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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고래 PD Jul 27. 2020

80년 5월 전남 경찰국
전경 모철환 씨 인터뷰

안병하 정신과 한국의 시위 문화

80년 5월 당시 전투 경찰 신분으로 도청 앞을 지켰던 
모철환 씨는 이후 직업 경찰관으로 임용돼 

90년대 무수한 시위 현장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베테랑 경찰관으로 재직했고 

퇴직을 앞둔 지금(2018년 4월)은 
고향 무안 해제 파출소에서 
공직생활을 조용히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에게 '안병하'라는 지휘관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5.18은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당시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5.18은 또 어땠을지 궁금했다.

현장 최전선에서 직접 사건을 겪은 사람의
진술만큼 진실에 가까운 게 있을까?
이런저런 궁금증을 안고 무안으로 향했다.

인터뷰는 2018년 4월 26일 무안 해제 파출소에서
1시간 남짓 진행되었다. 

PD  안녕하세요- 5.18 당시 어떤 일을 하셨나요?

모 당시에 저는 22살 전투경찰이었어요. 

79년 말에 2 기동대에 근무 발령받았죠. 


118 해안초소에서 근무하다가 

광주 2 기동대로 발령받아서 5.18을 맞은 거죠. 

광주 박물관 뒤쪽 서산동에 2 기동대에 있었어요.  


PD 당시 기동대는 어떤 역할을 했나요

모 일상에서는 치안보조로 야간 방범 활동을 했고 

시위 상황이 있을 땐 시위 진압 나가고 그랬죠.

      

PD 당시 시위 양상은 어땠어요?

아마 개학하면서 대학가 시위는 계속 있었어요.

하지만 굉장히 평온했죠. 


저희들이 주로 전대 정문에 있었는데요. 

전경 중대 소속 97%가 대학생이었어요. 

시위 학생들이 같은 연배라서 특히 더 평온했죠.


예를 들어 전대 앞에서 시위를 한다고 해도 

몇 시까지는 끝내겠다- 약속했고요


시위가 끝나면 우리들이랑 손 흔들고 

요구르트 같은 걸 와서 주고 가고

고생했다고 얘기도 하고,  저녁에 외출 나가면 

만나자고 약속도 하고 그런 상태였어요. 


직업 경찰관들이 동원돼서 나와 있을 땐 

경찰관 처우 개선해주라고 하고, 

전경들 외박, 외출을 보내달라는 얘기도 할 정도로

평온했어요('평온'을 3번 강조했다)


 PD 5.18 발발 직후에는 어떠셨어요?

모 외박을 나갔는데 갑자기 귀대 하란 

연락을 받은 거예요. 그때 저는 무안이 집이었는데 

광주 백운광장에 들어서니까 방화벽이 쳐져 있어요

아, 이게 보통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PD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모 당시 주 임무가 금남로, 노동청, 충장로 1가 입구 

3개 방향을 차단한 게 주목적이었는데. 

그때 함평 부대라든가 일선 경찰관들이 동원돼서 

저희들 후방에서 지원해주는 업무를 했어요.


이미 계엄군이 들어와 있었고,

그때부터 최악의 극한 상황이 벌어졌어요.

 

우리가 막고 있다가 터지면 계엄군이 나가서 

진압하고, 들어오면 우리가 방호벽으로 진압을 하고 

그런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도 울분을 느낄 정도로 과격했어요 

‘야... 이거 안 되는데..’ 


대원들끼리도 너무 과하다-고 얘기했어요 

나 조차도 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PD 좀 더 구체적으로 진압 방식을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모 우리가 차단하고 있다가 계엄군이 요구해요 

열어달라고, 열어주면 그때 확 나가는 거예요 

속수무책이에요. 다 무너지는 거죠. 

시위대가 순식간에 없어져요. 그러고 나면 

부상자가 속출하고요..


 PD 경찰의 시위 진압 방식과 크게 달랐던 거죠? 

모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 했죠. 당시 지침상으로 

경찰봉도 빼지 말고, 시간으로 밀고, 몸으로 

받아주는 개념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

열어달라고 해서 열어주면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때리니까.. 


PD 이러다 사람이 죽겠다-싶었겠어요? 

모 피 흘린 사람들을 질질 끓고 들어오니까 

피가 끓지, 같은 젊은이로서, 


경찰 입장으로 봐도 소름이 돋고 

막말로 너무하지 않냐... 우리라도 달려들고 

싶었을 정도였어요.      


PD 5월 21일 도청에서 해산 당시에 대해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그땐 어떠셨어요?

모 저 같은 경우는 해산 명령을 받고 

맨발로 도청을 벗어났어요 


총소리는 나고, 시가지 전투는 계속되고.. 

도청 뒤쪽 골목길에서 사망자까지 봤어요

무슨 정신으로 뛰겠어요. 


동명동 쪽으로 뛰는데 누가 팔을 딱 

잡으면서 들어오라고 해요


자네 경찰관이지? 

더 이상 가지 말고 우리 집에 있다 가라고.

다음날 새벽까지 안전하게 있었어요


주민들은 아는 거죠. 

경찰관들이 도청을 벗어나고 있다는 걸

그들 스스로 우리에게 정의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거죠. 


5.18 이후에 저희들이 찾아다니면서 

주인아저씨한테 고맙다고

인사도 드리고 감사함을 전했었죠.. 


PD 그게 가능했던 이유가 뭘까요?

모 경찰이 그만큼 5.18 과정 상황에서 

시민을 위한 처신, 시민을 위한 시위 진압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경찰에 대한 어떤 

악의가 없었어요. 


오히려 잘한다는 유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이 보호해줬지 우리가 반대 세력에 

있었더라면 우리를 보호해줬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시민을 위한 경찰이었다고 

봐야 돼요.      


PD 그다음엔 어떻게 하셨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간단하게 옷을 갈아입고 동명동에서 

산수 오거리 쪽으로 갔는데 


무등산 쪽에서 내려오는 시위대가 

같은 시위대인 줄 알고 차에 타라고 

하더라고요. 


차에서 보니까, 

광주공원에서 백운광장까지 

가는데 칼빈 소총을 흔들며 

바닥에 때렸어요


밤새 총소리가 산발적으로 나서

왜 그런가 했는데 원인을 대충 

알겠더라고요.


전문적인 교육을 안 받아서 

칼빈에 탄창을 넣고 노리쇠를 

후퇴 전진으로 작동하면 

한 발이 들어가 있을 거 아니에요. 


한 발에 들어가 있는지 모르고 

탄창을 빼는 거예요. 


그걸 때리고 다니니까 

나중에 강한 충격에 의해서 

발사가 되더라고요. 


사용법을 알려주고 백운광장에 

내려서 무안까지 걸어갔어요.


PD 그 당시를 생각하면 어떤 장면이 

먼저 떠오르나요?

모 당시 노동청 입구를 차단했을 때는 

계엄군이 노동청 입구부터 장동로터리까지 

민단 말이에요. 그럼 그 거리가 텅 빈다고요. 


노동청 입구에서 장동로터리까지 꽉 찼던 

시위대가 순식간에 비는 거야. 


그러면 과연 얼마나 애들이 다쳤을까?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따라가는 거야. 


예외 없이 길가에 피투성이가 돼서 

쓰러져 있는 학생들이라든가 

젊은이들, 시민들이 보이면 그분들을 

우리가 계엄군이 돌아오기 전에 들어서 

옛 노동청 입구 주유소 쪽 작은 골목이 

있어서 거기에다 옮겨놓고 돌아오고...


그때 석가탄신일이 얼마 안 남아서 

부서진 장식물 천으로 가려놓고 오고 

그랬었어요.   


가끔 생각나요. 옮겨줬던 사람들이 

과연 살았을까? 우리가 공분을 살 정도였으니 

시민들은 오죽했겠어요 참 없어야 할 일인데..

      

PD 당시 전남 경찰이 무능했다고 

전두환은 평가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모 대원 때 5.18을 맞았고, 제대해서 경찰관으로

임용됐어요. 93년도 전남지방경찰청 때부터 

시위 진압 다중범죄 진압 담당을 했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기까지 시위가 많았어요. 


그때까지 시위 진압을 전담하다가 

시위가 약화되고 줄어드니까 다른 업무를 봤는데


경찰의 기본은 최종 목적이 변수 없는 안전! 

안전 진압이 최고의 덕목이었거든요. 

물론 진압 과정에서 변수가 생길 수 도 있잖아요.


그건 그때의 상황의 긴박성, 돌발성의 변수가 

나오는 것이지 신군부처럼 어떤 결과 발생을 염두에

두고 시위 진압을 하는 건 말도 안 되죠. 


PD 순전히 경찰 입장에서 무력을 사용한 

강압적인 시위 진압 vs 민주적인 시위 통제 중에 

뭐가 더 효율적인가요?

모 특히 광주전남에서는 그렇게 생각해요. 

5.18이라는 민주화 과정의 격동을 겪어서랄까?

당시 악화된 상황에서도 경찰의 기본 덕목은 

평화적인 시위 유도, 어떤 선을 넘지 않는 예방적 

시위 진압이었어요 


이 선을 넘으면 상호 격화되고, 

그러면 물리력이 강화되고, 

예상하지 못한 충돌이 나타날 수 있고, 

그걸 예방하는 차원의 선을 놓고 

그 지침에 충실한 게 전남 경찰이었거든요. 

 

근데 내 생각은 그래요.

그때 안병하 국장의 하나의 선 

그분의 의식 있는 결정이 지금의 민주화와 

연결돼 있다고 봐요. 


우리 광주 전남 경찰도 그때 그 시발점으로

지금까지 민주 경찰로서의 발전해왔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광주 전남의 시위 진압 

방식이라든가, 지침이나 목적은 시민의 안전,

그다음에 어떤 약속된 지점의 선을 넘지 않고 

준수하는 노력을 하고 있어요 

(시위) 진압을 위한 진압이 아닌 거죠.  

    

PD 그러고 보니, 광주 경찰의 클래스라는 사진이

네티즌 사이에 화제가 됐었어요.

그게 사실이네요?

모 솔직히 광주 전남에서 모든 시위 통제 기법이 

발전돼서 전국으로 퍼지는 양상을 한때는 

갖고 있었잖아요.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근데 그런 진압 방식이라든가 그런 게 

5.18을 기점으로 성숙돼 온 거예요. 


안병하 국장이 갖고 있는 5.18 때 

시민을 위한 경찰, 의연하게 대처했던 사상이

지금도 꾸준히 이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전국에 모범이 됐던 겁니다. 


그게 모양을 갖추기 위한 거라든가 

보여주기라든가 그런 게 절대 아니라고요.      


PD 안병하 국장님이 미친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는 거네요, 선생님이 보시기에 

안병하 국장님은 어떤 분인가요?

모 경찰도 5.18이 다가오면 대책을 세우잖아요. 

5.18 공원을 가보면 웅장하고 많이 발전해왔단 걸 

스스로 느끼거든요. 


그런데 우리 경찰이 설 자리는 어딜까? 

생각하게 돼요. 

우리는 너무 초라했어요. 함평경찰서 네 분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큰 그림을 그렸던 

안병하 국장은 빛도 없이 잊혀가고.. 

그런 생각을 할 때는 가슴이 아팠어요. 


5.18 행사를 기안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허전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우리도 그때 나름대로 뭘 해왔다고 자부하는데 

내놓지도 못하고..


그런데 뒤늦게 이렇게라도 조명되니까 

굉장히 (좋고) 


나도 대원 때 5.18을 맞이했는데 

퇴직을 앞두고 있는 이제라도 조명받으니까 

기분이 굉장히 좋습니다.


늦게나마 그분의 의식 있는 사상과 지휘가 

조명받는다는 게 정말 의미 있고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PD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만약 당시에 안병하 국장이 무력으로 진압했다면

어땠을까요? 선생님이 희생당하셨을 수도 

있었겠네요?


모 만약 그런 결정을 하셨더라면 아마 광주 전남은 

없다고 봐야죠. 미래가 없다고 봐야죠 


우리도 없고, 광주 전남 시민도 없고, 

시민 정신도 없고, 

민주라는 두 글자도 없어졌을 거고 

경찰이라는 존재가치도 없어졌을 거고

다 망가졌겠죠. 


그런데 한 분의 의식 있는 사고가 

오늘날의 민주화를 만들었다고 봐야죠. 


PD 특히 후배 경찰관들이 새겨들을 말씀 같네요-

모 경찰이 뭡니까? 경찰의 존재 의미가 뭐예요.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게 최고 가친데


무기를 든다는 것은 생명과 재산을 해치는 역할을 

하는 거 아니에요. 그건 본연의 역할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 순간 상상할 수 없는 비극이 

초래되는 거죠. 


그런데 안병하 국장은 경찰의 기본 정신에 

충실한 어떤 큰 그림의 사고를 했어요 


이런 것들이 전남 경찰을 살리고 

오늘날의 경찰의 존재 가치를 있게 

만든 거라고 생각해요.     


최근 미국에선 극렬한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무고한 흑인 시민을 숨지게 한 경찰의 과잉 진압이
촉발한 인종차별반대 시위이다. 

지금은 그 양상이 더욱 폭력적으로 변질됐다.
트럼프 정부가 연방정부의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미국의 대표적 진보적 도시인 포틀랜드와 
시애틀 등에 무장 진압 요원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폭동 진압 훈련을 받은 국토안보부(DHS) 소속
요원들은 경찰 표식이 없는 일반 차량을 타고
나타나 시위대를 무차별 체포했고
시민들에게 최루탄을 발사하고 강제 연행하고 있다.



소름 끼칠 정도로 기시감이 드는 광경이다.
80년 5월 광주와 겹치는 부분이 정말 많다.
이렇듯 40년이 흐른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폭력, 과잉 진압으로 인해 시위가 격화되고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당하고 있다. 

반면, 안병하 국장처럼 치안 책임자가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나서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그때 안병하 국장의 결단이
얼마나 힘든 선택인지, 또 용기 있는 행동인지
새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80-90년대 과잉, 폭력 진압의 흐름 속에
안병하 국장의 정신이 면면이 흘러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또 그 누군가들이 이어받았기에
그나마 한국의 시위 문화가 민주적으로 발전했고,
좀 더 평화적으로 정착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는 우리가 안병하 정신을 더욱 조명하고
널리 알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정의와 신념을 지킨다는 것이 반드시 헛되고
비극적인 일이 아니라는 교훈을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회사 인간들에게 큰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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