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21_멋진 그녀, X

나는 늘 당신의 건투를 빕니다

by 일랑




가고 싶은 곳을 향해서
정말 쉬지 않고 움직여야
생각했던 그곳은 아닐지라도
그 비슷한 곳에나마
도달할 수 있는 것 같아


5년 전 X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이 말을 가슴속에 새겨놓고 기억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간직하리라 다짐했다. 그녀는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허덕이던 말단 사원인 내 눈에 모든 것을 다 이루고도 더 높이 훨훨 날고 있던 임원이었다. 당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좇아 입사했지만 2년 만에 그 업무가 다른 조직으로 넘어갔고 계획에도 없는 보직으로 발령을 받았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보다 힘들었던 것은 하고 싶은 일을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업무가 넘어간 그 조직의 리더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한다. 그렇게 X와 한 카페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했던 일을 정리해서 준비해 가기는 했지만 입사 2년 만에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했을까. X 또한 내가 준비해 간 자료와 설명에 귀를 기울여 주면서도 그다지 감명 깊게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내 의지 하나만은 높이 샀다. 한 없이 어려울 수도 있는 사이에 얼마나 이 일을 하고 싶었으면 용기 내서 연락했을까 했단다. (하지만 솔직히 당시에는 그녀가 그렇게 어려운 사람인지 미처 몰랐다.) 어차피 경력직도 새로 들어오면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일이니 그저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 가장 좋은 지원서를 들고 있는 것이라며. 그녀는 그렇게 건방져 보일 수 있는 내 행동의 좋은 쪽만 바라봐주었다.


결국 나는 한시적으로나마
그녀와 함께 일할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멀리서 볼 때보다 더 멋있었다. 보통 해외파들이 한국어를 할 때 영어를 많이 섞어 쓰거나 단어들을 심하게 원어민 발음으로 굴려 말하는데, 해외에서 오래 생활한 그녀는 한국어마저도 고급스러운 (하지만 어렵지 않은) 단어를 썼고 여기에 외국식 위트까지 더해져 더 세련된 어휘를 구사했다. 두 자녀와 친구같이 지내는 모습마저도 보기 좋았다. 그 누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냐마는 그녀의 자식 사랑은 유난스럽지 않으면서도 보는 이를 웃음 짓게 했다. 20명이 넘는 팀원들의 생일이나 승진같이 축하할 일들도 직접 챙겼고 무엇보다도 그 모습이 일상처럼 자연스럽다는 게 더 놀라웠다.


X와 나는 연차 차이도 많이 나고, 근본적으로 다른 배경이기 때문에 '내가 그녀의 위치에 간다면 이렇게 하리라'는 생각 자체가 쓸데없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의 '이상'이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이며 계속해서 새로운 성과로 후배들을 위한 길을 닦아준다는 사실 외에도 반할 이유는 무궁무진했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누군가를 대할 때의 여유로운 모습도, 자신이 아끼는 팀원을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의 우아한 모습도, 팀원을 격려하거나 수고를 치하하는 따뜻한 모습까지도 가능하기만 하다면 복사해두고 싶을 정도로 나에게는 지침과도 같았다. 그녀의 모든 행동에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실존하지 않을 것 같았던
이상적인 상사를 만났다며
감격을 거듭하던 시간이었다


X와 함께 일할 수 있는 정해진 기간이 지나 본래의 조직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 그녀는 그 시간을 연장해주지 못함에 미안해했지만 나는 지난 경험만으로도 두고두고 행복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X 또한 조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본래 있던 조직으로 돌아가 주어졌던 일을 했고 그 업무 경험을 살려 이직도 했다. 이 모든 것을 겪고 나서 결국 깨달은 것은 업무의 종류만큼이나 함께하는 사람들과 내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설정한 정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 그 비슷한 방향으로나마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 나는 X가 내게 해 주고 간 이 한마디를 꼭 지키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만을 좇던 내 모습은 신입 때나 패기 있어 보였지만 지금의 내가 한다면 아마 오기에 가까운 몸부림일 것이다. 내가 나를 힘들게 하던 시간, X는 가까이 있을 때나 멀리 있을 때나 바라보고 있으면 위로를 받는 등대 같은 존재였다.


물론 나는 그때 X가 보여준 좋은 모습들 중 단 하나도 제대로 못해내고 있다. 특히 팀원들이나 협력사 담당들을 대할 때의 모습은 철없기 그지없다. (이건 신입 때보다 더 한 것 같다.) 나는 여전히 하기 싫은 일에 얼굴을 찌푸리고 납득가지 않는 지시에 토를 단다. 현재 회사에 뼈를 묻을 생각도 없거니와 여차하면 내 이득을 위한 선택을 하리라 늘 이기적인 마음먹고 있다. X처럼, 혼란에 빠진 초년병이 조언을 구하며 다가갈 만큼 대단하게 성취하지도 못했으며 매체에 인터뷰가 뜰만큼 주목받는 인사도 못된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따르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분명 큰 행운이다


물론 나는 X와 길게 일하지도 않았고 비정상적이라 할 수 있는 루트로 만났으니 그녀의 본래 팀원들이 바라보는 그녀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예를 들면, 나를 자신의 사람으로 여기지 않아 더 친절했다던가) 절대 확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고 느꼈든 간에 내게 보여준 그녀의 카리스마는 절대적으로 매력적이었다. 나는 내가 보고 느낀 그녀의 매력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기로 했다. X를 알게 된 후 여기저기 구멍 났던 내 마음도 비로소 메꿔지고 채워졌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 훨훨 날아갔다. 이제 X의 sns는 아이들과의 행복한 주말과 새로운 회사에서 일어나는 다이내믹한 순간들로 가득하다. 그녀가 떠날 때 (아마도 내가 작별 메일을 썼던 것 같은데 그에 대한 화답으로) 그녀의 개인 메일 주소를 받았다. 이후로 다시 연락을 할 계기가 없어 메일을 보낸 적은 없지만 나는 그것을 마치 보험과 같이 붙들고 있다. 다시 내가 깊은 수렁에 빠질 때,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해야만 한다고 느끼면 나는 분명 주저 없이 그 주소를 찾아 메일을 띄우리라. X는 도움을 구하는 후배의 손이라면 늘 따뜻하게 잡아주는 선배이니까. 성별과 나이와 직급과 그 모든 배경을 떠나 인간적으로 멋있다고 느낀 어른. 나는 여전히 X와 같은 어른이 되고 싶은 철없는 애송이지만 그녀의 말 대로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언젠가, 내가 처음 그렸던 그 비슷한 곳에라도 도달할 수 있도록. 나 같은 후배를 하나라도 더 도울 수 있는 자리에 오를 수 있기를.


어디선가 X가
내 소식을 듣게 된다면
그녀 또한 뿌듯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 묵은 감사를
대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