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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Aug 19. 2021

원대한 상상

평화누리길 8코스 반구정길 2편

 왜 평화누리길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저 걷고 싶어서 시작한 길. 하지만 굳이 이 길을 고른 데에는 뭔가 더 강력한 부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 선명하게 인지하지 못한 내면의 요구 같은 것 말이다. 그러다 대통령님의 광복절 경축사를 듣는 도중 종이 울렸다.


"우리가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한반도 평화를 꿈꾼다면

우리의 상상력은 한반도를 넘어 유라시아를 넘나들 것입니다."

 - 2021년 8월 15일 문재인대통령 광복절 경축사 중



상상력은 하늘에서 떨어지지도, 맨땅에서 솟아나지도 않는다. 익숙한 연결들 속에서 새로운 연결의 가능성을 포착할 때 비로소 상상은 시작된다.


2년 전 봄. 급속한 남북화해 무드 속에서 나름 막연하지만 강렬하게 새로운 상상을 위한 준비가 필요함을 느꼈던 것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도보라는 쉼표없는 여정을 통해 촘촘한 상상의 지도를 미리 그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경계를 따라 걸으며 그 너머로 이어풍경과 이야기를 몸으로 가늠해보고 싶었고, 그래서 원대한 상상을 위한 나만의 준비이자 전쟁으로 그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갑작스런 깨달음에 마음이 동하여 석 달 동안 미루고 있던 8코스 반구정길 후기를 이어간다. 8코스는 반원형의 임진강 강둑 안쪽을 빙 둘러 따라 걷는 길이다. 먼저 코스를 대략 살펴보자면... 반구정의 전망으로 시작해 임진강역을 지나 마정리 너른 들판을 가로 지르고, 장산을 넘어 임진강과 강 가운데 놓인 섬 초평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화석정을 지나 율곡습지공원에 이르는 코스이다.

 

거리는 16킬로미터 남짓으로 다른 코스의 4분지 3 정도에 불과히지만 시작과 끝에 임진강의 광활한 전망이 고, 자연풍경과 역사유적이 잘 맞물려 있는 짜임새가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간혹 만나는 오르막은 험하지 않고, 볼썽 사나운 난개발도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아늑하다. 언제 누가 가더라도 즐겁고 가볍게 평화누리길의 매력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코스.

 

혼자만 보기 아까워 갔다오고 나서 한 달 후 딸아이와 다시 걸었다. 딸아이와 처음 같이 걸은 곳이 하필 볼 것 없고 남개발이 한창인데다 길까지 험한 7코스였기에, 너무 늦게 도착한 나머지 그나마 기대했던 반구정의 문이 닫혀 있어 임진강 전망을 보지 못하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기에 학원 비는 날을 호시탐탐 노려 한 달만에 날을 잡을 수 있었다.

 


반구정은 황희선생 유적지 안 임진강가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이다. 고려의 촉망받는 청년관료로 시작해 조선왕실의 관료로 물경 70년이라는 전무후무한 공직생활을 지낸 공무원의 신. 선생은 고향인 개경이 바라다보이는 이곳에 집과 정자를 짓고 말년을 보냈다. 반구정을 서성이며 여기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알길 없는 그 깊은 속내를 헤아려보다 지난 여행기를 두서없는 억측과 사념으로 채워 버렸다. 결론 없는 잡설이 많아지는 건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는 안좋은 징조.

 

다시 찾은 반구정의 하늘은 지난 번과 달리 화창했으나 풍경은 여전히 스산했다. 강 건너의 적막한 비무장지대, 맨몸으로 건너기는 힘들고 배로 건너자면 순식간일 것만 같은 강폭, 숱한 전쟁으로 물든 피가 아직 덜 가신듯 한 짙은 흙빛의 물결... 이번에도 살아 있으되 폐허 같고, 확 터졌으되 꽉 막힌 것 같은 먹먹한 정취에 휩싸인다.



다시 발목 잡힐까 돌아서서 누리길에 오른다. 자유로 옆 야트막한 산길이 쾌적하다. 전망 좋은 쉼터를 지나 고개를 넘으면 긴 둑길이다. 강으로 통하는 터널에는 민간인의 출입을 막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강둑 이편의 야산과 논둑에는 촘촘히 매복한 빈 벙커들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이미 유적이 되어 가고 있는, 하지만 아직은 허물어 버릴 수 없는 긴장의 흔적들.

 

그 길 끝에 반가운 철길 건멀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경의선 철길. 분주히 열차가 오갔으면 좋으련만 건널목 가운데 서서 철길을 한참 바라보아도 열차는 오지 않는다. 서울-신의주와 서울-부산은 거리가 거의 같다. 경의선은 개성 평양 신의주에서 만주로 넘어가 중국 대륙으로, 동해선은 원산 청진 나진 회령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넘어가 유럽으로 이어진다.

 

다시 철길이 이어진다면  이땅의 풍경이 어떻게 바뀔지 가늠해보고자 했으나 이어져 있으되 잘려 있는 철길처럼 나의 상상은 비무장지대의 지대의 안개를 뚫지 못한다. 70년이면 안개가 걷힐 때도 됐고, 새로운 꿈을 꿀 때도 됐건만... 철길에 대고 안개를 쓸어갈 바람에 작은 한숨 보태볼 뿐.


개점휴업 중인 임진강역에 잠시 들렀다가 평화공원으로 향하는 넓은 도로를 건너 둑방 아래로 내려가니 너른 들판과 하늘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고요하고 아늑한 이곳의 지명은 마정리. 말우물이라는 뜻으로 보아 임진강을 건너온, 혹은 건너갈 옛사람들이 말을 매고 쉬어가던 동네였던 듯.

 


모든 것이 평화롭다. 집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농지를 두고 한 채씩 떨어져 있고, 심심한 대여섯 마리 왜가리가 농부의 트랙터를 따라 다니며 놀고 있다.  넓고 긴 논길은 텅 비어 있고, 물을 댄 논에는 하늘이 가득 비친다. 걷는 내내 쉬어가는 듯한 기분이 드는 아늑한 벌판이다.



마정리 들판 너머 조용하디 조용한 마을들이 있는 장산리로 들어선다. 집들은 임진강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장산 자락 사이 남쪽을 향해 놓여 있다. 전쟁에 이골이 난 동네이니 만큼 한집 한집 어렵게 찾아낸 살자리겠지. 장산 고개 너머 언덕길에 모여 있는 매운탕집들도 먹자골목 치고는 가지런하고 얌전하다. 그리고 산동네와 식당촌을 벗어나면 도보여행자만이 만날 수 있는 임진강 전망이 나온다. 그저 벤치 몇 개 놓여 있지만 간식을 먹으며 조용히 전망을 즐기기엔 이보다 좋은 곳이 없다.



다시 야트막한 산을 오르면 화석정이다. 율곡 이이의 5대조 할아버지가 처음 지었다는 정자. 그래서 율곡선생은 어릴 적 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이이선생이 세미나 장소로 애용했던 셈이다. 높은 절벽 위에 있어 강 중간에 자리한 초평도와 섬을 휘감고 흐르는 강줄기, 그리고 멀리 여러 겹의 능선 사이로 보이는 송악산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여 8코스에서 가장 장쾌한 전망을 보여준다.

  


한국전쟁 때 전소되어 박정희가 새로 지은 정자 대신 전쟁에서도 살아남은 두 그루의 고목이 긴 세월을 증명하고 있다. 이곳에 서린 일화는 두 가지. 이이 선생이 8살 때 지었다는 시 '팔세부시'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피난길이다. 시보다는 피난길에 관심이 간다.안내판의 일화에 의하면  조선 최악의 임금 중 한 명인 선조는 왜적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자 백성들의 눈을 피해 한양을 빠져나와 한밤중에 이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달도 없는 그믐밤 비까지 내려 강을 건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화석정에서 '정자를 태워 갈을 밝히라'는 이이의 유언을 발견하고 정자를 태워 그 불에 의지해 임진강을 건넜다고 한다. 화석정 소개 글에 빠지지 않는 이 일화가 어딘지 모르게 개연성이 부족해보여 찾아봤더니... 역시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유성룡의 징비록에 의하면 정자를 태운 이유는 선조가 강을 건넌 후 왜놈들이 배를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정자 뿐만 아니라 근처에 베어 놓았던 나무까지 모조리 태웠다고 한다. 백성을 살피는 일에는 그다지도 무심하면서 자신의 피난을 위해서는 꼼꼼하기 그지없는 그의 행각도 구질구질하지만, 그걸 또 선현을 팔아 언플로 덮은 지식인들의 행태는 더 치졸해 보인다.지식인이라면 왜란 당시 율곡이 살아있었다면 정자를 태우기 이전에 수도 한양을 버리지 못하게 했을 것임을 되새겨야 하거늘... 기레기 역사는 길고도 깊다.



화석정 아래에는 제법 큰 마을이 있다. 화석정이 있어서 그런지 재미있는 모양의 카페나 식당이 있지만 종착지가 코 앞이므로 들어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마을을 벗어나면 멀리 율곡생태습지공원이 보이기 시작한다. 율곡공원인지, 생태공원인지 정체가 모호한 넓은 공원. 공룡, 하트, 다비드 상과 자유의 여신상 등등 둘 데 없는 조형물들을 맥락없이 드문드문 갖다 놓았다. 새로운 경기도 관광공사 사장님의 많은 관심이 필요해 보이는 곳.



하지만 그 어느 곳도 따라갈 수 없는 장점도 있었다. 벤치와 화장실과 버스정류장이 그것이다. 7코스 후기에 누리길 출발과 도착지에 벤치라도 하나 놓아주면 좋겠다고 쓴 바가 있는데... 이곳 율곡생태습지공원이야말로 누리길 종착지 중 벤치가 가장 많다. 아직 다 걸은 것은 아니지만 그 어느 곳도 여기보다 벤치가 많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할 정도. 화장실도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고, 문산역으로 가는 시내버스 정류장도 공원에서 나오자마자 있다. 공원의 컨셉을 다시 디자인 하고, 그에 맞게 조형물을 새로 채워 넣는다면... 8코스는 더욱 완벽해 질 것이다.


공원을 둘러보다 이곳에 세번째 와야할 이유를 만났다. 임진강 생태탐방로 홍보관. 아마도 이곳의 가장 멋진 코스는 평화공원부터 이 공원까지 임진강을 바라보며 강둑 위로 걷는 길인 듯. 공원 또한 이 길에 맞춰 생태공원이 된 듯한데 따로 신청을 받아 군인 인솔 하에만 갈 수 있다하니 알아봐야겠다.

 


그나저나 이제 9코스부터는 서울에서 꽤나 먼 길이 된다. 9코스 율곡길이 파주의 마지막 구간이니 종착지가 연천이 된다. 연천의 10, 11, 12코스를 지나면 강원도 철원이고 새로난 코스를 따라 고성까지 가야한다. 점점 하루에 오가기 부담스러워 진다. 아마도 뭔가 큰 숙제를 마칠 때마다 1박2일로 맘먹고 가야 할 듯, 다음 한 걸음이 언제가 될 지 기약할 수 없다.


하지만 이 길을 멈추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남북이 한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또는 한걸음 멀어질 때 조차 이 길이 떠오를 것이고, 그 길 위에서 원대한 상상을 위한 마음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것이 내게는 커다란 행복이 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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