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22_L만 아는 나의 모습

스무 해만큼의 고마움

by 일랑




L은 추진력 있고
유머러스하면서도 맺고 끊음이
확실한 성격의 친구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지는 않지만 다 크고 나니 그런 성격이 명확해졌다. 그녀는 내 친구들 중 그 누구보다 야무지게 자기 앞가림하는 녀석이다. L과는 평소에도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인데 내가 뭔가 배워보고 싶다거나 가보고 싶다며 흘리는 말들에 추진력을 더해 행동으로 응원하는 참으로 건실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내가 꽃을 배우고자 마음먹고 일본어를 배우기로 결정했을 때 늘 L이 그 뒤에 있었다. L은 날 속상하게 하는 대상을 (말로써) 무자비하게 처단해주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로 하루의 웃음을 주기도 한다. 울고 싶을 정도로 힘든 일을 희화해서 개그로 승화하기도 하며 그런 식으로 많은 위로를 주는 그녀다.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내 성격이나 결정들을 마치 거울보고 이야기하는 듯 온전히 이해하고 당연하다 말해주는 그녀는 최근 자기보다 예쁜 딸 I를 낳아 육아사진 보는 재미를 매일같이 선사하는 중이다. (엄마를 닮았다가 아빠를 닮았다가 하는 신기한 아기) 퉁퉁 불어 태어난 녀석이 벌써 100일이라고 찍은 사진을 보니 큼직한 부모님 이목구비를 닮아 똘망똘망 예쁘게도 생겼다.


꼬물이도 크면 엄마랑 이모같은 친구 만나렴


L은 유쾌한 성격에 비해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회사에 다닌다. 지금도 1년간의 출산 및 육아 휴직을 눈치 보지 않고 쓰고 있다. 그녀만큼 유머러스하면서도 자상하고 차분한 남편을 만나 안정적인 가정을 꾸렸다. 한때 나는 그녀가 본인만큼 재미를 추구하는 누군가를 만나 다이내믹하게 살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L은 본인에게 득이 되는 쪽을 아는 친구답게 매번 현명한 선택을 하며 한 걸음씩 야무지게 나아갔다.


여행을 함께하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고 그랬던가


한 번은 꽤나 충동적으로 그녀와 3박 4일간의 제주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제주도에서 나는 지난 20년을 알아온 L의 또 다른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어렸을 때는 그녀와 다른 점이 많다고 생각했었다. (같은 반으로 만났을 때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교복 입고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행 중 서로의 크고 작은 생활습관들이 드러나면서 우리는 굉장히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굳이 야경을 보겠다고 늦게까지 일정을 짜지 않고 예약되어있는 스케줄에 미리미리 준비해서 움직이던 그녀. 한 술 더 떠서 엑셀로 만든 일정표에 최저가 비교까지 한 후 결제한 덕에 스스로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소셜 3사를 통해 항공 숙박 렌터카를 하나씩 이용하는 '소셜여행'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내내 유쾌한 상황들의 연속이었던 것은 흔하디 흔한 제주도를 여행하면서도 L과 함께 바라본 풍경 때문일 것이다. 여행을

자주 혼자 다니는 나에게 동행이라는 존재의 긍정적인 이미지로 관계에 있어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그녀. 사회에서 각자 나름 까다롭다는 평판을 받는 우리 둘은 여행 내내 의견을 맞추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서로에게만은 늘
'착한 친구'일 수 있는 즐거운 관계


겁도 없이 제주도에서 렌트카로 여행한 두 여자


나보다 이른 결혼, 이제는 앞서가는 출산과 육아로 L과의 노선이 이대로 달라지는 것 같아 조금은 외롭기도 했다. 아니 사실 여전히 조금 그렇다. 하지만 I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로 인해 서운한 마음이 생긴다는 자체가 죄스러워진다. 출산도 육아도 분명 처음인 L은 이것마저도 참 무난하게 해내고 있다. 당사자는 힘들다 서툴다 느낄지 모르지만 옆에서 보면 처음이라는 게 신기할 정도로 능숙하다. 본래부터 준비도 철저하고 사전 조사도 잘 하는 그녀는 인생의 모든 단계에 대비되어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물론 나도 조사하고 준비하는 점에서는 그녀와 비슷하지만 계획대로 실행해내는 부분은 그녀가 월등한 것 같다. 밖에서는 나도 나름 '물어보면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내가 물어볼 것이 생기면 늘 L을 먼저 찾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다.


그렇게 L만 아는 나의 모습들이 있다. (좀 많다.) 세상을 마주 하기 위해 가리고 있던 껍질을 벗어내고 그녀 앞에서는 한없이 날것 그대로의 얼굴을 하게 된다. 당황하고, 상처받고, 깊이 후회하고 또 반복하는 바보 같은 행동들도 L은 인내심 있게 지켜봐 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 정말 깊은 수렁에 빠지면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따끔한 일침이 필요한 순간도 그녀는 기가 막히게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작은 몸에 비해 한없이 큰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이렇게 오랜 시간 서로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이가 될 줄 상상도 못 하였다. 내 얼굴에 슬슬 잔주름이 잡히고 L이 아기를 낳고 이렇게 각자 노후를 걱정하는 평범한 사회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학교 정문을 지나던 단화 신은 여중생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그런 친구가 될 줄 말이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서도 그녀가, 그리고 내가 곁을 지키고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감히 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이어진 인연만으로도 충분한 행운이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지나온 만큼 긴 시간이 다시 한번 지난 후 여전히 L과 내가 서로의 삶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를 바란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으로도 나는 남부끄럽지 않게 누리고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여 그렇지 못하더라도
언제든 떠올리면 든든해지는
영원한 내편일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