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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자유인 Jul 17. 2021

시작은 좋으나 끝도 좋은 경우는  드물다

춘추시대 제환공의 삶

서기전 770년부터 시작하는 중국의 춘추시대 초기에 131개나 되는 작은 국가들이 존재하다가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전국시대에는 7개의 국가로 압축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진나라가 통일하였다. 춘추시대에는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다섯 명의 패자가 주나라를 대신하여 중원의 정치를 좌우했다. 이 다섯 명의 패자를 '춘추 5패'라고 하며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왕 합려, 월왕 구천을 꼽는데 초장왕 대신 진목공을, 월왕 구천 대신 송양공을 넣는 경우도 있다.      


춘추 5패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제환공은 강태공의 12세 손이고 지금의 산둥성 지역에 있던 제나라의 군주로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관포지교’의 주인공인 관중과 포숙 등의 보필을 받아 패자가 되었다. 관중과 포숙은 친구였지만 포숙은 뒷날 제환공이 되는 공자 소백을, 관중은 공자 규를 주군으로 모셨다. 관중과 포숙은 자신들이 섬기는 주군을 모시고 외국에 망명하고 있다가 제나라에 정변이 발생하자 상대보다 먼저 국내에 들어가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처했다. 먼저 국내에 진입하는 사람이 임금 자리를 차지하는데 유리하였으므로 관중 일행은 매복하여 포숙 일행을 기다렸다가 관중은 공자 소백에게 활을 쏘았는데 배에 화살을 맞은 소백이 쓰러졌다. 관중은 기뻐하며 공자 규에게 소백을 죽였다고 보고하고 안심한 채 천천히 제나라에 들어갔다. 하지만 관중의 화살에 맞았다고 생각했던 소백은 재빨리 제나라에 들어가 이미 임금이 되었다. 소백은 관중의 화살이 허리띠의 쇠고리에 꽂혔으나 일부러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연기를 하여 관중을 안심시켰던 것이다. 노나라로 도망쳤던 공자 규는 제환공의 편지를 받은 노나라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포숙은 제환공에게 ‘주군이 제나라만 다스리고자 한다면 저로 충분하지만 패자가 되려면 관중이 아니면 안 됩니다. 관중이 머무는 나라가 강국이 될 것이니 그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진언하여 제환공은 관중의 족쇄와 수갑을 풀어주고 예를 갖춘 뒤 정치를 맡겼다. 제환공의 포용력도 가치 있지만 제환공 등극의 일등공신인 포숙이 공을 내세우며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대신 관중을 적극적으로 천거한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사마천은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찬하기보다는 사람을 잘 알아보는 포숙을 더욱 칭찬하였다.”고 하였다.      

 

제환공은 춘추 5패가 되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관중에게 활을 맞았을 때 치명상을 입지도 않았는데 관중 일행을 속인 임기응변은 탁월했다. 또한 정권 쟁탈전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관중을 처벌하지 않고 중용 한 점은 아무나 할 수 없는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세월이 흘러 관중이 병으로 눕게 되자 제환공은 직접 문병하며 국정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 것인지를 관중에게 묻는다. 관중은 포숙에게 맡기면 되지 않느냐는 제환공의 물음에 포숙은 지나치게 선악의 구분이 분명하다는 이유로 적임자가 아니라고 답한다. 관중은 친구이자 자신을 제환공 다음가는 자리에 추천한 포숙을 냉정하게 평가하면서 오로지 국가의 미래만을 염려하는 진정을 보여준다. 그러자 제환공은 자신을 위해 자식을 삶아 별미를 맛보게 했던 역아, 스스로 궁형을 받고 환관이 되어 자신을 섬긴 수초, 위나라 공자 신분으로 후계권조차 포기한 채 자신의 신하가 된 개방 등에게 국정을 맡기면 되겠느냐고 묻는다. 관중은 사람의 정이란 자식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없는 법인데 제 자식에게 못할 짓을 한 역아가 제환공에게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는 이유로 반대했다. 사람은 자기 몸보다 귀한 게 없는데 자신의 몸에 차마 못할 짓을 한 수초가 제환공에게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는 이유로 반대했다. 사람은 자기 부모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없는데 부모에게 차마 못할 짓을 했으며 나라의 군주가 되고 싶은 것은 사람의 욕심 가운데 가장 큰 것인데 보위를 버리고 제환공의 밑에 와 있는 것은 더 큰 것을 노리고 있다는 이유로 개방을 반대했다.      


관중이 죽은 뒤 잠시 국정을 맡았던 습붕이 죽자 제환공은 포숙에게 자리를 대신하게 했으며 관중의 유언에 따라 역아 등 3명을 측근의 자리에서 몰아냈다. 하지만 결국 포숙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역아 등 3명을 모두 불러들여 좌우에서 시중들게 했으며 포숙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이들 3명은 거리낄 사람이 모두 없어지자 늙고 무능해진 제환공을 속이면서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멋대로 행동했다. 마침내 제환공이 중병에 걸리자 역아와 수초는 궁문을 봉쇄하고 제환공의 침궁 주위에 높은 담장을 쌓아 작은 구멍을 내서 생사를 확인했다. 며칠 동안 마시지도 먹지도 못한 제환공은 ‘내가 죽어서 영혼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영혼이 있다면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중보(관중을 높여 부른 말)를 만날 것인가?’라고 말한 뒤 죽었다. 43년 동안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며 73세에 비참하게 세상을 떴다.        


제환공은 관중에게 국정을 맡겨 패업을 달성하며 춘추시대 초반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으나 말로는 비참했다. 제환공은 비범함과 포용력을 갖추었으나 관중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컸다. 제환공과 관중은 물과 물고기처럼 호흡을 맞춰 국정을 훌륭하게 이끌었는데 물고기가 떠나자 물은 삽시간에 혼탁해져 버렸다. 여러 사료에는 제환공의 어리석음과 안일함을 보여주는 사례가 많이 나오지만 행적으로 미루어 보면 제환공이 보통 이하의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환공이 43년이란 긴 세월 동안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있다 보니 만년에는 긴장감이 이완되었을 수도 있다. 하여튼 제환공의 비참한 말로의 책임은 전적으로 제환공 자신에게 있다는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시경》에 나오는 “모두 시작이 없는 것은 없으나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둔 경우는 드물다.”는 말을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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