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도 사람입니다
직업병 : 특정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근로조건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질환.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나오는 인계 말투나 업계 용어는 '직업병'이 아닙니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쓰이는 직업병, 오늘은 농담이 아닌 '진짜 직업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쓰러져도 병원 와서 쓰러져
며칠을 쫄쫄 굶은 사람이 두 명 있습니다. 그러다 빵이 하나 생겼는데, 이 빵은 절대 나눠먹을 수 없습니다. 무조건 한 명이 다 먹어야 합니다. 둘 다 너무 배가 고파 양보할 수 없습니다. 먹는 사람은 원망을 피할 수 없어 마음이 불편합니다. 못 먹는 사람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간호사들의 상황이 딱 이렇습니다. 누군가 아프면 다른 동료가 고스란히 그 짐을 떠안게 됩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의 휴일이 없어지고, 나 때문에 동료가 퇴근을 못 하고, 나 때문에 누군가 타격을 입습니다. 아파서 입원하고 수술을 해도 관리자가 전화를 걸어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아프다고 하면 "너만 아프냐, 여기 일하는 사람 다 아프다"고 합니다. 관리자가 나빠서가 아니라, 임상의 인력이 빠듯하기에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말들이지요. 아픈 사람에게 어쩜 그럴까 싶지만, 그 타격을 고스란히 입어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슬픈 현실이지요.
퇴근 후 각성
여러 부서의 동료들이 호소한 공통적인 증상 중 하나가 바로 '퇴근 후 각성'입니다. 근무시간 내내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쫓기듯 일하고, 후배 간호사나 본인이 실수라도 할라치면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작은 실수가 의료사고로 직결되는 곳에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퇴근해도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전력 질주한 뒤에 금세 호흡이 안정되지 않는 것처럼, 퇴근하고 몇 시간이 지나도 몸과 마음이 긴장상태입니다. 이런 심리적 불안과 교대근무가 한데 뒤엉켜 불면증을 호소합니다. 연차가 쌓이고 시야가 넓어질수록, 감지할 수 있는 위험이 많아져 '퇴근 후 각성'이 두드러지지요. 현재 임상은 경력 간호사들의 이탈로 저연차 간호사의 비율이 높아, 신규 간호사는 말할 것도 없고 숙련된 경력 간호사의 소진 역시 심화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태움'까지 가미되면 정신적 스트레스는 상상초월입니다.
근골격계 질환
병원은 환자의 체위를 바꾸거나 침대에서 침대로 이동시키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 부서에 있는 간호사들은 허리 통증을 호소하거나 목디스크를 앓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온종일 무거운 기구를 주고받는 수술실 간호사는 손목 통증이 흔하지요. 특히 수술실은 무거운 걸 들 일이 정말 많습니다. 20~30kg에 육박하는 기구 박스를 소독기에서 꺼내거나 수술상에 세팅하기도 하지요. 노하우가 쌓이고 바퀴 달린 카트를 이용해도 근골격계 질환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수술실에서 일 년만 근무해도 손목, 무릎, 허리, 골반의 통증을 호소하며 하나둘씩 한의원을 다니거나 마사지 샾을 찾게 됩니다. 복대나 요대를 착용하거나 통증 주사를 맞아가며 일하기도 하지요.
앉을 수가 없어
간호학과 학생들은 실습을 돌 때부터 '압박 스타킹'을 사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막상 간호사로 일하게 되면 압박 스타킹으로는 도저히 효과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다리에 무리가 갑니다. 많은 간호사들이 퇴근하면 누워서 ABR(Absolute bed rest: 절대 안정)을 취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간혹 데스크에 앉아 컴퓨터를 보는 간호사가 쉬는 거라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각종 처방과 기록지를 입력하고 확인하는 중입니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거나 서서 일한 날이면 '두 다리로 걸어서' 집에 갈 일이 까마득하지요. 병원 업무는 조금 미루거나 내일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 쏟아지다 보니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으면서 뛰어다니는 것이지요.
방광염과 변비
대소변 참아가며 일하다 보면 방광염이나 변비에 걸리는 건 일도 아닙니다. 간호사가 되면 생리현상을 참는 것에 일가견이 생기지요. 푹 젖은 생리대를 갈지 못해 피부가 짓무르기도 합니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화장실 갈 시간이 없다는 거야?" 반면에 간호사들은 보통의 회사원들이 점심시간에 커피까지 마신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임상을 떠난 간호사들이 백이면 백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가다라 불리는 막일도 밥시간과 휴식시간은 철저하다는데, 간호사는 먹지도 쉬지도 싸지도 못하니까요. 어딜 가든 병원보다는 낫습니다. 백프롭니다.
인터넷의 여러 익명게시판을 보면 유달리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글이 많습니다. 제 동생이 간호사인데요, 제 와이프가 간호사인데요, 제 여자친구가 간호사인데, 저희 딸이 간호사인데...로 시작하는 글은 대부분 이런 질문으로 끝이 납니다.
간호사가 그렇게 힘든가요?
매일 울고 힘들다 하고...
그 좋은 직장 들어가더니
그만두고 싶다네요.
이런 질문을 올리는 분들은 간호사의 절규를 '징징대는 것'으로 치부하고 그 업무강도를 짐작조차 못합니다. 그러면 전현직 간호사들, 또는 간호사가 아니더라도 그 고충을 아는 분들의 댓글이 우수수 달리지요. 저 역시 병원을 그만두고 "그 좋은 직장 왜 그만뒀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럴 때 구구절절 설명해봤자 상대는 공감하지 못합니다. "안 힘든 곳이 어디 있냐"는 말이 돌아오기 일쑤지요.
간호사는 전체의 97%가 여성으로 이루어진 대표적인 여초 직업 중 하나입니다. 제가 찾아낸 가장 효과적인 답은 이거였습니다.
군대 다녀온 남자 간호사들도 힘들어해요
그러면 많은 분들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합니다. 간호사들의 열악한 근로환경은 여성 노동자의 가치가 과소평가되어 온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남자 간호사들은 "여자들도 다 버티는데 뭐가 힘드냐"라는 질타에 시달리지요. 보통 힘든 직업을 가리켜 3D직종이라고 하는데, 제가 볼 때 우리나라의 임상 간호사는 4D직업 같습니다. 어렵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하며Dangerous 마지막으로 무시Diss당합니다.
작년 말, 상식을 벗어난 감정노동과 일상이 되어버린 성희롱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대한간호협회에서 <간호사 인권센터>를 개소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업무협약을 맺어, 인권침해를 막고 근로환경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라고 합니다. 잠깐의 이슈로 그치지 않고 활발히 운영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엄지 umji.lette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