.18 이후에는 어떠셨어요?
이 제가 4월 초에 기동대 발령받고 갔다가 다 진압되고 난 다음에
신군부에게 징계 먹고 장흥으로 갔습니다.
장흥경찰서로 거기서 한 2년 일했다가. 경정으로 승진해서 경남을 거쳐
광주 서부서 경비과장으로 왔어요. 거기서 6개월인가 1년인가 있다가 다시 서울로 왔습니다.
PD 당시에 안 국장님의 지침을 보면, 2000년대 보수정권 시절보다
훨씬 진일보한 게 아닌가 싶은데 오랜 현장 경험이 있으신 분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 88, 89년도 시위가 많을 때 보면 애들이 막 돌 던지고 화염병 던지고 이러면
이쪽(경찰)에서 다탄두 쏘잖아요 그러다가 학생 하나 잡잖아요.
잡아서 의경들이 마구 때리면, 시민들이 때리지 말라고 그래요
반대로 학생들이 돌, 화염병 던지고 이러잖아요. 그럼 던지지 말라고 막 시민들이 말려요.
시민들이 양쪽을 쓱 보다가 어디가 심한가 그걸 판단하는 것 같아요.
80년 5월, 그때는 경찰이 그 역할을 했어요 양쪽을 말렸다고 봐야죠.
그런 지휘를 안병하 국장님이 하신 거예요.
PD 이런 안병하 국장님의 지침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도 동의하시겠네요?
이 저는 개인적으로 그분 체제에 동의합니다. 그래야 변수가 발생하지 않죠.
물론 경찰이 강도나 강력사범에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필요하면 총도 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치명상을 안 주는 범위 내에서요.
그런데 시위하는 사람들은 그것하고 다르잖아요.
자기들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해보다가 안 되니까 시위를 하는 거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정당한 의견 표출 통로가 있으면 거리 시위를 하겠어요?
그걸 좀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옳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PD 앞으로 시위 질서 유지에 임하는 경찰의 자세는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이 요즘 저희 동기들을 만나서 얘기 나누다 보면,
어떤 친구들은 백남기씨 사건에 대해 물대포 쏜 것이 잘했다 하고,
잘못됐다는 동기도 있고 그렇습니다.
저는 시위 군중을 향해서 직사포를 쏜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물대포를 직분사하면 사람이 잘못될 수도 있잖아요. 시위하는 시위대도 좀 지켜서 하고,
시위 진압하는 경찰도 좀 유연하게 대처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PD 시위 진압 경험에서 나온 철학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이 그렇습니다.
PD 마지막으로, 다시 그때로 돌아간대도 안병하 국장님 지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그렇게 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안병하 국장님 말씀대로.
그분이 만일 신군부 뜻에 적극.. 적극이 아니라도 지시에 따랐다면
희생자가 훨씬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의 은인입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어쩌면 안병하 국장이 발포 명령을 거부한 건 거국적 결단이기에 앞서
'변수 발생 최소화'라는 원칙에 입각한 행동이자,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부하 직원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방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반면, 전두환을 위시한 정치군인들의 쿠데타는, 리더의 사적인 욕망이 공공성을 위협할 때
얼마나 큰 패악을 끼치는지 여실히 증명해 보여주는 사례이다.
흔히 말하는 인간관계, 의리, 정 따위를 마냥 미화시키고 조직과 사회생활의
최고 덕목으로 둬선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