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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i Minkyeng Kim Oct 04. 2018

내일이 없길 바라던 나날,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에서

봄 밤은 길었고 야타이무라의 불빛은 따뜻했다

-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라는 영화가 마음에 너무나 가까이 와닿은 적이 있었다. 매우 현실적이기도 한편으론 극단적이게도 그려냈지만 사실 여느 사회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봤자 항상 누군가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고,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 하는 것을 요구하는 세상에게 있어 마치 스스로 저능아가 된 것 같은 자괴감에 빠질 때도 있었거든. 어쨌든 그렇게 도마 위에 올라 1부터 10까지 평가당하고 난도질당하고 때론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모조리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졌을때. 쉬어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서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가장 싼 비행기 티켓을 구했다. 목적지는 일본의 최남단, 가고시마.

어느 도시든 첫 인상이 있다. 가고시마는 구름이 낮게 드리운 , 마치 이른 아침 이슬을 머금은 푸른 이끼 같은 도시였다.


공교롭게도 도착한 첫날 밤에는 비가 내렸다. 조금은 음울한 분위기가 내 마음같다고 생각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다 괜찮을거란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가 묵은 숙소는 버스정류장 근처 별 세개짜리 평범한 비즈니스 호텔이었다. 야타이무라(포장마차) 바로 건너편이라 혼자라도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 모쪼록 누군가에게 데려다달라거나, 길을 물어야 한다거나 하는 등 신세를 지는 일은 적어도 이번 여행에선 노땡큐, 그렇게 생각했다. 마치 여기 없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고 싶었다. 올바른 문장에서 삐죽 튀어나온 오타같이 느껴지던 내 일상을 잠깐이나마 지우고 싶었다.


- 실례지만, 혼자신가요?


호텔에 짐을 막 풀고 덴몬칸에 라멘을 먹으러 나가던 길이었다. 일본 남자 둘이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한 명에 내 또래로 추정되는 청년 한 명. 이게 무슨 조합이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 지금 덴몬칸에 유명한 빙수 먹으러 가는데 같이 래요?


일본 사람들이 이렇게 오지랍이 넓을 줄은 몰랐다. 혼자 다니는 여자 여행자라고 호의(?)를 베푸는 것인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낯선 조합의 남자들은 대체 뭐하는 사람들이길래 외국인에게 다짜고짜 빙수를 먹으러 가자는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토치기에서 온 켄과 모토상

켄과 모토상은 동료다. 엄밀히 말하면 모토상이 운영하는 사업체가 켄이 다니는 회사의 클라이언트. 그럼에도 둘은 마치 친구처럼 붙어 다닌다.

왼쪽부터 모토상, 나, 켄상. 덴몬칸 시로쿠마 빙수집 앞에서/ 2018.06.08

우리는 덴몬칸의 명물 시로쿠마 빙수를 함께 먹었다. 가장 크고 비싼 메뉴를 시켰더니 빙수엔 초코볼부터 매실장아찌까지 오만 것들이 다 들었다. 어느새 친해진 켄과 모토상과 나는 이 창의적인 빙수를 두고 쉼없이 낄낄거리며 그릇을 비웠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내친김에 야타이무라로 향했다. 이야기의 주제도 조금은 무거워졌다. 여행을 왜 왔냐는 질문에 "혼자 있고 싶어서"라는 솔직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뭐야 그게ㅡ 라며 다같이 웃어넘기다가 취기가 돌아 얘기를 꺼냈다.


"잠깐 회사 좀 관두고 올게, 라는 영화 알아?(일본어 제목은 ちょっと今から仕事やめてくる) 꼭 내 얘기 같아. 열심히 일하는 만큼 내 기사를 읽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그런 사명감으로 개인적인 시간까지 포기하면서 일해왔는데 내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 오히려 날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하는 악플들을 보니까, 모르겠어, 일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가 없게 됐어."


모토상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내게 무엇인가 말하려다 핸드폰을 꺼냈다. 이 말은 잘못 전달되는 일 없이 제대로 전해졌으면 좋겠다며.


"욕먹는 것도 일의 일부야. 너의 마음의 리셋이 중요해."


모토상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루 14시간을 일하는 47살의 모토상


모토상은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물론 항상 '일하는 것은 너무 싫어, 그만두고 싶어'라고 입에 달고 살지만, 힘든 것도 많지만 즐거운 일도 많으니까. 너무 괴로운 날엔 이렇게 술을 마시고 털어버리고 '리셋'해야 한다고 했다.

모토상이 30대 때 다니던 회사 얘기를 들으며 고구마소주를 한 잔 더 시켰다. 상황은 변하지 않으니까, 결국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는 얘기 고개를 끄덕끄덕 했더니 켄상이 살풋 웃으며 종이에 무언가 적어준다. '이치고 이치에(いちごいちえ)' 일생에서 단 한 번뿐인 인연이란다. 언제든 지치면 토치기로 찾아오라며, 내친 김에 모토상은 며칠 간 일을 쉬고 접대하겠다고 나섰다. 낯선 가고시마 한복판에서 이런 인연이라니. 눈물이 다 나왔다.


그날 우리는 밤늦도록 야타이무라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얼큰한 술기운과 시끌벅적한 소음들 속에 우리들의 웃음소리는 꼬치구이를 굽는 연기와 함께 흩어졌다. 마음의 리셋이 중요하다는 말이 머리 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래,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실패는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모든 부담을 짊어지고 간다면 너무 괴롭지 않겠는가.




(번외편)

아주 잠시, 숙소 엘리베이터를 타며 문득 내가 무례했을 수도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 얘기를 지나치게 꺼내는 것도, 상대방얘기를 묻는 것도 금지다. 인간관계에 있어 암묵적인 룰이다.

그래서 보통 날씨가 좋네요 어제 그 드라마 재밌었죠 따위의 3자 이야기만 겉돌곤 한다. 정작 그 사람에 대해 깊이있는 이해는 하지 못한 채.


20대보다 더 심란한 것이 30대다.


조금 더 세상을 알아가면서 모순적인 생각에 괴롭다. 으레 이렇게들 하는 일들이니까 따라가곤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체념이 어려운 것이다.

진정 반어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린왕자가 정의하지 않았는가, 어른이란 빨간 벽돌로 지어진 제라늄이 예쁜 저택을 보고 집값이 얼마냐고 묻는 사람이다.


조금만 아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더 무섭다.


나이먹은 어른들은 사람을 많이 만나보라 한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다 경험이 된다고. 아마 이 시기를 다 지나고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달았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아직 사람이 무섭고 지긋지긋하다.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아서 사람은 다 똑같다고 지레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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