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새로운 만남이 마냥
즐겁고 신선하던 때가 있었다
하룻강아지처럼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고 신기해하던 그때
나는 20대 초반이었다
채팅으로 같은 동네 언니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녀를 O라고 하겠다. 넓디넓은 인터넷 세상에서 한 동네에 사는 또래를 만난 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심지어 고등학교 때 내 친오빠와 좀 만나기도 했단다. O와 나는 바로 SNS 친구를 맺고 이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이후 오프라인으로 만나거나 자주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종종 서로의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가는 정도의 관계가 몇 년간 유지되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사는 이 도시로 오게 되었을 때, O는 이미 이곳에 와 있었다. 아직은 낯설기만 한 새로운 도시에서 익숙한 이름이 반가워 실제로 만나기 시작했다. 취업에 있어 백지장같이 아는 것 없는 나에게 '헤드헌터'를 활용하라고 조언해준 사람이 바로 O였다. 언제나 '우리 예쁜 누구누구'라며 과한 호의로 다가오던 그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간간히 이어지는
만남에서 나는 점점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한 살 밖에 많지 않은 그녀가 나에게 엄청난 대선배처럼 가르치는가 하면 대화라기보다는 꾸짖음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 생각을 강하게 밀어붙일 때가 있었다. 한 번은 술에 취해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로 늦은 밤 전화 오기도 했고 또 한 번은 오빠가 잘 지내는지 요즘은 누굴 만나는지 묻거나 사귈 때는 어땠는지 구구절절 늘어놓는 등 불편한 대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본인이 만나는, 항상 열 살 이상 연상에 능력 많은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많았고 비서임에도 마케팅 기획을 할 줄 아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어쩐지 자연스럽지 못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그녀와의 대화들.
O를 자주 만나는 게 아니다 보니 나는 늘 당일날만 찜찜해하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곤 했다. 나쁜 기억을 빨리 지워버리는 내 능력이 이때는 독으로 작용한 것 같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그녀에게 다시 연락이 오면 '나에게 헤드헌터 활용법을 알려준 고마운 언니'라는 생각에 쪼르르 달려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한 번은, 만나자마자 "왜 그렇게 늙어 보이게 하고 다니냐"느니 "왜 아직도 로컬 회사를 다니고 있냐"느니(그녀는 외국계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국내 기업을 로컬이라고 표현했다)하며 O가 유난히도 공격적으로 트집을 잡은 날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은 거다. 내가 O에게 빚을 진 것도 아니지 않나. 친구 사이에 이 정도로 기분이 나쁘면 안 만나는 게 정신건강상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시간을 때우다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와 연결되어있던 모든 SNS를 차단했다. 전화번호를 지우면 혹시 또 까먹고 반갑게 받을 것이 걱정되어 "받지 마 OOO"라고 이름을 고쳐놓고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O가 없는 삶이
한결 평안해졌다
마지막 만남에서 내가 굳이 마음 상한 티를 내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녀의 말만큼 나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믿지는 않았기 때문일 거다. 설사 내가 부족한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 하자. 그런데 O는 마치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사실을 상대를 통해 느껴야 하는 것처럼 목말라 보였다.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시키기 위해 상대를 바싹 말리는 어쩌면 너무도 일방적인 정신적 약탈.
삼십 대가 되면서 나의 대인관계가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결혼한 친구, 아이가 있는 친구, 서울에 사는 친구, 해외로 간 친구 등 일단 여건이 달라지면 교류가 급속히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편함을 이기고 O와의 관계를 유지해왔을 것이다. 비슷한 여건으로 만날 수 있는 몇 안 남은 친구였으니까. 신기한 경험이었고 흔하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이어갈 이유도 없었다.
아마도 시작된 방법이 흥미로웠기 때문에 나의 뇌가 이 관계를 매력 있다고 착각한 것일 수도 있겠다. O와 나의 친구관계가 성립되어 유지해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대인 관계가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 하기 이전에 나 자신에 대한 걱정이 우선이어야 했다. 다행히 아직은 스스로를 먼저 아낄 줄 아는 건강한 정신이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는 않은 듯하다. O의 입장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연락이 끊긴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마음먹은 연유를 시시콜콜 설명해줄 정도로 그녀에게 애정이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아닌 다른 것에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
때로는 나를 너무 지치게 한다
내가 관심 없는 것에 대한 관심, 하고 싶지 않은 것에 참여, 맞지 않는 사람과의 화합을 강요받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자꾸만 기지개를 켜는 느낌. 맞춰줄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편안한 사람을 만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쯤, 이제는 너무도 잘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군가를 위한 선택보다는 나를 더 소중히 하는 결정을 앞으로도 내릴 수 있기를. 필요한 순간마다 철저하고 단호하게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도 결국 내 인생이니까. 나를 위해줄 마지막 사람은 결국 또 나일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