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20_D를 추억하며

아물기 바라는 청춘

by 일랑





D를 회상해서인지 아니면 요 며칠 연이어 쏟아지는 비 때문인지 기분이 조금 울적하다. 그녀를 오랫동안 떠올리지 않았던 터라 이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바로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전화번호부를 찾아봐야 했다.


그러니 어쩌면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D라는 사람보다
오히려 내 마음 자체에
요점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대인 관계에 있어서 조금 시니컬 하기도 한 나는 간혹 오가는 교감 없이도 일방적으로 호감을 갖게 되는 대상이 있다. 성별을 떠나 갖게 되는 감정이다. 내가 보기에도 멋있어서(이건 팬심) 또는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이건 인류애) 아니면 노력하는 모습이 애잔하거나 장해서(이건 엄마의 마음) 등등, 사람에게 마음이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대화를 많이 나누거나 시간을 많이 보낸 사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마음을 바라지 않은 채 그저 내 감정에만 충실하여 보이는 호의. 그러니까 D가 나에게 그런 존재 중 하나였다.


나와 동갑이었던 그녀는 커다란 눈에 마른 편인 몸매, 어디서든 예쁘다 소리를 들을 정도로 조금은 화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었다. 내부적으로 예정된 충원이었고 우리 모두에게 그저 그런 일상의 한 조각일 뿐이었던 첫 대면. 말주변이 없다고 느낄 정도로 조용한 그녀였지만 수수함을 좋아하는 나에게 D의 외모는 조금 과하게 반짝거렸다. 그래서 사실 처음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늘 시야 안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가깝고도 먼 일상이 되어 특별할 것 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한편 서서히, 그리고 느리게
그녀에 대한 나의 감상이
변하고 있었다


간간히 D와 하게 되는 짧은 대화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인생관, 그리고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 이야기들에 의하면 D는 내가 가졌던 첫인상과는 사뭇 다른 사람이었다. 일단 그녀의 조용한 성격은 도도하거나 내성적이라기보다는 신중함에 가까웠다. 그녀는 또래에 비해 생각이 많았다. 예상외로 보수적이고 딱딱한 그녀는 생각이 많아 오히려 내뱉지 못하는 쪽에 가까웠던 것 같다.


같은 회사의 같은 팀이었지만 D와 나머지 팀원들은 계약 조건이 조금 달랐다. 거기서 오는 소외감은 우리가 아무리 세심하게 대한다 해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걸 알고 나서부터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팀 내에서 하나뿐인 동갑이었기 때문에 더 감정이입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과급이나 보너스가 나올 때면 늘 그녀가 신경 쓰였다. 의기소침해지지 않을까, 상처받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겉으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그때마다 역시 조금 어색했다. 그러나 그 어색함은 내가 우려했던 '의기소침 또는 상처받는' 쪽이 아닌 '부당함에 대한 불만'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차별에 무뎌지거나
스스로 자존감을 깎는 것보다
차라리 그 편이 낫다며
다행이다 싶었다


그녀의 업무는 우리 팀에서 그녀 혼자 하는 일이었다. 누구도 도와주지 못했고 도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특성상 한없이 쉬울 수도 끝없이 어려울 수도 있는 일을 그녀가 전담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상황은 후자였고 그녀는 힘들어했다. 업무가 과중할 때 계약조건의 차이를 감안해 적당히 시늉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녀는 남아서 야근을 하거나 집으로 일을 가져가곤 했던 것 같다. 지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생 둘을 둔 맏이였던 그녀는 책임감이 강했다. 그중 하나는 나이 차이가 많아 아들같이 대하기도 했다. 강남 노른자위에 집이 있어 부유하게 컸다고 오해받곤 했지만 강남이 개발되기 전부터 그곳에 살아온 토박이라 특별히 여유로운 건 아니라 했다. 오히려 취향이나 씀씀이가 검소한 편이었다.


D는 이성관계도 조금 의외였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예쁘장한 외모 때문에 먼저 대시하는 남자들도 꽤 된다 했다. 그렇지만 외모만큼 화려함을 좇지 않는 그녀에게 곧 먼저 나가떨어지곤 했다. 그녀는 또 거기에 상처를 받았다. D를 지켜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그런 패턴이 반복되었다.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고,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내가 가장 아끼는 친구와 소개팅을 주선한 적도 있는데, 막상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갖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나름 고집이 세고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D가 나를 내심 경계해서 일수도 있고 내가 그녀에게 가진 호감만큼 그녀는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일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D는 자신의 고단함에 대해서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동시에 밖으로 드러나는 감정을 완벽하게 숨기는 인사도 못되었다. 말없이 생각만 많은 그녀의 표정이 어두운 날들이 길어지면서 그녀가 언제든지 자리를 박차고 나가도 이상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마음고생이 심해진 D는 툭 건드리면 울어버릴 것 같이 슬픔을 무겁게 안고 다녔다. 하지만 회사를 떠나리라 최종적으로 마음먹었을 때는 오히려 후련한 듯 본연의 표정과 페이스를 찾아 여유로워 보였다.


돌아서던 뒷모습은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D가 회사를 떠나고 몇 달의 시간이 지나 그녀의 집 근처로 외근 나갈 일이 있었다. 잠깐 보자고 연락할까 하다가, 일을 다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안부를 물었다. 근처에 들렀다 가는 길에 생각이 나더라며, 잘 지내냐고. 일상적인 안부가 오갔지만 어떤 곳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는지,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건지, 그리고 그곳에서 행복한지는 묻지 못했다. 그녀도 나도 행복하지 못했던 그 회사를 나도 곧 나올 예정이라는 말만 전할 뿐이었다.


D에게 가졌던 호감에 비해 특별히 내가 잘해준 것은 없었다. 앞뒤 맥락 없는 나의 호의가 부담스러울까 봐 (또는 자칫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봐) 오히려 관심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더 이상 안부를 묻지도 않을뿐더러 메신저 리스트에서도 숨겨놓았다. 하지만 여전히 잊을만하면 기억의 수면 위로 언듯 언듯 떠오르는 존재. 화려한 외모 뒤에 조금은 어두웠던 그녀가 나는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랐다. 만약에 내가 그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D를 만났다면 그녀를 조금 더 밝은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었을까. 똑같이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그녀의 행복을 바라게 되었을까.


아마도 나는 그녀에게 내 모습을 투영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고단함과 속으로만 앓던 고민들, 짓눌린 청춘의 시간,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불신. 그 속에서도 자아를 잃지 않으려 백조처럼 도도하게 발버둥을 치는 모습을 나는 응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결국 내가 느낀 호감은 동질감에서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마치 D가 행복을 찾으면 나 또한 그러리라고 믿으며 그녀를 내 행복의 잣대로 세운 것은 아닌가 하고. 삼 년 전 그녀를 나는 여전히 내 아픈 청춘으로 기억한다. 제발 아물기를 바라는 내 젊음으로도.


돌아보면 아플까 봐 차마
고개도 돌리지 못하는 시간 속에
우리의 청춘이 방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