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는 그들의 진짜 일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지요. '외부인 출입 금지'라 쓰여 있으면 괜히 궁금합니다. 안에 뭐가 있을까? 뭘 하는 공간일까? 병원에 온 사람들에겐 아마 수술실이 그럴 겁니다. 평소엔 전혀 들여다볼 수 없는 공간인지라 환자들이 더 공포에 떠는지도 몰라요. 저는 어쩌다 보니 수술실에서 5년 동안 일한 간호사입니다. 외부와 격리되어 일하다 보니 부모님도, 남동생도, 남자친구도, 그 누구도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가끔 TV 드라마나 다큐멘터리에 수술실이 나오긴 하지만, 수술 장면 외에 다른 모습은 잘 나오지 않더군요.
미래의 직업으로 수술실 간호사를 고려하는 중고등 학생들, 간호학과 재학생, 부서를 옮기려 하는 현직 간호사, 수술실 간호사가 나의 애인이거나 친구이거나 아들딸인 분들, 그리고 의학드라마를 보고 호기심이 생긴 시청자 분들까지. 제 글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잘 모르면 단순하고 추상적으로 접근합니다. 마치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처럼,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의사는 진료를 하고, 요리사는 요리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실제 그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루 종일 뭘 하느냐"라고 물어본다면 매우 다른 답을 할 것입니다. '가수'를 생각해봅시다. 가수는 노래를 부르는 직업이지만 노래하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랜 시간 곡을 만들고, 여러 스텝과 녹음 작업을 하고, 앨범 컨셉도 잡고, 재킷 촬영도 하고, 앨범이 나오면 홍보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코디나 매니저와 의사소통도 하고, 기획사와 조율도 하고, 콘서트도 준비하고...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직업이 아니라, 수술실 간호사의 구체적인 노동에 대해 말해보려고 합니다.
수술실 간호사는 메스 주는 사람? NO!
의학드라마를 보면 수술이 시작되기 전, 집도의가 진지하게 말합니다. "메스."
이때 메스를 건네주는 사람은 스크럽(Scrub) 포지션을 맡은 간호사입니다. 스크럽 간호사는 집도의가 들어오기 전에 멸균 영역을 세팅합니다. 수술이라는 공연을 위해 무대를 준비하는 것이지요. 업계 용어로는 '수술상을 차린다'고 합니다. 깨끗한 수술상에 멸균포를 펼치고 필요한 물품이 준비되면, 스크럽 간호사가 손씻기(scrub)를 한 뒤 멸균가운을 입고(gowning) 멸균장갑을 착용(gloving) 합니다. 멸균 영역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수술상을 차리는 겁니다. 이후에 집도의를 비롯한 수술팀이 차례로 들어오면, 스크럽이 가운을 입혀주고 장갑을 끼워줍니다.
스크럽은 상을 전략적으로 차려야 합니다. 수술 과정에 따라 기구를 순서대로 배치하고, 집도의가 찾을 가능성이 있거나 자주 쓸만한 기구는 가까이에 놓습니다. 수술 필드와 가장 가까운 곳에는 제일 먼저 사용하는 메스를 두는 식으로요. 기구를 가장 쉽고 빠르게 패스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세팅하려면 해당 수술에 대해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어느 순서에 어떤 기구를 쓰고 그다음엔 뭘 준비해야 하는지, 수술의 전 과정을 꿰고 있어야 하지요. 또한 필드를 주시하며 발생할 상황에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예기치 못한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필요한 걸 척척 준다면, 집도의가 아끼는 유능한 스크럽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의학드라마에서 집도의가 "메스." 하면 칼을 주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현실에서는 수술 과정을 함께 보며 '알아서' 줘야 합니다. 이를 '집도의의 니즈를 예견한다'고 하고, 다른 표현으론 '꼭 말해야 아니?' 되겠습니다. 말보단 눈짓으로 진행되는 게 수술이지요.
수술실 간호사는 테크니션이다? YES!
다른 회사도 그렇겠지만 간호사도 병원의 부서에 따라 업무가 다릅니다. 병동(ward)도 소아과냐, 종양내과냐, 신경과냐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특수 파트'라 불리는 부서가 있습니다. 중환자실, 응급실, 수술실인데 그중 수술실은 가장 특수한 곳입니다. 얼마나 특수하냐면... 다른 부서와 경력이 호환되지 않지요. 즉, 타 부서에서 몇 년을 일하다 와도 수술실에선 신입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럴까요? 일반적인 간호사는 어쨌든 환자를 대하며 직접적인 간호를 합니다. 그런데 수술실 간호사는 환자나 보호자와 만날 일이 없습니다. 환자는 들어오자마자 마취되고 보호자는 밖에서 기다립니다. 보통의 간호사처럼 환자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일도, 보호자와 실랑이할 일도 없습니다. 대신 우리가 커뮤니케이션하고 맞춰줘야 하는 상대는 '외과의사'입니다. 수술실 간호사로 일하게 되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내 고객은 의사구나' 깨닫게 됩니다. 연차가 쌓일수록 외과의가 원하는 수술 방식이나 장비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하고, 의논할 일도 많아지지요.
두 번째로 많이 접하는 상대는 '의료기 업체' 사람들입니다. 수술은 온갖 기구와 장비의 향연입니다.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된 신상이 나오지요. 기구나 장비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하고, 늘 최적의 상태인지 확인해야 하며, 작동하는 원리나 관리 방법에 대해서도 빠삭해야 합니다. 이런 교육을 업체에서 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급하면 카탈로그를 보면서 혼자 연구할 때도 있습니다. 사용자(user)는 의사지만 모든 세팅은 간호사가 하기 때문이지요. 수술 중에 맛이 가거나 오작동이라도 나면 큰일이기 때문에 수술 전에 꼭 테스트를 해야 합니다. 의사와 의료업체 중간에서 피드백을 전달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일도 업무에 포함됩니다. 이렇게 온종일 각종 기구와 장비를 다루다 보면, 간호사가 아니라 테크니션에 가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 것입니다. 수술용 침대부터 무영등, 드릴, 내시경, 레이저, 초음파 등등... 몇 천~몇 억을 호가하는 장비들이 수두룩하지요. 그래서 바쁘게 일하다 누가 장비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 소리칩니다. "(너 말고) 장비 괜찮아 ??!!! "
나에게 수술실이란 ?
수술실은 매우 취향을 타는 부서라고 생각합니다. 하루 종일 피와 뼈와 내장을 보고, 살점 탄내와 피비린내를 맡는 곳이지요. 외부와 격리된 거대한 냉장고라 여름 나기엔 좋습니다. 수술실만큼 시원하고 쾌적한 곳이 드물거든요. 시작부터 끝까지 개인플레이가 하나도 없는 '완전한 팀플'입니다. 일은 자고로 실수하며 배우는 건데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곳이기도 합니다. 적응되면 고요하게 손이 착착 맞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지만, 실수하면 다른 종류의 짜릿함을 맛보게 되지요. 수술 준비부터 종료까지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우며 까다롭게 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곳. 함께 호흡을 맞춰 일한 사람들과 끈끈한 동료애가 생기는 곳. 그러나 힘들 땐 서로의 밑바닥을 보기도 하는 곳. 큰 수술은 정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체력 싸움이지만, 힘들다고 잠시라도 방심하면 의료사고로 이어지는 곳.
병동 업무가 : 승 -> 결 -> 기 -> 전 (수시로 흐름이 바뀜) 이라면,
수술실은 : 기 -> 승 -> 전 -> 결 (흐름이 항상 일정함) 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더 좋고 나쁘고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저는 소위 '빅 파이브'라 불리는 대학 병원의 삼교대 병동에 취직했었지만,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사표를 썼습니다. 매일 자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 심지어 출퇴근 시간도 다른 환경이 누군가에겐 별 문제가 안되지만 누군가에겐 지옥일 수도 있더군요. 삼교대 외에도 조직 문화, 부서 분위기, 입사동기의 유무, 개인의 적성과 상태 등 수많은 변수가 작용합니다. 저는 대학병원을 그만두고 종합병원 수술실로 옮겨 5년 차까지 다녔지만, 첫 직장에서 지금까지 쭉 다니는 친구들도 있고, 공무원으로 방향을 돌린 친구들도, 일반 회사로 이직한 친구들도 있습니다.
제가 첫 직장을 그렇게 총알같이 그만둔 건, 수습기간이 끝나고 첫 야간근무를 한 날이었습니다. 그날 일하면서 그만둬야겠다 고민한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와 의논을 한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날이 밝고 수선생님이 출근하자, 몽유병처럼 따라 들어가 사직 의사를 밝혔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유니폼과 사원증을 반납한 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 병원 때려쳤어..."
아빠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야, 거참 결정 한번 빠르네?"
교수님은 면목이 없어 고개를 떨군 저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간호사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본 것 같구나. 천천히 다시 생각해보렴."
추천서를 써주셨던 담당 교수님께서 '네가 어떻게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가 있니!' 화내셨다면, 부모님이 '다른 애들은 편해서 다니니? 등록금이 아깝지도 않아?' 몰아세웠다면, 저는 영영 자신감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섣불리 저를 탓하지 않은 진정한 어른들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저는 곧바로 임상 밖으로 튕겨나가지 않고, 다른 부서를 모색해 볼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애인이 간호사인가요? 그렇다면 '사회생활이 원래 힘들지'라는 말로 위로하지 마세요. 일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된다면 마음이 아파 울지도 모릅니다. 친구가 간호사인가요? 큰 병원에 다닌다고 부러워하지 마세요. 제때 잠들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생리현상도 해결하지 못하며 일하는 곳입니다. 젊은 날의 건강을 담보로 남을 돌보는 곳입니다. 당신의 가족이 간호사인가요? 그만두더라도 질책하지 마세요. 당신이라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요?
엄지 umji.lette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