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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 Feb 17. 2020

일기78





결혼을 하기 전 빨래며 식사며 하나같이 엄마 손을 빌리지 않고는 해결하지 못했던 내가 아이를 낳고서는 하루도 빨래를 하지 않는 날이 일주일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생활을 한다. 회사일을 할 때는 손이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네일케어에 들인 돈도 많았지만 이제 내 손은 잦은 물일로 생긴 습진과 분유물을 끓이다 데인 자국밖에 볼 수 없다. 그마저도 다듬을 때는 갈라진 손톱에 아이가 다칠까 까칠하게 일어난 부분만 대충 잘라주는 정도이다. 아무 걱정 없이 잠을 자 본 것은 아마도 임신하기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그때보다 나는 지금... 요리가 늘었다. 이유식 재료를 다지다 보면 칼질은 금방 늘더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틈틈이 나는 아이를 낳고 포기해야 했던 것들과 뺏겨버린 일상에 대한 글들을 쓰고 저장했었다. 하지만 이제 아이가 좀 컸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적응했기 때문일까. 이것 또한 한때라는 생각이 든다. 뒤틀렸던 일상은 얼마 지나면 어느 정도 다시 자리를 잡는다. 포기했던 것들도 다른 것들로 대체되고 보상받는다. 그리고 나면 아이가 남는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아이다. 나와 그이를 닮았고, 세상에서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생명이다. 졸리지 않는 시간에도 나에게 안겨있으면 잠에 드는 아이. 낯선 곳에 가면 내 옷을 꼭 쥐고서야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호기심을 채우는 아이. 울고 싶을 때는 가장 먼저 나를 찾고 손을 뻗는 나의 아이다. 뭘 그리 해줬다고 이렇게나 의지할까 싶다.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잠결에 세 바퀴나 굴러와 내 옆에 자리를 잡고 드디어 깊은 잠에 든 아이. 부족한 엄마 밑에서 아프지 않고 자라 주는 것만 해도 고맙다. 사랑한다. 사랑을 더 크게 표현하는 법을 몰라서 그냥 여러 번 말해준다. 네가 귀찮아할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아참, 오늘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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