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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i Minkyeng Kim May 10. 2023

리콴유의 싱가포르에서 배운 자기경영법

60년 만에 식민지에서 국제금융허브로 키워낸 리콴유의 원칙주의와 실리주의

서울보다 조금 더 큰 도시국가, 싱가포르


새벽 1시, 창이국제공항 랜딩 직전 싱가포르 상공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다에 떠있는 거대한 유조선들이었다. 


반짝이는 싱가포르 플라이어와 도심의 불야성보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수많은 배들이 관심을 끌었다.

귀국한지 4일이 된 지금은 이와 함께 싱가포르 강을 끼고 위치한 머라이언 동상과 마리나 베이 샌즈(MBS)의 위용이 그려진다.


노점에서 껌을 팔지 않는 나라, 엄격한 사회 규율과 높은 벌금 제도도 인상적이다. 뒤이어 국제 금융 허브, 자유무역항, 양도소득세가 없는 나라라는 정보도 떠오른다. 많은 국제 거래들이 싱가포르에 설립한 SPC를 통해 이뤄지는 이유다.


싱가포르의 국토 면적은 서울보다 조금 큰 수준이다. 강남구 두 개 정도를 붙여놓은 규모 정도 된다. 이 작은 나라에는 많은 글로벌 금융사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싱가포르 강 스카이라인에 서면 △스탠다드차타드(SC) △바클레이스 △모건스탠리 △씨티그룹 등 글로벌 투자은행(IB)의 사옥이 한 눈에 들어온다.


실제로 싱가포르 국제금융센터는 올해 3월 전 세계 130개 도시를 대상으로 분석한 '국제금융센터 지수(GFCI) 33차 보고서'에서 뉴욕과 런던에 이어 3위에 올랐다.

그런데 싱가포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지 불과 60여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남중국해 뱃길이 지나는 중심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특성 상 싱가포르는 일찍이 유럽인들이 중국과 일본으로 진출하는 전진 기지가 되었다.


이후 1963년 영국령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하면서 해체됐다가 反중국인 정서에 따른 민족 문제가 불거지면서 불과 2년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독립하게 된다.


군대도, 제대로 된 국가 체계도 없이 하루아침에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인 리콴유는 어떻게 반세기만에 '작지만 강한' 나라를 구축할 수 있었을까?


1960년대 말 이스라엘을 이끈 골다 메이어 총리가 리콴유에게 했던 말에 첫 번째 답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이나 싱가포르 모두 실수할 여유가 없는 나라"라는 말이 그것이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곧 파국이며 망국으로 치닫는 형국인 만큼 어느 때보다 간절하고 누구보다 절실한 상황이었다는 얘기다.


두 번째, 리콴유는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독립국가 초기에 국군을 창설하면서 군대 안에서 특정인의 사회적 배경이 절대 통하지 않게 만들었다.


복잡한 민족 구성과 지위 등을 차치하고 개인의 능력에 따르는 업적주의를 철저하게 지켰다. 이 거대한 용광로는 싱가포르를 하나로 결속하는 중심축 역할을 하며 지금까지 많은 인재들을 키워냈다.


그는 측근이 비리에 연루됐을 때도 원칙을 지켰다. 1986년 가장 가까운 측근인 태 치앙완이 과거 40만 싱가포르 달러(한화 약 2400만 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가 불거지자 리콴유는 면담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인간적인 좌절감으로 태 치앙완이 자살한 이후 그의 미망인이 고인의 명예를 위해 부검을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도 인간적 의리보다는 법과 원칙을 지켜내야 한다고 믿었다.

한편 외교에서는 실리주의적인 태도도 취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라는 거대한 국가 사이에 위치한 만큼 원칙만 중시해서는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 왕왕 발생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싱가포르는 국가의 이념이나 정체와 관계 없이 대외 관계에서는 공산국가라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누구와도 무역하고 거래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싱가포르는 이슬람 정체성을 가진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관계도 구축했지만 이스라엘과의 관계도 돈독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생존은 싱가포르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국 대부분이 미국이나 소련 등 제국주의 국가에 의존하던 것과는 다른 행보였다.


만성적으로 물이 부족한 싱가포르는 현재 수돗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유일한 동남아 국가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의 수도관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빗물과 생활하수 등을 정수해 다시 사용하는데 싱가포르의 정수율은 97%로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네 번째로 힘없고 작은 국가임에도 그는 싱가포르의 자존심을 지켰다. 실용주의 노선을 취하며 국가의 이데올로기와는 관계 없이 선린 관계를 모색했지만 싱가포르 안전에 위해가 되거나 내정에 간섭할 경우 과감하게 대응했다.


1964년 인도네시아군이 싱가포르 내 HSBC에 들어와 폭탄을 터뜨리며 난동을 벌인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싱가포르 대법원은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리콴유는 회고록에서 "영국군이 철수하고 나면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같은 이웃 국가들이 무슨 일을 저질러도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쉽사리 우리를 무시하려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썼다. 실제로 인도네시아는 노골적으로 침략 의사를 밝히며 위협을 가했지만 리콴유의 명백한 태도와 초지일관으로 원칙을 지키는 모습에 상황을 확대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싱가포르의 안전을 위해서는 그 누구든 싱가포르 국내법에 의해 처벌을 받으며, 설령 그 조치가 세계의 비난을 받더라도 싱가포르 정부는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위험을 무릅썼다.


싱가포르는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완전한 대외 개방 체제를 선언했다.

대부분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을 통제하는 보호무역 정책을 실시했지만 인구 100만 명 만으로 내수 중심의 경제 성장을 충분히 할 수 없다는 것이 리콴유의 판단이었다.


싱가포르는 제조업의 관세를 3%까지 내리고 법인세는 40%에서 4%로 낮췄다. 상당수 싱가포르 기업이 해외 자본의 소유가 됐고 기업 성격도 내수보다는 수출을 지향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국적 기업이 싱가포르에 속속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제1세계를 지향하는 거대한 전망이 현실화된 것이다. 여기에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통화 공급도 엄격히 규제하는 등 보수적인 재정 정책으로 일관성을 유지했다.

매우 당연한 얘기지만 싱가포르가 국제 금융과 물류 허브로 성장한 데에는 나라의 공용어가 영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국제적인 무역 거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 전 국민이 모국어와 영어를 배우도록 교육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눈에 담긴 싱가포르는 곳곳이 관리의 손길이 닿은 계획도시였다.


빼곡히 들어선 빌딩숲 사이에도 숨쉴 수 있는 정원들이 있었으며 노후 항만 배후 지역에는 '화이트존'을 도입해 미국 샌즈그룹의 투자를 받아 싱가포르의 명물이 된 마리나베이 샌즈를 세웠다.


원칙주의와 실리주의, 거대 열강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생존은 자신이 지키는 독립심과 강인함, 필요하다면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와 물러날 수 없는 간절함까지.

싱가포르를 키워낸 리콴유의 리더십은 어쩌면 정글같은 사회에 내던져진 나같은 사회초년생에게도 필요한 것 아닐까. 아 또 하나, 영어 공부에 대한 필요성까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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