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쪽으로든 부지런히
F와의 처음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그녀와는 각기 다른 대학으로 진학했지만 서로 도보 10분 거리로 붙어있었기 때문에 대학생 때도 종종 얼굴 보는 사이였다. 내가 고등학교 말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디자인만 하고 있다면 F에게는 그동안 크게 두 번의 방향 전환이 있었다. 그녀는 생명과학 학부를 졸업해 미술 이론 석사를 하고 종전에는 로스쿨까지 졸업했다. 성격상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와 더 어울리는 행보가 아닐까 싶은데, 한우물만 팔 것 같은 그녀가 이리도 크게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노라면, '어쩌면 학문이란 저 위에서는 다 일맥상통 하나보다'라고 생각될 정도다.
나와 F가 공부했던 도시를 떠나
지금 이 도시에 살기로 결정한 것은
꽤나 큰 결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F에게는 말이다.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합류한 나와는 달리 F는 그곳에 부모님을 두고 혼자 나와 이곳에 정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묻고 싶었다. 무엇이 그녀에게 그런 결정을 내리게 했는지. 그곳이 그만큼 싫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 곳이 그 정도로 좋은 것인지.
우리는 서로 죽고 못 살 정도의 절친은 아니지만 인연의 끈만큼은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처음 F와 나 사이에는 또 다른 인물 하나가 더 있었는데 나와 그 친구가 더 이상 교류하지 않게 되면서 자연히 F와의 개별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F와 나는 미술을 같이 공부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에게는 전공이었던 미술이 그녀에게는 교양인 셈이었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한 그녀는 그 어려운 생명과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미대에 다니던 내 눈에 그녀는 과학보다 미술에 더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디자인을 더 공부하기 위해 그 도시를 떠날 때, 그녀는 그곳에 남아 미술 이론을 공부하게 된다. 그렇게 인연이 끊어지나 싶었지만 그녀가 이 도시로 오게 되면서 다시 뜸하게나마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우리는
한참 방황했던 것 같다
나는 한 우물만 팠음에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고 F는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딱히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서로 만나면 답답함을 토로하기 바빴던 시간이 흘러 나는 또 다른 회사를, F는 로스쿨을 선택하게 된다. 삼 년간 지방으로 내려가 공부한다는 그녀에게 나는 침대에서도 책을 볼 수 있는 쿠션을 안겨 보냈다. 법조인이 되면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과거 생명과학을 공부할 정도로 학업에는 소홀함이 없었던 F는 법이라는 낯선 분야도 뒤쳐짐 없이 멋지게 소화해냈다. 3년간의 공부를 마쳤다며 '변호사 시험 보는데 레퍼런스 좀 되어달라'는 연락에, 또 큰 고비를 앞두고 있구나 했는데 곧바로 '합격했다'며 모든 과정을 쉬워 보이게 만드는 그녀. 얼마 전에는 내가 다니는 회사 근처로 한 달간 출퇴근하게 되었다고 그 사이에 한번 보자더니 독감에 걸려 기회를 날리고 지난 5월 교토행 비행기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녀의 어머니께도 정말 오래간만에 인사드릴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F는 지금 한 기업에 들어가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변호사 시험에 통과하면 의례 드라마처럼 로펌에서 일할 것이라고 짐작한 무식쟁이 나로서는 좀 의외라고 생각되었지만, 그것도 한 방법이겠다 싶다. 교토로 진입하는 공항버스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 보니 나와 같은 흔한 회사원 냄새가 폴폴 난다. 큐레이터로, 또 로스쿨로 나아가던 그녀와는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 못한 회사 얘기로 말이 통하는 것이 반갑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듯
나도 내가 세상을 바꿀 줄 알았다
그게 대통령이 되어서든, 과학자가 되어서든 말이다. 미술을, 그리고 디자인을 하게 되면서도 나는 이것으로 세상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학교는 다 그렇게 가르치니까.) 그리고 지금, 최소한 회사에라도, 소속된 브랜드에라도 변화를 만들고 있어야 하는 지금의 나는 과연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의심된다. 당장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건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미지수인 마당에 큰 그림은 무슨. 세상의 변화를 위한 야심은 책장 어딘가에 진작 처박아 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어차피 일신의 행복이 중요한 세상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F의 방법도 응원해 주고 싶다. 마치 세 사람의 몫을 이번 생에 모두 살아낸 듯한 그녀는 그게 어느 방향 이든 간에 쉬지 않고 나아가는 쪽을 선택했다. 결국 도달한 곳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도, 그 경험은 오롯이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것이니까. 그러니까 그만큼 더 멋있는 사람이 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디자인을 선택하고 여기까지 오는 내내 후회하거나 다른 것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지금이라도
내가 가는 길에 의심이 생긴다면
F처럼 과감하게 핸들을 틀 용기가
나에게도 과연 있을까?
고등학교를 다닐 시절, 그녀는 일본 드라마를 보며 일본어를 배웠다. 마침 교토로 가는 버스에서 그때 생각이 났다. "너, 그때 일본어 좀 했잖아"하고 묻자 "다 까먹었는데 안 그래도 요즘 다시 배우고 있다"고 한다. 그래, 너는 어릴 때부터 원하는 게 확실했었다. 그리고 행동할 줄 아는 아이였다. 앞으로도 잘 해내리라 믿는다. 행복을 향해서도 나아가서 도달할 것이라고, 그래서 지금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