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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 Dec 08. 2017

'보비'는 강아지가 아닙니다

그럼 대체 누구?


  

물에 빠지면 헤엄치게 된다고?

간호학과 학생 분들이 수술실에 실습을 오면, 멸균 영역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수술을 관찰(observation)하게 됩니다. 분주한 선생님들은 학생에게 설명해줄 틈이 없고, 설명해주더라도 학생이 알아듣고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책에서 그림으로 보던 장기는 실제로 보니 그냥 다 뻘겋고 흐물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고요. 수술실에서 신규간호사로 일하게 되면 상황은 조금 더 심각해집니다. 물론 병원마다 교육자료가 있지만, 마치 연애를 글로 배우는 것처럼 와 닿지 않습니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간호사는 몸빵(?)을 겪게 되는데요, 수영도 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물에 빠지는 겁니다. 강사는 호루라기를 불며 외칩니다.


"수영하는 거 어제 보여줬죠? 복습해왔죠? 자 그럼 입수!"



저기 나 아직 아무것도 모ㄹ... (꼬르륵)



신규 간호사의 운명은 오롯이 프리셉터의 역량과 의지에 맡겨지는데요, 현재 임상은 지식과 기술을 도제식으로 전수할 상황이 못 됩니다. 그 결과, 프리셉터는 가르치는 데 들이는 노력을 최소화하게 되고 교육의 질은 추락하지요. 냅다 물에 빠뜨리고는 알아서 헤엄치기를 바랍니다. 가엾은 신규 간호사들은 죽기 살기로 발버둥치며 물을 먹다가 결국 익사합니다. 살아남은 간호사들은 자신이 겪은 대로 후배 간호사를 또 빠뜨리고요. 여러분이 끈기가 없어서, 멍청해서, 임상과 맞지 않아서, 부적응자라서 힘든 게 아닙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이론'과 '열악한 임상의 실무'에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를 해결할 교육시스템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을 다루는 곳이 이렇게 되는대로 굴러가면 애꿎은 환자들만 피해를 봅니다. 의료사고가 나면 '개인'만 탓하는 문화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지요.


병원의 각 부서마다 숙달된 인력을 빼내서, 해당 부서의 교육만 연구하고 전담하게 해야 합니다. 현장의 노하우와 학계의 연구를 조합해서 효과적인 교육 콘텐츠를 만들어야 합니다. 양질의 교육 한 번은 열 번의 잔소리를 능가하고, 각종 사고를 예방하며, 시간과 비용을 절약해 줍니다.

   

무언가를 '할 줄 안다'고 해서 '가르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수술실의 특성상 장비를 많이 접하는데, 원리나 배경에 대한 설명 없이 '이 장비는 A-B-C-D의 순서로 사용한다'라고 가르치면 학습효과가 떨어집니다. 뒤돌아서면 까먹고 'B 다음에 뭘 하라고 했더라?'하게 되지요. 나중에 사용법이 손에 익어서 A-B-C-D를 잘 하게 되더라도, 그건 말 그대로 익숙해졌을 뿐이지 이해한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보비? 강아지 이름인가?


수술실이라고 하면 보통 '메스'를 떠올리실 겁니다. 오프닝을 장식한다는 이유로 의학드라마에 자주 출연하지만, 메스는 처음에만 잠시 등장하는 카메오입니다. 실제 수술에서 압도적인 분량을 자랑하는 주인공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보비'지요. 1882년에 태어난 미국 과학자 (William T. Bovie)의 이름을 딴 장비인데, 오늘날에는 여러 회사에서 나온 비슷한 제품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지프, 봉고, 스카치테이프, 초코파이처럼 보통명사로 쓰입니다.



멍! 수술 중에 나 불렀멍?


 

Bovie는 하버드에서 식물생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고주파를 사용하면 근수축을 일으키지 않고 조직을 자를 수 있다는 걸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지식을 적용해서 세상에 없던 '전기 수술 장치'를 발명하지요. Bovie는 이 장비를, 당시 하버드 의대를 졸업하고 신경외과 의사로 일하던 Harvey Cushing (쿠싱 증후군을 처음 발견한 의사입니다)에게 써보게 했습니다. 미세한 수술을 해야 하는 신경외과 의사에게 ‘출혈’은 엄청난 장애물이었거든요. 1926년부터 본격적으로 보비를 사용하면서 수술 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된 것은 물론, 뇌 수술의 스펙트럼 또한 매우 넓어지게 됩니다. Cushing이 후대에 뇌 수술의 선구자, 신경외과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Bovie의 공이 컸던 셈이지요. 


나온 지 백 년도 되지 않았는데, 이제 의사들은 '보비 없는 수술'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자 그럼 수술 혁명을 일으킨 주인공, 보비를 소개합니다.


 


 

보비는 볼펜처럼 생겼습니다. 펜으로 글씨를 쓰듯이 가볍게 쥐고 사용합니다. 볼펜 심지에 해당하는 끝부분은 Tip이라고 부르는데, 잉크 대신 고주파가 나오지요. 펜의 몸통에는 버튼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조직을 자를 때 누르고, 다른 하나는 피를 응고시킬 때 누릅니다. 빠르고 촘촘한 파장은 '높은 에너지를 급격하게' 가해서 조직을 자르고(cutting), 느리고 간헐적인 파장은 '약한 에너지를 천천히' 가해서 조직을 응고시킵니다(coagulation). 잘라야 할 때 응고 버튼을 잘못 누르는 건 크게 상관이 없지만, 출혈이 있을 때 절개 버튼을 누르면 큰일 납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랄까요...;;



길이와 모양이 다양한 보비 팁 (Bovie tips)



보비 팁은 살짝 힘주어 잡아당기면 몸통에서 분리됩니다. 상황에 맞게 길이나 모양을 바꿔서 사용하지요. 수술 부위의 깊이에 따라 짧은 것(short), 중간 것(medium), 긴 것(long)으로 교체하고, 적용하는 면적이나 섬세함의 정도에 따라 needle, blade, ball, curved, straight 등 다양한 형태를 씁니다. 보통 수술에 따라 집도의가 애용하는 팁이 정해져 있습니다.

 




 


보비의 전선에 달린 코드는 헤어드라이기의 코드를 콘센트에 꽂는 것처럼 본체(generator)에 연결해주면 됩니다. 자 이제 끝!이 아니라 할 일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Cushing이 처음 발명된 보비를 사용할 때 몇 가지 사고가 있었습니다. 보비에서 나온 전류가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수술도구를 거쳐 집도의의 팔과 헤드라이트로 흐른 겁니다. 심지어 마취제로 쓰였던 알코올 추출물인 에테르 가스에 불이 붙기도 했지요. 당시 Cushing은 '말도 못 하게 불쾌한 경험'이라며 투덜댔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비에서 나온 전류가 전도체를 타고 흐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Bovie plate가 생겼습니다.


  

얇은 알루미늄판과 젤로 이루어진 '보비 플레이트'

 

고주파가 몸 밖으로 안전하게 빠져나와 본체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전도성이 높은 알루미늄 패치(Bovie plate) 붙입니다. 스티커처럼 접착면의 필름을 떼어내고 환자의 몸에 붙이면 되지요전용 케이블의 집게에 고정해서 역시 본체에 연결하면 됩니다. 전기가 흐르는 통로이기 때문에, 신경은 적고 근육과 지방이 많은 엉덩이나 허벅지, 종아리에 부착합니다. 도톰한 젤이 알루미늄을 뒤덮고 있는데, 이 젤은 피부 화상을 막고 접착을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만약 플레이트가 들뜨거나 접히거나 구겨져서 접착 상태가 불량하면, 본체에서 알람이 울리며 기기의 작동이 멈춥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지요. 


병동과 마취과에서 환자의 몸에 전류가 흐를 만한 금속물질(액세서리, 보청기, 체내에 삽입된 인공심박동기 등)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바로 보비 때문입니다. 또한 마취과에서 환자의 상체에 심전도 패치를 부착하는데, 심장의 전기신호를 포착하는 심전도와 보비 플레이트가 가까우면 교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보비 플레이트는 하체에 붙이지요.

 

플레이트를 끼우는 전용 케이블
플레이트가 전용케이블에 고정된 모습




보비의 위험성


장비가 이렇게 좋아졌는데도 여전히 수술하다 감전이 되거나, 어딘가에 묻어있는 알코올 때문에 스파크가 생기는 일이 있습니다. 집도의가 보비를 사용하는데 어시스트가 포셉이나 리트랙터를 잡고 있다가 흠칫 놀라면 십중팔구는 감전된 겁니다. (아니면 졸다가 깼거나...) 그럴 때 스크럽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즉시 기구에 닿았던 장갑이 멀쩡한지 함께 확인하고, 손상이 의심되면 기구와 장갑을 교체하면 됩니다. 스파크가 튀어 멸균 영역에 불씨가 생기면요? 얼른 생리식염수를 끼얹으면 됩니다. 또한 보비 플레이트가 물이나 소독액에 젖으면 절대 안 됩니다. 물과 소독액도 전류가 통하기 때문에 환자가 화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비는 조직을 '태우는' 장비이기 때문에 연기에 각종 발암물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담배 연기보다 무려 40배 이상 해롭다고 합니다) 연기 석션... 매우 중요합니다. 수술팀의 '폐 건강'은 어시스트의 석션 기술에 달렸습니다.









엄지 umji.let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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