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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 Jan 02. 2019

보이지 않는 간호사들


아 XX , 진짜 X 같네.
저 XXXX 당장 XX 버려야지...

조폭영화 대사가 아니다.

수술실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늘 달고 살았던 게 욕이다. 웅얼웅얼 염불처럼 외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크게 외쳐버리곤 했다. 수술실에선 나 말고도 많은 간호사들이 고통스럽게 무언가를 참아가며 일했다. 수술 도중에 울기도 하고, 끝나자마자 탈의실이나 화장실로 숨기도 하고, 다음 날 무단으로 결근하기도 한다. 화를 표출할 수 없으니 욕이라도 해야지. 약자는 화를 낼 수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분노할 시간과 기운'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계속 이해받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대박, 완전 우리 얘기잖아.


친구를 꼬셔서 *캐런 메싱 강연회에 데려갔다. (책 '보이지 않는 고통'을 쓴 캐나다 여성노동보건학자) 그리고 우리는 강연 내내 슬며시 웃으며 속닥거렸다. 캐런 메싱의 언어는 간결하고 명확했으며 '맞는 말 대잔치'였다. 어려운 학술용어가 하나도 없어서 내용이 귀에 쏙쏙 박히다 못해 마음을 간지럽혔다. 그녀는 여성들이 주로 하는 일에 대해 "위험이 덜 가시적이고, 빈틈없이 통제당하며, 빠른 속도로 작업해야 하고, 고객과 고용주 사이에서 고통받는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교대근무를 하는 직종에선 스케줄 변동이 심하고 정보공유가 어려운데, 이때 보이지 않는 무급노동이 요구된다. 병동 간호사는 인계를 주고받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출근 전부터 병원 전산망에 로그인하여 환자기록을 살핀다. 수술실 간호사 역시 몸은 밖에 있어도 정신은 병원에 매여 있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위험하게 일하는지 전혀 모른다. 수술실에서 나는 비현실적인 속도로 일했다. 더 빨리, 더 완벽하게, 실수 없이. 일은 아무리 '미리' 해치워도 끝나지 않았고, 하면 할수록 점점 늘어났다. 수술실 간호사의 업무능력을 평가하는 사람은 주로 수술을 함께 하는 외과 의사다. 흐름에 따라 필요한 기구를 정확하게 주는지, 예기치 못한 상황에도 빠르게 대처하는지, 그러면서도 집도의의 기분을 살피며 재치 있는 말로 즐겁게 해 주는지... (이 능력에 특히 가산점이 크게 붙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실제 인사고과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 '투명 능력'이다. 애초에 간호사는 '보이지 않는 인력'이기 때문이다. 머릿수는 병원에서 가장 많지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노동


출근하면 수술방에 있는 기구를 카운트 count 하는데, 한 방에 있는 기구의 수는 대략 100개에서 300개 사이다. (병원 또는 과에 따라 더 적을 수도 많을 수도 있다) 단순히 개수만 헤아리면 안 되고, 어딘가 부서지거나 위치가 잘못 놓이진 않았는지, 다른 기구와 구성품이 뒤바뀌지는 않았는지를 하나하나 확인한다. 긴급하게 해당 기구를 쓰려고 수술상에 풀었는데 잘못 들어있거나 망가져 있으면 큰일이니 그렇다. 처음에 신입 간호사들이 카운트를 하려면 세 시간도 넘게 걸린다. 직접 사용해보지도 않았을뿐더러 모든 기구가 제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쁘게 일하다 보면 여기저기 흩어져 세척 중이거나 사용 중이거나 소독 중이거나 때론 수리 중이다. 업무 중에는 가르칠 여력이 없기 때문에 일과가 끝나고 교육이 이루어진다. 이 또한 연장근무로 절대 인정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다. 병원이 강제로 시키지는 않았지만 당장 내일을 위해 모두가 이렇게 한다. 아니지, 가르칠 시간이 없는데 가르치라고 하는 게 강제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첫 환자를 '땡!' 하고 부르는 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속도전이다. 보통 첫 번째 수술 환자는 전날 밤 병동에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기 때문에, 별다른 이벤트가 없는 한 시간에 맞춰 칼같이 도착한다. 수술포를 펼쳐 멸균 구역을 만들고, 필요한 기구들을 오염시키지 않은 채로 세팅하고, 수술 기록지를 띄워 어지간한 기록을 '미리' 입력하고 (원칙적으로는 수술 중에 입력하는 게 맞지만 수술이 시작되면 그럴 여유가 없는 상황이 태반이므로), 수술상을 전속력으로 차린다. 어시스트와 집도의가 들어오기 전에 준비를 마쳐야 하는데 언제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수술이 끝나가면 마취과에서는 다음 환자를 '미리' 부른다. 그리고 마취에서 깬 수술 환자의 침대를 밀고 나가며 이렇게 말한다.


다음 환자 마취할게요?


첫 번째 환자가 이제 막 나가고 정리도 안 했는데 다음 환자 들어온다는 의미다. 마음 같아선 '아니요 기다려주세요'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면 마취과 의사가 "왜? 마취하는 동안 준비하면 되잖아~"라고 하는 걸 들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아까운 시간이 또 흐르기 때문에 그냥 오케이 하는 편이 낫다. 애초에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다.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뒷정리를 하는 동안 다음 환자가 들어오고, 또 쫓기면서 준비하고... 그 와중에 폭언과 성희롱은 센스 있게 '때찌!' 정도로 받아쳐야 한다. (왜냐고? 지금 XX 바쁘니까 질문하지 말아 줄래?)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당직 날짜를 조정하고 싶으면, 알아서 바꿔줄 사람을 찾아 조율한 후에 수간호사에게 보고하면 된다. 캐런 메싱의 연구에 따르면 12세 미만의 자녀가 있는 여성 30명이 일하는 어느 사업장에선, 2주 동안 근무 교환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이 총 156번이나 일어났다고 한다. 수술실 역시 '근무표' 뿐 아니라 대부분의 구멍이 간호사들의 연대로 땜질이 되는데, 그래서 모든 간호사가 고도로 촘촘한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 내 일만 해서는 결코 내 일을 잘 해낼 수 없는 구조 속에서, 그로 인해 딸려오는 죄책감과 갈등까지 고스란히 간호사의 몫이다. 그런데 나는 병원을 사직하고 종종 남자들로부터 어처구니없는 말을 듣곤 했다.


편하게 일하다가 밖에 나오니까 힘들죠?


처음엔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그냥 달라는 기구 주면 되는 거 아닌가?" "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어요?"와 같은 질문을 수차례 듣고 나서야, 단지 '여초 직군'이라는 이유로 우리의 일이 매우 쉽고 보잘것없는 취급을 받는 현실을 뼈저리게 인정하게 됐다. 응급상황이 터질 일도 없고, 온종일 서서 일하지도 않는, 점심시간과 휴식시간이 보장된 곳에서 일하는 나보다 어린 남성은 어딜 가나 "사회생활 힘들지?"와 같은 격려를 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동운동인지 공부인지 뭐시기를 하는 나름 진보적인 남성은, 내게 '수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알아듣자 이렇게 되묻기도 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나도 묻고 싶다. 내가 '외과 의사'였어도 그리 놀랐을지. 그랬다면 애초에 설명조로 말하지 않았겠지만. (참고로 그는 내가 수술실 간호사라는 걸 뻔히 아는 사람이었다) 하여간 남성은 본인의 일을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노고를 알아주지만, 여성은 무얼 하는지 구구절절 늘어놓아도 끝내 이해받지 못한다. 그 지겹고도 답답한 고통이 캐런 메싱 덕분에 조금 해소되었다.



보이지 않는 고통


응급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언니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간호사의 일을 대체 어떻게 설명하면 사람들이 이해할까? 내 손가락에 실이 달려 있는데, 그 실에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있는 거야. 그 손가락으로 타자를 치는데 오타가 날 때마다 사람이 죽는 거지. 그걸 뛰면서, 심지어 여러 일을 동시에 하면서 해야 된다고!"


가슴을 치며 공감했다. 병원이 가동하는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맞춰서, 우리는 빨리 하면 안 되는 일들을 엄청난 속도로 처리하고 있다. 의료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환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수술실에선 서로에게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조심해'인데, 남의 몸뿐만 아니라 내 몸 다칠 일이 널렸기 때문이다. 메스 말고도 날카롭고 위험한 기구 천지다. 한 번은 정형외과 수술 중에 기구를 잘못 핸들링하는 바람에 드릴에 글러브가 빨려 들어간 적이 있다. 급박하게 기구를 주고받다가 손을 베이는 경우도 많고, 집도의가 수술상에 가위 등을 던지는 경우도 있다. 감염 환자를 수술할 땐 특히 더 조심해야 하는데 문제는 '너어어어무 너무' 바쁘다는 거다. 나중엔 조심하는 것 자체가 힘들고 버거워 조심하지 않게 된다. '별일 있겠어?', '당장 내 허리가 나갈 것 같은데 무거운 납가운 입어서 뭐하나', '바빠 죽겠는데 내 안전은 생략하자...' 하고 말아 버린다.


환자가 숨 가쁘게 들고나는 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는 점점 더 빨라지고, 간호사는 사라져 간다.



* 시민단체에서 공동 주관한 '캐런 메싱' 강연회 <공감격차 줄이기>에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일터> 178호에 기고했던 글을 다듬었습니다.






엄지 umji.let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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