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평화누리길 4코스 <누에길>
철원 2차 2일 째 : 강원평화누리길 4코스 <누에길>
자등 119지역대 - 백골부대 - 신술터널 - 잠곡리 - 잠곡저수지 - 복주산 자연휴양림 - 하오터널
"얘야, 모두들 매일매일 발목까지 똥에 담그고 사는 거지. 하지만 가끔씩, 그 똥이 무릎이나 허리까지 차오르면 말이야. 그냥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 밖에 없는 거야. 너는 잘 나아가고 있는 거다..."
- 폴 오스터의 <4 3 2 1> 중 (2023.11.24 한겨레신문 재인용)
물길을 지나 산길로
강화, 김포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약 550km의 'DMZ평화의길(평화누리길)'. 지금까지 장대한 물길(서해~한강~임진강~한탄강~화강)을 따라 온 누리길은 철원의 마지막 구간인 강원 4코스 <누에길> 막바지에 이르러 산길로 바뀐다. 철원과 화천의 경계 복주산에서 시작해 태백산맥을 넘어 고성으로 가는, 장장 200km의 막막궁산이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강원 4코스 내내 국토횡단 길의 대전환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대자연의 축복과 형벌을 동시에 받은 기분이랄까. 이제부터 진짜 강원도 산골.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풍경과 여정을 예감하는 한편, 지금부터의 위험은 잠시 곤경이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조난이 될 수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날이 더 추워질수록 조난의 위험과 고통이 더 커질 것이고, 미리 알고 떠나지 않으면 대자연의 형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가장 결정적인 위험요소를 먼저 알리고 나서 국토횡단 대전환의 파노라마를 돌아보고자 한다.
문제의 시작, 안내도
평화누리길 여행자는 최전방 인적 없는 길을 안내표시만 믿고 하루 종일 걷는다. 여기서 '안내도, 표지판, 리본'은 빛이요 진리이다. 리본 하나, 화살표 하나만 잘못되어 있어도 여행자는 길 잃은 양이 된다. 물론 자주 헤매다보면 길치에게도 직감적인 방향감이 생길 때도 있고, 정해진 경로를 무시하고 다음 경유지를 바로 찾아가는 요령이 생기기도 하지만, 코스를 이탈해 다시 제 길로 돌아오기 위해 온 정신을 쏟고 나면, 영혼의 흐름이 끊겨 여행의 밀도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런데... 안내표시도 아니고 안내도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 강원평화누리 4코스의 피할 수 없는 위험은 잘못된 안내도에서 비롯된다.
안내도엔 4코스의 전체거리가 11Km, 도보로 2시간 50분이라고 되어 있다. 다른 구간의 절반 수준이다 (자전거길, 도보길, 각종 홍보물 모두 동일한 안내도 사용). 반나절 안에 걷기를 마치고 서울로 출발하면 딱 좋은 코스 같지만... 안내도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커다란 함정이 마지막 구간인 복주산 휴양림에 숨어 있었다.
출발지 자등 119지역대에서 복주산휴양림까지 천천히 걸어 3시간, 휴양림에서 계곡을 따라 1시간 내내 비경을 올라가면 산 중턱에 이른다. 안내도 상으로는 시간과 거리 모두 4코스가 끝나야 할 지점. 그런데 누리길 화살표와 이정표는 복주산 정상(해발 1152미터)으로 가는 등산로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니까 4시간 걸려 도착한 종착지에서 안내도에도 없고,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산악행군을 새로 시작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때부터 누리길 여행자에게는 봉변이나 다름 없는 길고 험준한 등반이 시작된다. 가파른 산비탈, 붕괴된 멘탈, 고갈된 체력, 갈증과 허기...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4시간의 등반이 계속되는데... 더 얘기하자니 출발도 전에 여행기가 끝날 판. 그날의 무용담과 철원군청에 드리는 건의는 끝에 가서 하기로 하고, 이제 평화롭기만 했던 그날 아침으로 돌아가 강원 4코스를 걸어보자.
백골부대와 누에마을
접경의 아침. 화강 천변에서 눈을 떴다. 텐트를 접고 큰길로 나가 민관부락을 한바퀴 돌아보니 7시. 문을 연 슈퍼를 만나 담배와 콜라를 구입, 카페인과 니코틴을 충전하고 누리길에 올랐다.
4코스 출발점 '자등 119지역대' 앞은 육군 3사단 상징탑이 있는 자등리 삼거리. 직진을 하다 누리길 표시가 없어 다시 삼거리로 돌아와 하늘에 걸린 누리길 화살표를 겨우 발견했다. 2일차 치고는 출발이 꽤 더디고 복잡하구나... 하며 도로변을 걸어올라가니 백골부대 조형물이 버티고 섰다. '살아도 백골, 죽어도 백골'. 구호와는 딴판으로 느긋하게 부대로 향하는 군인들의 승용차들을 따라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땐 미처 몰랐다. 대형 해골이 놓여있는 바로 그 지점이 물길에서 산길로 바뀌는 대전환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잠시 앉아 절반의 성취를 자축하고, 각오도 다지고, 평화를 기원하기도 했을 텐데...
순간의 의미는 항상 그 순간이 지나고 나서야 명확해진다.
전방분위기가 진하게 느껴지는 오르막길. 3사단 본부 담 너머로 수출효자라는 K-전차들이 줄지어 이동 중이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전을 방불케 하는 포성과 총성이 작렬한다. '쾅! 다다다다.... 쾅! 다다다다...' 포격과 총탄 소리가 너무도 생생하여 전장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예전 같았으면 초반 전세를 가르는 이동로이자 방어선이었을 신술고개. 하지만 다시 전쟁이 터진다면 여기보다 먼저 서울과 평양이 불바다가 될 테니, 어차피 전 국민이 '살아도 백골, 죽어도 백골'이다. 그리고 이 정부는 지금 9.19합의를 파기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똥이 평화의 무릎을 넘어 허리, 목까지 차오르고 있는 지금, 이 길을 걷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잠곡리, 누에마을
불길한 포성에 쫓기 듯 산을 넘어 잠곡리마을에 들어섰다. 화강(남대천)처럼 여기도 '잠곡리' 대신 '누에마을'이라는 우리말 이름을 밀고 있는 모양. 누에를 많이 쳐서 누에마을인 줄 알았는데, 입구의 산 모양이 누에 모양이라 누에마을이란다. 마을 안내도를 보니 입구 뿐 아니라 사방 산자락이 다 누에 모양, 그 틈바구니에 힘겹게 인간들의 터가 이어져 있다.
빌딩 사이로 빈약하게 초록이 이어진 도시, 우거진 초록 사이 골짜기의 산촌.
어느 곳이나 살아내기는 쉽지 않다. 각자 더 견디기 쉬운 곳을 택할 뿐.
잠곡저수지
누에마을을 지나 산복도로를 오르면 난데없이 커다란 저수지가 나타난다. 화강과는 멀찍이 떨어진 이곳에 이렇게 큰 저수지가 있을 줄이야. 지도를 확인해 본 결과 화강과는 다른 물줄기다.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물일까? 어디서 왔던지 간에, 쉬지 않고 흘러 또 다른 물줄기를 만나 서해바다로 갈 것은 분명하다.
잠시만 들여다보면 모든 자연은 거대한 순환 중이다.
화강(남대천)의 관계공사가 일제시대에 이루진 것이라고 해서, 잠곡저수지(누에호) 또한 오래 전 만든 것인 줄 알았으나 불과 몇 년 전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름만 들어서는 주변에 매운탕 집 좀 있을 줄 알았건만, 저수지 끝에 시골마을이 건너다 보일 정도로 인적 없고 청정하다. 이쯤에서 밥을 사먹으려던 계획은 믈건너 갔지만, 곧 유원지가 될 것만 같은 잠곡저수지의 청정한 풍경을 만났으니 그걸로 족하다.
저수지로 흘러들어오는 계곡의 물길을 따라 누리길이 이어져 있다. 올라갈수록 점점 깊은 자연으로 숨어들어가는 기분. 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샘물이 고이는 아늑한 자리를 만났다.
풍경을 보자마자 여장을 풀고 신발을 벗었다. 마음 같아선 온몸을 던지고 싶었지만, 물이 너무 맑아 발을 담그기도 미안스러웠다. 물 위로 솟은 바위에 가만히 걸터 앉으니 시간이 멈춘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어쩌면 다시는 오지 못 할 이름 없는 이곳. 물멍으로 1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하루 종일 머물러 있어도 좋을 곳이지만 가야할 길, 가야할 곳이 있기에 발을 말리고 신을 신었다.
복주산휴양림 입구에서
누에마을에서 나와 산복도로를 따라가면 드디어 복주산휴양림 입구. 국립휴양림 앞이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황량하다. 도로에서 백여 미터 가량의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면 매표소. 직원이 없는 건지 자리를 비운 건지...
매표소를 지나쳐 평화의길 이정표를 만났다. 평화누리길의 다음 경유지는 '하오터널'인데 여기는 왜 '명월2리 정류장'이라고 써 있을까? 이정표에 뭔 내용을 길게 붙여 놓은 걸까?
'명월2리 정류장은 복주산 등산로를 넘어 화천 사창리 방향입니다. (휴양림에서 약 4km)'
'휴양림 안으로 들어가면 화천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는 모양이구나. 거리가 4km면 안내도 상의 휴양림 구간 2.9km하고 비슷하군. 서둘러 가면 한 두시간 걸리겠는데?' 하고 나름대로 이해했으나... 그것은 나만의 어리석고 위험한 착각이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조난 지경을 피하라는 국립공원 관리소 측에서 보내는 경고였으나, 초행자로서는 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어진 길은 하나. 사람이 못 갈 길을 누리길로 만들어 놨을 리는 없을 테고, 뒤돌아가지 않는 한 다른 선택지도 없으니 계속 가 보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기도 했다. (이정표 관련해서 철원군청에 요청할 민원사항은 나중에 한 번에 정리하겠다)
원시자연의 향연, 복주산 휴양림
이 길이 맞나? 하는 의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휴양림에 들어서자마자 그 풍경에 혼을 빼앗겨버렸기 때문.
민통선이 아니었다면 남아나지 않았을 천연의 비경, 평화누리길이 아니면 만날 수 없었던 대자연이 그곳에 있었다.
평화누리길이기에 그 경이와 감동이 더 특별했다.
이곳이야 말로 서해, 조강, 임진강, 한강, 한탄강, 화강을 따라 온 장대한 물길의 멋진 피날레요,
국토횡단길 절반의 지점에 만나는 물길과 산길의 드라마틱한 대전환이기 때문!
청정한 계곡을 따라 한 시간 정도 산행하기 딱 좋은 산책로. 엄청난 절경은 아니지만 자연 그대로의 다채로운 모습이 끊임없이 이어진 원시자연의 향연이다. 중간에 평화누리길 이정표가 있어 마음도 편했다. 슬슬 허기가 몰려오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좋았다.
물줄기가 점점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물길과 산길의 구분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이끼를 덮어 쓴 바위들을 밟고 이쪽 저쪽으로 건너다니며 산책로를 찾아다닌다. 여기서 주의. 한 번이라도 건너 갈 곳을 놓치면 길 없는 산비탈을 타고 올라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나는 어김없이 건너야 할 곳을 놓쳤고, 낙엽 쌓인 원시림 속을 한참을 헤매다 겨우 계곡 길을 찾아 돌아왔다.
'설마... 샘물이 솟아나는 그 현장을 보게 되는 건 아니겠지?' 하는 은근한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곧 마를 것 처럼 점점 좁아지던 물길, 난데없이 커다란 바위를 뒤덮은 폭포가 되어 시원하게 쏟아진다.
벤치에 앉아 숨을 돌렸다.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으니 오늘 여기엔 나 밖에 없는 모양. 대자연과 단 둘이 마주앉자 또 다시 시간이 멈춘다.
서해에 이르는 장대한 물길의 진정한 시작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여기서 깨졌다. 길은 물길이 아닌 살비탈을 향해 뚫려 있었고, 그 입구에 두 개의 안내판이 있었다. 하나는 누리길 화실표, 다른 하나는 이제 휴양림 길이 끝나고 등산로가 시작됨을 알리는 등산로. 그런데 등산로를 보는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구 안내판에서 말한 등산로가 이것을 말하는 모양인데, 등성이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 아니라, 1152m의 정상을 찍고 길게 능선을 타며 하산하는 제대로 된 등산로다. 정상까지는 휴양림 구간의 약 두배, 내려가는 길은 그보다 더 길다. 거리도 거리지만, 그림만 봐도 산책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길임을 알 수 있었다.
안내도엔 없던 등산로. 어질어질하다. 정말 이 길을 계속 가도 괜찮을까? 등산로 지도와 누리길 화살표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화살표가 선명했다. 순간 발동하는 생존본능. 종착지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알고 물을 다 마셔버린 것이 생각났다. 물병을 채워야 한다. 얼른 달려내려가 폭포 한 옆 좁은 바위 틈에 병을 세워 놓고 계곡물을 받았다.
복주산 등반기
아기자기한 휴양림 산길이 등산로에 들자마자 갑자기 무자비해졌다. 반나절이면 끝나는 가뿐한 코스인 줄 알았는데... 너무도 변무쌍하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인 것은 내 사정. 길고 긴 산비탈 급경사 길에서 피로와 허기가 목까지 차 올랐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어봐야 시간만 갈 뿐이요, 쓰러진들 지나가다 발견해 줄 등산객 하나 없다. 내 발로 가긴 가나 도리 없이 떠밀려 가는 꼴이다.
겨우 올라선 능선길은 길고 완만했다. 우거진 원시림에 둘러싸인 걷기도 좋고, 보기도 좋은 등산로 구간. 샤샤샤샤샤...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소리. 이 능선은 복계산까지 이어지며 장벽을 이룬다고.
그러나 역시 큰 산은 정상을 그냥 내어주지 않았다. 능선이 비죽비죽 솟은 바위로 변하며 로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음 로프를 만났을 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로프를 타고 바위를 오르니 걷는 것보다 훨씬 쉽고 재미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암벽등반은 보기보다 쉬울 지도.
능선길과 로프를 9번쯤 넘었을까. 다시 나타난 로프를 올라가니 갑자기 전망이 터진다. 아무 것 것도 없는 뾰족한 바위 위에 서니 저 멀리 철원에서 복주산 아래 화천까지 훤히 내려다 보인다. 힘들고 긴 오르막은 언제나 정상에 선 이 짧은 순간에 의해 지워진다. 그래서 산에 미치는 거겠지... 이제부터 가야할 동네 화천을 바라보며 아끼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봉우리에서 내려와 또 다시 로프를 만났다. 바위를 타고 올라간 그곳이 진짜 정상이었다. 좀 전까지 정상인 줄 알았던 뾰족바위 봉우리와는 달리 흙바닥도 있고, 표지석과 등산로 안내판도 있지만, 시설이라곤 그게 다다. 나무에 가려 전망은 좀 전 봉우리보다 못한데, 어쨌던 본의 아니게 한 번 더 정상 정복의 기분을 즐길 수 있었다. 아... 역대급으로 버라이어티한 코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정상에서 내려오자마자 하산길이 시작됐다. 바위가 많은 가파른 길의 연속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옆으로 내려와야 할 정도로 험하다. 정상에서 잠시 잊었던 피로, 갈증, 허기가 몰려왔다. 현재시각 오후 4시. 출발한 지 9시간이 지났고, 아직까지 한 끼도 못 먹었다. 챙겨온 비상식량은 콩알만 한 사탕과 커피믹스. 사탕이 물려서 커피믹스 가루 2봉을 입에 털어넣고 마지막 남은 계곡수를 마셨지만 허기가 가시지 않는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았지만, 이제 물도 없으니 살길은 빨리 내려가는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이 정도까지 힘든 적은 없었다. 만일 나보다 체력이 약한 사람이라면... 도중에 쓰러지거나 탈진해서 구조요청을 하고도 남았을 듯. 돌아가면 다음 여행자를 위해 주의할 점을 알리고, 무엇을 어떻게 시정을 해야 하는지 밝혀내리라 다짐했다. 그러다 마침내... 산비탈 우거진 숲 사이로 포장길이 나타났다.
아... 일단 조난은 면한 것 같다.
포장을 내려와 강원 4코스의 종점 하오터널 위에 다다랐을 때 또 다시 대 혼돈에 빠졌다. 산길이 끊이지 않고 그대로 강원 5코스(화천 1구간) 시작으로 이어지기 때문. 다시 산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오늘 끝내 빈 속으로 산골짜기에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내게 되고야 마는 건가?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정표를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화천으로 넘어가는 연결지점을 800m나 지나왔다. 그리고 현위치는 잠곡리. 고가로 나가보니 복주산휴양림 앞으로 바로 연결되는 도로다. 이제 안내도에 있는 2.9km의 비밀이 풀렸다. 휴양림으로 들어가지 말고 이 도로를 따라 내려와 임도로 들어가 화천으로 넘어가라는 뜻이었던 것.
필자의 사전조사 부족과 길눈 어두운 건 인정하더라도, 저 위 등산로 입구에 복주산 정상을 당당하게 가리키고 있는 평화의길 화살표가 있지 않은가. 안내가 불명확한 것도 문제고, 원래 코스가 휴양림을 보지 않고 지나가게 되어 있는 것도 문제...
철원군청에 바람
강원 4코스는 역대급으로 다채롭고 위험한 구간, 후기에도 역대급으로 공이 들어갔다.
먼 길을 돌아 복주산 입구로 돌아왔으니 안내도와 코스설계의 문제점과 대안을 정리할 때가 됐다.
복주산휴양림 누리길 구간 안내의 문제는
1. 안내도와 실제 현장의 이정표가 다르게 되어 있다.
2. 누리길 이정표(화살표)가 도로길과 등산로 양쪽에 다 설치되어 있어 노선이 두 개가 되었다.
3. 복주산 진입로와 입구에 나름 설명과 경고가 있지만, 초행자로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강원 4코스의 설계와 안내가 뒤죽박죽이 된 이유는 미루어 짐작이 간다. 철원군청은 평화누리길을 통해 너무 좋은데 잘 알려지지 않은 복주산휴양림과 복주산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누리길로는 너무 힘든 길인데다, 코스가 끝나도 화천으로 넘어가는 산길의 연속. 안내도는 평화누리길에 맞춰 놓고 진행한 뒤, 끝내 서운한 마음 떨치치 못해 '에라 모르겠다' 하고 길안내를 두 갈래로 다 해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해서 안내도를 보고 따라 온 여행자는 화살표를 따라 듣도 보도 못한 조난의 길로 들어 서게 되었고.
이에 대한 대안은... 의외로 간단하다. 다른 평화누리길의 경우, 명소가 옆에 있지만 코스가 너무 길어져 코스설계를 하기 어려운 경우, '순환구간'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복주산 구간 안내판을 수정하면 다음과 같다.
휴양림에 들어가지 않고 도로를 따라가는 길은 4코스, 복주산 휴양림 산책로만 보고 돌아나오는 길은 4-1코스, 등산로를 따라 복주산 정상을 넘는 길은 4-2코스로 구분한다. 그리고 복주산 휴양림 진입로와 입구에 각 코스별 상세안내도를 만들어 놓으면 각자의 일정과 체력에 맞춰 코스를 선택할 수 있음은 물론 초행자도 전체 코스의 윤곽과 난이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철원군청 담당자님께 큰 사고 나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조치 부탁드리며, 누리길 여행자는 휴양림산책로만 올라갔다 내려오는 4-1코스 정도를 추천하고 싶다.
아, 고마운 사람
복주산 입구에 도착할 무렵 올초부터 사무실을 같이 쓰는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배고파 죽겠다고 하소연을 했더니, "지도 보니까 거기 근처에 진짜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하며 걱정한다. 사실 대책이 없긴 하다. 휴양림 앞엔 버스정류장이 없으니 잠곡리 버스정류장까지 내려가야 할 판이고, 그마저도 하루에 몇 대가 다니는지 모르는 상황. 갈 길이 너무 멀었다. 그러자 대뜸 "지금 차 갖고 갈 테니까 기다리세요. 서울 마포에서 한시간 반 나오네요." 한다. 아이, 고마운 사람.
전화를 끊고 동생을 기다리기 위해 복주산휴양림 매표소 근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꾸벅꾸벅 졸았다. 잠깐 눈을 뜬 틈에 관리소 직원 분이 지나간다. 사람이다! 그분을 잡고, 아침부터 여기까지 얼마나 어렵게 왔는지, 또 얼마나 배고파 죽겠는지 하소연을 했다. 잠시 고민하시는 직원분.
"사무실 안은 외부인이 못들어 오게 되어 있고, 컵라면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그러더니 잠시 후, 컵라면에 김치, 생수까지 챙겨서 나오신다. 아, 고마운 사람.
매일매일 발목이 똥에 잠기고,
허리 너머로 똥물이 차 오르는 시절을 살면서도,
그래도 가끔 웃기도 하고, 행복할 수도 있는 건,
아직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경이로운 자연이 남아 있고,
너른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