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Chu Apr 05. 2021

평화누리길의 진면목이 시작된다

평화누리길 8코스 반구정길 - 1편

사전 선거 첫날, 평화에 투표를 하고 누리길로 향했다.

‘평화누리길 8코스 반구정길’은 반구정에서 율곡습지공원까지로 파주 관내 4개의 평화누리길 중 3번째 구간이다. 임진강을 끼고 민통선을 따라 걷는 내내 그동안 평화누리길에 기대했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번만 걷기엔 아쉬울 정도로 풍광과 이야기가 넘쳐난다.

드디어 평화누리길의 진면목이 펼쳐지기 시작하는 느낌, 서서히 절정으로 다가가는 느낌이다.


드디어 임진강을 만나다


투표니 뭐니 오전 볼일을 보고 출발한 탓에 문산역에 12시가 다 돼서야 도착했다. 반구정으로 가는 마을버스는 한 시간에 한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택시를 탔다. 운전을 하며 호일로 싼 김밥 한 줄로 점심을 때우느라 바쁜 기사님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문산 하면 완전히 최전방이었는데 아파트가 참 많아졌네요.” 그랬더니 운전기사님 김영삼 때 하천 범람으로 물난리 났던 얘기부터 5,6년 전 철로복선화로 지하철이 뚫린 얘기까지 좔좔 풀어놓는다. 열성적으로 썰을 풀어주셨기에 손님을 태운 채 마스크를 벗고 김밥을 먹는 부주의함을 용서하기로 한다. 말로만 들어서는 이 양반 토박이인가 보다 했는데, 내릴 때 다 돼서 알게 된 바로는 이 분 먹고 살기위해 흘러흘러 몇 년 전 여기로 오게 되었단다. 그런 분이 어떻게 30년 전 문산에 났던 물난리를 본 듯이 기억하는지,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게 되었는지 알아내기엔 반구정이 너무 가까웠다.


반구정 입구


지난번 7코스를 마칠 때 닫혀 있어 아쉽기만 했던 반구정의 문이 열려 있다. 이곳의 정식명칭은 ‘황희선생유적지’로 입장료 1000원을 내고 들어가게 되어 있다. 관리사무소에 근무하는 분이 시 공무원인지, 황희선생의 후손인지 궁금했으나 물어보지는 못했다. 기와담장으로 둘러쳐진 유적지 안에는 전망 좋은 정자 반구정말고도 멋진 한옥 경모재, 선생의 초상화를 모신 영당, 선생의 업적과 유품을 전시한 방촌기념관 등이 정갈하게 자리하고 있다. 황희 선생이 말년을 기러기를 벗 삼아 보냈다고 하는 역사 깊은 곳이지만 건물 자체는 모두 새것이다. 원래 있던 건물들은 모두 6.25때 전소되었고 전후에 다시 지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자연 그대로 남아 있는 임진강의 물줄기가 역사 그 자체를 간직하고 있으므로 아쉬움은 크지 않았다.  


반구정


반구정 계단을 오르며 어쩔 수 없이 딸아이를 떠올다. 아이는 가장 볼 것 없고 험한 7코스 25km를 같이 걸어와 반구정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대형장어집 뒷마당에서 숨어서 보듯 철조망 사이로 임진강의 낙조를 보고 돌아서야 했다. 7코스 막판 두 시간을 반구정이 나타나기만을 바라며 걸어 왔기에 그 아쉬움이 더 컸더랬다.


반구정의 전망은 기대이상이었다. 확 터진 임진강의 풍광. 평화누리길을 따라 서해와 조강, 한강을 거쳐 임진강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성취감도 잠시, 자연 그대로의 자연과 군사적 긴장으로 인한 적막감의 공존이 불러일으키는 묘한 감흥에 빠져들었다. 길게 늘어선 철조망을 따라 옛 모양 그대로 흐르는 누런 물줄기가 좋았고. 강 건너 군사시설을 품고 자연 상태로 방치된 민간인 통제구역의 고요함도 좋았다. 스산한 비무장지대. 아직 봄빛은 아니지만 무른 땅 속에서 봄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반구정에서 바라 본 임진강 전망


철조망을 걷어내고 600년 전의 더 없이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풍광을 떠올려 보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제가 풀리는 그 순간부터 자연은 급속도로 망가지기 시작할 것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봄을 준비하듯 아픈 역사로 얻게 된 소중한 자연을 잘 보존할 준비를 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임을 마음에 새겼다.       

반구정

반구정에는 솟아 오른 바위 위에 두 개의 정자가 있다. 앙지정(좌)과 반구정(우). 앙지정이 있는 자리가 원래 반구정이 있던 자리였다고 하니, 지금의 반구정은 정자가 없던 자리에 하나를 더 지은 것일 게다. 두 개의 정자를 올릴 수 있는 자리이긴 하나 무리수였지 싶다. 원래 반구정에서 보였을 270도로 확 터진 임진강의 전망을 옆에 있는 정자가 서로 가리게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한 시라도 빨리 누리길을 출발해야 했으나 내려오기가 아쉬웠다. 하루 종일 여기에 머물러도 먼 길을 온 보람이 있겠다 싶을 정도로 멋진 전망이었다.  


황희와 파주


반구정은 황희가 말년을 보낸 곳이라 한다. 우리 나이 15살에 공직생활을 시작해 88세에 은퇴, 90에 돌아가셨다. 황희와 파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기록상 55세이다. 태종의 총애 속에 거의 모든 부서의 판서(장관)을 지낸 그는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충녕대군(세종)을 책봉하려하자 2년 여간 강하게 반대하다 폐서인이 되어 파주 교하로 유배를 당한다.


반구정. 임진강 너머 민통선 지역


태종은 그를 유배에 처하면서도 필요할 때면 언제든 불러 조언을 듣기 위해 가까운 파주에 두었지만, 유배지가 한성에서 너무 가깝다는 대신들의 항의를 받고는 그를 다시 남원으로 보낸다. 파주는 황희의 고향인 개성과 가깝고, 남원은 선대의 고향인 장수와 가까운 곳이었으니 태종의 배려가 컸다고 하겠다.


이후 반구정은 그의 나이 70 무렵에 다시 등장한다. 제주도에서 키우던 국가소유의 말 1000여 마리가 죽는 일이 발생했을 때, 관리인 태석균을 위해 사헌부에 선처를 부탁한 죄로 파직당하고 반구정에 은거하다 1년 뒤 다시 조정으로 불려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은퇴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여기까지가 기록에 나타난 황희와 파주의 인연이다. 


황희 선생 동상과 재실인 경모재


두문불출의 진실


그런데... 조선시대 최장수 영의정이 40년 넘게 오가며 지낸 사연이 너무나 드라이하다. 기록되지 않은 무슨 곡절이 있을 것만 같은데 감이 오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할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가뜩이나 늦어진 누리길 출발에도 불구 방촌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전시실에 그의 유품 몇 점과 업적을 정리한 전시물이 진열되어 있었다. 


방촌기념관


전시물을 살펴보다 어릴 때는 무심하게 지나친 한 가지 사실이 눈에 들어 왔다.

그가 개성에서 출생한 고려의 유신이라는 점이다. 연표상 고려시대 그의 경력은 다음과 같다.

‘1378년 14세 음보로 복안궁 녹사가 됨, 21세 생원시에 급제, 23세 진사시 급제, 27세 문과에 급제, 28세 성균관 학관’.

요즘으로 치자면 고위공무원의 총명한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인턴으로 취업, 근무와 공부를 병행하며 9급, 7급 공무원 시험에 거듭 합격한 후 행정고시까지 패스, 출세가도에 오른 것이다. 그는 반짝이는 총명함으로 서얼출신이라는 출생의 한계를 가뿐히 뛰어 넘었다.  


그런데 아뿔싸. 나이 서른에 고급공무원이 되자마자 고려가 망한다. 이성계를 따를 것인가, 고려왕조와의 의리를 지켜 출세를 포기할 것인가? 그는 ‘일단’ 선배들을 따라 의리를 지키기로 한다. 당시 새 왕조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한 선비 73명이 개성을 벗어나자마자 관복을 벗어던지고 근처 개풍군 산골짜기 두문동에 단체로 틀어박혔다고 하는데, 황희는 소위 이 ‘두문불출’에 가담한 최연소 맴버였다.


경모재 앞에서 바라 본 임진강


그들 대부분고려왕조 실무핵심 인력인 국처실과장급 선비였다. 가뜩이나 인재난에 단체사직이라니... 나라를 새로 세워야하는 이성계에게 정치적으로나 실무적으로나 큰 타격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성계는 더 이상 피를 보긴 싫은데... 하는 마음으로 두문동 일대를 포위하고 그들에게 새 정권에 협조할 것을 설득도 하고 협박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결국 이성계는 내 편을 만들지 못할 바에야 죽여 버리기로 결심히고 불을 질러 그들을 모두 태워 죽였다. ‘두문불출’이라는 고사성어 여기서 나왔, 황희는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 3년 후 성균관학사로 복직, 곧이어 세자우정자, 즉 세자의 선생님으로 콜업되어 조선의 신하가 되었다고 한다.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73명 중 72명이 불타죽고 황희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는 둥, 선비들이 막내를 죽기 아까운 인재라 여겨 밖으로 내보내줬다는 둥, 이것이 황희 인생의 치욕 중 한 장면이라는 둥 설레발을 풀지만, 두문불출과 관련 된 사태가 정권교체기에 벌어진 일이다 보니 여러 정황이 상당히 불명확해 보인다. 자세한 이야기는 당시 불타죽은 선비의 후손이 쓴 ‘두문동실기’를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상식적으로 볼 때 이 두문불출 사태는 과도하게 신화화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두문불출’이라는 말 자체부터 그렇다. 이 말은 옛날 중국 사서에서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더라’라는 단순한 문장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두문동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문장에 정통한 선비 중 하나가 산으로 들어가며 고전의 글 한 줄을 살려 자신들이 있는 곳을 두문동이라 이름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개풍군 일대 두문동이라고 하는 곳이 여러 곳이라고 하는 것도 두문동이라는 것이 추후에 명명되었을 가능성을 뒷받침 한다. 고려유신 73명이 한 동네 몰려 지내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산골 여기저기 흩어져 지내다보니 그들이 머물던 곳이면 어디나 두문동으로 부르게 된 것일 게다. 거기서 살아나온 이가 황희 한 사람 뿐일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살아나온 사람 중 그가 유달리 유명해진 것은 아닌지... 싶다.


최선의 인간


이 두문불출의 전설에서 나의 주목을 끄는 것은 ‘변절’이 아니라 ‘고려의 유신’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나이 서른에 전 정권인사라는 정치적 핸디캡을 안고 새 출발을 해야 했다.  그는 분명 드문 인재였다. 나이 서른에 모든 국가고시를 패스한 학문적 자질, 15년 동안 세 명의 임금을 거친 풍부한 행정경험과 정무감각을 겸비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기세등등한 건국공신들의 틈바구니에서 버티자니 얼마나 눈치가 보였을까. 누구 밑에 줄을 서자니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고, 따로 무리를 만들면 역모를 꾸민다고 의심받을 게 뻔했다. 왕가를 감싸면 변절한 간신이라 욕을 먹을 것이었고, 왕명에 반대를 하면 아직도 고려를 못 잊는 것이냐며 충성심을 의심 받기 좋았을 것이다. 승진에 애를 쓰면 공신들에게 견제를 당할 것이고, 재산이라도 늘릴라 치면 부정축재자로 몰릴 것이 분명했다.


영당지 내 황희 선생 영정


살 길은 분명했다. 오로지 잘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할 것, 언제나 유교적 원칙과 법도에 충실할 것, 절대로 당파와 정쟁에 휩쓸리지 말 것. 살자면 항시 그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했고, 또 그것이 고려의 유신이었던 자신을 믿어 준 태조와 태종과 세종에 대한 도리라 여겼을 것이다. 황희선생의 청백리, 원칙주의는 전정권 인사의 불가피한 생존전략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겠구나... 방촌기념관을 나설 때 자연스레 떠오른 생각이다.  


나의 이런 생각을 그의 후손들이 듣는다면 분명 무엄하다고 화를 내겠지?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위인이었던 인간이 있던가. 위인도 결국 약한 인간이거늘... 결국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고, 생존을 위한 최선의 덕목을 찾아내고, 그것을 평생 지켜나간 것 만으로도 인간의 최선, 최선의 인간이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혼자 묻고 답하며 급히 누리길을 출발했다.

 

반구정을 두고 가기 전에 한 번 더 풍광을 보고 싶었지만...  더는 출발을 늦출 수 없았다. 누굴 탓하랴. 다 서울에서 늑장을 부리며 최선을 다하지 않은 내 탓인 것을.


황희선생의 목소리


두문불출과 최선의 인간... 유적지를 벗어나고 나자 건조한 기록 속에 숨겨진 파주에 서린 황희의 내밀한 감정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개경 출신인 그가 50중반 유배를 당하며 처음으로 파주에 갔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곳을 마음에 두었을까? 임진강은 남한과 북한을 가르기 이전에 고려와 조선을 가르는 강이었다. 그는 조선의 부름을 받고 마지못해 개경에서 한성으로 내려오다 이곳 강가의 바위를 만났을 것이다. 송악산을 바라보며 동료들을 불태워 죽인 왕조의 신하가 되려는 자신을 한없이 부끄러워 했을 것이고, 바위 위에서 고려왕조와 먼저 간 동료들에게 사죄의 절을 올렸을 것이다. 반구정의 봉우리는 그에게 뼈 아픈 통한의 현장이었을 것이다. 


그 깊은 통한을 이해하자 그가 유배를 당하면서까지 양녕대군 폐위에 반대한 진짜 이유를 헤아릴 수 있었다. 양녕대군 폐위는 고려왕조와 동료를 배신한 것에 대한 그의 죄책감을 되살려 냈을 것이고, 그는 또 한 번 변절을 강요당하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 그는 더 이상의 타협을 거부하고 개경과 가까운 파주에 자리함으로써 변절이라는 흑역사를 끊고, 나아가 고려 충신들의 절개를 환기시켜 권력만을 쫓는 개국공신들과 자신이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임을 명확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훌륭한 신하는 훌륭한 임금 아래에서만 나온다 했던가. 몇 년 후, 세종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그를 불러다 자신의 대리인으로 내세움으로써 개국공신들의 위세를 제압했다. 그렇게 황희는 세종의 사람이 되었고, 20년 동안 두 사람은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다. 그가 정치적 곤경에 처할 때마다 이곳으로 내려오고, 세종이 어김없이 그를 다시 불려 올린 것조차 두 사람의 이심전심은 아니었는지.  


반구정을 돌아보며 시작하는 누리길


먼길 갈 생각에 마음은 급한데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자꾸 뒤돌아 보았다.    


다시 통한의 눈물이 서린 이 자리에 섰다. 누런 물결 위에 고려에서 조선으로 맥없이 떠내려 온 비루한 운명이 출렁인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는 나날은 세월이 흘러도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벗들은 다 죽은 지 오래, 세상엔 공신의 탈을 쓴 탐욕만이 날뛴다. 이 순간 나의 벗은 오직 저 기러기 뿐. 세상이 변하고 갈라져도 한결같이 제길을 따라 날아가는 저 기러기야말로 진정 벗을 삼을만 하지 않은가. 아직 살아 있지만 이미 죽었어야 할 몸. 더 바랄 것도 버릴 것도 없다. 그래, 지난 일에 연연하지 말고 갈 길로만 가자. 죽는 그날까지 가야 할 길을 따라 내 할일을 하며 쉼없이 날아가자. 바람이 불어오면 먼길을 마다하지 않는 저 기러기처럼... 


반구정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평화누리길에 오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